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화. 마지막 훈련 (7) >
제98화. 마지막 훈련 (7)
올해 들어서 워낙 많은 눈들을 봐서 그런 걸까. 병사들은 이 제는 눈이 내려도 그러려니 하는 단계까지 접어들게 되었다.
애초에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기상청에서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서 그런 지 오히려 지금의 기상 악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간부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줄발 준비! 서둘러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군장까지 등에 짊어지니 몸이 지면에 박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시작된 행군.
넋 놓고 그저 앞만 보면서 걷다 보니 하늘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면서 도로변을 걷는 병사들.
경광봉을 든 간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차 온다! 좌우로 밀착!"
"좌우로 밀착!"
중형 세단 한 대가 병사들 사이로 쌩하고 지나갔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면서 백우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차 타고 싶다."
모두가 다 그러고 싶을 것이다.
이강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회에 나가면 원 없이 타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이때만 참아."
"그래, 참아야지. 군대는 참을성이 없으면 못 버티는 곳이니까."
입대하기 전의 백우호는 원래 참을성이 많지 않은 남자였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오고 나면 없던 참을성도 절로 생긴다.
훈련소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바로 화장실, 식수 통제다.
인간의 기본적인 것들조차통제하다 보니 거기서부터 점점 참 을성이 경험치를 쌓으면서 레벨업이 되었다.
그렇게 말년 병장쯤 되면 거의 만렙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마지막 훈련이라는 버프가 더해지니, 없던 힘도 솟아 났다.
행군이 시작된 지 6시간째.
병사들은 낯선 부대로 향했다.
이곳 부대의 병사 식당에서 라면 취식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군장을 내려놓은 1분대원들은 오와 열을 맞춰 처음 보는 부대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조은석이 먼저 소감을 표했다.
"여기 식당은 좁긴 해도 엄청 깔끔해 보입니다. 인테리어를 새 로 한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러네. 일단 국방색이 안 보인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드네."
백우호의 말 때문에 분대원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군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으로 흰색과 녹색, 그리고 국방색, 이렇게 세 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컵라면을 뜯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자리로 이동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래, 너희도 맛있게 먹어라."
뜨거운 면발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병사들의 몸과 마음을 녹였다.
한창 제설 작업을 하다가 돌아와서 먹는 라면과 거의 같았다.
그야말로 꿀맛이다.
그러나 행군 도중에 먹는 라면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음료까지 전부 마신 기운상은 뒤늦은 걱정을 토로했다.
"괜히 다 먹었나 봅니다. 이러다가 졸 거 같은데."
추위와의 싸움에 이어서 졸음과의 2라운드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한번 들어간 라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혹한기 훈련에 행군까지 하고오다 보니 허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상 황에서 어찌 라면을 남긴단 말인가.
본능에 몸을 맡긴 결과는 국물 한 방울 안 남아 있는 빈 컵라 면 용기다.
먼저 일어선 이강진은 기운상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 기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졸려도 계속 걷기만 하면 언젠가는 부대에 도착해 있을 거 야. 여차하면 야한 상상이라도 하든가."
"하하하……"
정 급하면 정말 이강진의 말대로 해야 한다.
도로나 평지를 걸을 때에는 상관없다.
하지만 산을 오르고 내려갈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예전에 발을 한번 잘못 디딘 탓에 굴러떨어질 뻔한 병사가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신중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 * *
라면 취식을 마치고 다시 군장을 내려놓은 곳으로 돌아오니, 진풍경이 펼쳐졌다.
"야, 강진아, 군장에 눈 쌓인 거 봐라. 니 군장 위에 내 거을 려놓으면 눈사람 아니냐?"
"그러게. 어디 가서 나무 막대기 두 개 가져와 봐라. 양쪽에 꽂 아 보게."
"나무 막대기까지 가져올 필요 있냐? 총 꽂으면 되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농담이었다.
눈 덮인 군장을 털어 내고서 다시 그것을 짊어졌다.
라면 취식 덕분에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행군.
자정을 넘어서 면서부터 잠의 요정이 병사들의 주변에 알짱거 리기 시작했다.
이강진의 입에서도 절로 하품이 새어 나왔다.
'졸려 뒈지겠네.'
여태껏 많은 야간 행군을 경험이 왔었지만, 오늘처럼 졸린 적 은 없었다.
잠을 깨기 위해 이강진은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통증으로 잠의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이강진처럼 잠에서 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예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백우호와 곽분섭이 딱 그런 타입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하는 두 사람. 딱 봐도 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분명 조는 중인데, 아주 잘 걷고 있다. 그야말로 군대 매직이다.
병사들의 행군을 방해하던 눈도 어느새 그쳤다.
하나 모든 시련이 끝난 건 아니었다.
눈은 그쳤지만, 녹은 눈이 영하로 인해 얼어붙어 빙판길을 만 들어 냈다.
그 때문에 가끔 발이 미끄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강진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걸어가던 백우호가 갑자기 외 마디 비명을 질렀다.
"엇……!"
그의 몸이 크게 기우뚱했다. 넘어지기 직전에 이강진이 손을 뻗었다.
"괜찮냐?"
"어…… 고마워. 그나저나 여기, 더럽게 미끄럽네."
이강진의 반응이 좀 더 늦었더라면, 백우호는 분명 엉덩방아 를 크게 찧었을지도 모른다. 꼬리뼈 부상뿐만 아니라 발목, 손 목 등 큰 부상으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강진이 뒤따라오는 후임들에게 외쳤다.
"빙판 조심!"
그러자 바로 뒤에 있던 후임들이 그의 말을 그대로 복명복창 했다.
"빙판 조심!"
"빙판 조심!"
앞에 위험 요소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주의