< 제99화. 말년휴가 (2) >
제99화. 말년휴가 (2)
말년 휴가 첫날.
이강진과 다르게 백우호와 김철은 이날을 위해 휴가를 아끼 고 아껴 뒀다.
그래서인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감회가 남달랐다.
위병소로 내려가는 길에 백우호가 동기들에게 문득 이런 제 안을 했다.
"우리, 아침도 안 먹었는데 가서 밥이나 먹자."
"좋지."
"뭐 먹을 건데?"
그것부터 정하는 게 좋다.
이 중에서 가장 휴가를 많이 나가 본 이강진이 먼저 입을 열 었다.
"면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고기를 먹을지, 아니면 간단하게 먹을 건지. 말만 해 주면 내가 알아서 가게들 나열해 줄게."
"이야, 역시 이강진! 휴가를 하도 많이 나가서 이젠 그런 것들 까지 다 꿰차고 있네!"
이들은 모르겠지만, 이강진은 군부대 인근에 위치한 시내만 거의 4년에 가깝게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보니 어디가 맛집인지 전부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김철은 어디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결정권은 백우호 에게 넘어갔다.
"그럼 감자탕 먹을까? 소주 한잔 하기도 좋고. 날씨도 추우니 감자탕 먹기 딱 좋잖아. 어때?"
"나쁘지 않지."
이강진은 감자탕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가게 세 곳을 추천했다.
"미원 감자탕, 원조 햇드린 감자탕, 청추 감자탕. 이 셋 중에 하나 가면 되겠네. 버스 터미널하고 전철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는다고 하면, 미원 감자탕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
"오케이, 그럼 거기로 가자."
거의 맛집 내비게이션급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이강진 덕분 에 세 사람의 행선지가 빠르게 결정되었다.
감자탕을 안주 삼아 가볍게 낮술을 즐기는 말년 3인방.
이들의 주요 이야깃거리는 얼마 전에 겪었던 대형 이벤트, 혹 한기 훈련이었다.
백우호는 가라군장부터 시작해서 3일 차 저녁때 텐트 안에서 분대원들과 같이 몰래 막걸리, 안주를 먹은 일까지 김철이 몰랐 던 사실을 이야기해줬다.
김철은 이강진과 백우호를 보면서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선 보였다.
"간도 크지. 그보다 술 받아 온 게 우호, 네가 아니라 강진이가 한 일이라고?"
"어, 그렇다니까."
"안 믿겨지네. 사고를 쳐도 난 무조건 우호가 칠 줄 알았는데."
백우호는 사고를 잘 치는 이미지였지만, 이강진은 달랐다.
모범 병사라는 타이틀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이강진이었다.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태껏 안 했을 뿐이지, 나만큼 농땡이 피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걸."
그동안 포상 휴가 때문에 일부러 모범 병사인 척해 왔다.
하나 말년병장이 된 순간, 이강진은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 다.
군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강진. 알면 알수록 언제, 어느 때에 농땡이를 피우면 간부들에게 안 들킬 수 있는지 잘 보인다.
그러나 김철은 아직도 이강진의 기행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
"그래도 안 들켜서 다행이야. 들켰다간 지금처럼 말년 휴가도 못 나왔을 테니까."
"그렇지."
위험천만한 순간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세기도 싫었다.
처음에는 악운이 겹치고 겹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과적 으론 안 들키고 무사히 넘어갔으니, 결국 운이 좋은 셈이었다.
* * *
혹한기 훈련에 있었던 일들을 안주로 삼아 회포를 푼 뒤.
이강진은 이들과 헤어진 후에 청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탑 승했다.
고속도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강진은 혀를 내둘렀다.
'눈이 많이 왔나 보네.'
이강진이 치울 거 아니면 그다지 상관없는 눈이다.
'우리 부대도 주기적으로 제설차가 와서 눈 한 번만 쫙 밀어 줬어도 참 편하게 겨울을 보냈을 텐데.'
이제 군대에서 눈 치울 일은 없을 것이다.
눈을 감고서 잠에 취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창밖으로 익 숙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지나 가로수 길을 달리는 시외버스.
저 멀리 터미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는 얼굴이 이강진을 반겼다.
"형님, 여기입니다!"
이강진의 오른팔이기도 한 나두석이 손을 번쩍 들고서 자신 의 위치를 알렸다.
손에는 검은 비 닐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거 뭐야?"
"아, 이거 말입니까? 날씨도 추운 거 같아서 형님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서 드리려고 사온 커피입니다. 아직 따뜻할 겁니다. 자, 드세요."
역시 나두석. 이런 센스 덕분에 이강진은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나두석이 몰고 온 차에 오른 이강진.
"차 바꿨어?"
"예, 이번에 새로 뽑았습니다."
"여기에 비닐 붙어 있다."
"엇, 그렇습니까?"
미처 제거하지 못한 비닐.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두석을 대신 해서 이강진이 보조석 아래쪽에 붙어 있는 비닐을 제거해줬다.
"뽑은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아직 새 차 냄새가 나는 거 보니 까."
"2주도 안 됐습니다, 헤헤. 제 드림카였는데, 형님 덕분에 이번에 큰맘 먹고 뽑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나두석이 열심히 해서 번 돈이다.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차 사 는 데 보태 쓰라고 특별히 돈을 주거나 한 적은 없다.
차를 몰아가던 나두석이 중요 사항만 간추려서 이강진에게 보 고했다.
"청주 두 번째 지점은 내년 1월에 바로 오픈할 수 있을 거 같 습니다."
"그래? 빠르네."
"서울 지점도 2월 중에는 오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 까요? 그냥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일자 맞춰서 오픈하게끔 조 금 시기를 늦출까요?"
"그냥 그때 오픈할 수 있을 때 오픈하도록 해."
오픈이 빠르면 빠를수록 이강진은 좋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 요 뭐가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직원분들에게 그렇게 전달해 두도록 하겠 습니다."
"근데 서울 지점이 2월에 오픈이라면…… 위로 올라갈 사람들 은 슬슬 집을 알아봐야 하지 않나?"
이게 걱정이었다.
청주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예, 안 그래도 다들 집을 봐 두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혹시 모르니까 미리 봐 두라고 슬쩍 말을 흘려 뒀거든요."
"잘했어."
나두석 덕분에 일 처리가 훨씬 수월해졌다.
직원들의 복지가 좋아야 그만큼 효율이 극대화된다.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회귀 이전에는 돈을 최우선으로 했다가 쓰디쓴 실패의 맛을 봤다. 이강진은 그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서 이번에는 다른 방향 으로 사업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너도 집 알아보고. 사무실은 내가 봐 둔 곳 있으니까 그건 내 가 알아서 처리할게."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형님도 서울로 올라가실 거죠?"
이강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야지."
서울로 올라가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될 이강진.
그렇게 되면 그의 어머니는 청주에 혼자 남게 된다.
하나 걱정이 들진 않았다.
조만간 황민수가 이강진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예정이기 때 문이다.
갑자기 나두석이 그에 관한 질문을 했다.
"형님 어머님, 가까운 시일 내에 황 사장님하고 살림 합치신 다고 하던데, 두 분 결혼하시는 거 맞죠?"
"그렇지."
이강진의 어머니 입장에선 재혼이다.
"결혼식은 따로 안 하신대요?"
"그것도 물어보긴 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황민수, 두 사람에게 다 물어봤다.
두 사람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안 하실 거래."
"예? 왜요?"
이유는 간단했다.
"창피하대."
"하하하……."
이강진은 내심 결혼식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어머 니의 새 출발을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민수는 이강진의 어머니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의 어 머니가 괜히 돈 낭비할 필요 없다면서 결혼식을 거부했기에 황 민수도 자연스럽게 안 하는 쪽으로 의견이 쏠리게 되었다.
대신, 결혼식 말고 다른 걸 하기로 했다.
"나 전역하고 1 월에 다 같이 결혼식 같은 파티 하기로 했으니 까 너도 와라."
"하하! 결혼식 같은 파티는 어떤 겁니까?"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가게에서 먹고 마시고 그러는 거지, 뭐."
어쩌 면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새 출발일지도 모 른다.
그래서 이강진은 더 이상 결혼식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행복은 남이 정해 주는 게 아닌, 본인이 찾는 거니까.
* * *
말년 휴가 동안 이강진은 미뤄 둔 일을 최대한 해 둘 생각이 었다.
우선 주식부터.
예전에 사 뒀던 것들을 쭉 훑었다.
"많이 올랐네."
내년이 되면 급속도로 떨어질 것들은 이번 기회에 다 처분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운 종목에 투자한다.
돈은 계속 굴려 주는 게 좋다. 돈이 돈을 부르는 시대이기 때 문이다.
잠시 이강진은 자신의 계좌 현황을 살폈다.
"5천 정도만 미리 빼 둘까."
어머니에게 드릴 돈은 따로 챙겨 뒀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이 강진이 계속 생활비를 보내 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또 뭐가 있으려나
이강진이 서울로 올라갈 시기는 2월 초다.
전역한 다음 약 한 달밖에 여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미리미리 해 둘 생각이었다.
그때, 행복이가 앞발로 이강진의 왼쪽 발을 툭툭 건드렸다.
"귀여운 녀석. 형 보고 싶어서 왔어?"
생각해 보니 어머니하고만 이별하는 게 아니었다.
행복이와도 헤어지게 된다.
미래를 예감하기라도 한 걸까. 행복이는 오늘따라 유독 이강 진의 곁에 달라붙고 싶어 했다.
이강진은 행복이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걱정하지 마. 형 청주로 자주 내려올 테니까."
이강진의 말에 대답하듯 행복이가 작게 '왕!' 하고 짖었다.
"조금 있다가 사무실에 한번 들러야 하고…… 가만."
달력을 보던 이강진은 문득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사회에서 보내는구나."
크리스마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일 텐데, 어느 순 간부터 연인들의 대형 이벤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강진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여자 친구가 없다.
물론 한지윤이 있긴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둘이 사귀는 관계는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
"이 번에도 솔로구나."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스키장에서 그냥 고백할 걸 그랬어."
두 번째 후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주식이나 사업에 관해서는 빠싹하지만, 이강진은 연애 쪽에 대해선 아직 프로가 아니다.
타이밍을 놓친게 아쉽지만,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그때 고백해야지."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가슴으로 하는 거다.
나두석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년 크리스마스는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가질 무렵.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라인혁한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 강진이냐? 휴가 나왔다며. 잘 지내고 있지?
"집에서 이것저것 하면서 쉬고 있었어."
-그래? 잘됐다. 그럼 너 말이다. 혹시 25일에 시간 되냐?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이다.
빨간 날이기에 사무실로 출근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한가할 거 같긴 한데……. 왜?"
-왜긴, 솔로들끼리 한잔하자고 부르려고 했지.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 사람은 외로움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답은 '솔로'다.
-집에서 혼자 크리스마스 보내면 좀 그렇잖아. 아주머니는 황 사장님하고 따로 시간 보내실 테고. 괜히 두 사람 눈치 주지 말 고 나와서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자.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이강진이 혼자 집에 있으면, 그의 어머니는 분명 신경을 쓸 것 이다.
그 신경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강진은 라인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알았어. 그때 봐."
-오냐, 구체적인 시간, 장소는 정해지면 알려 줄게. 지금 솔로 군단 모집 중이거든.
이강진은 본의 아니게 라인혁의 솔로 군단에 합류하게 되었 다.
하지만 라인혁은 모를 것이다.
조만간 이강진은 1075대대뿐만 아니라 그 솔로 군단에서도 전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 제99화. 말년휴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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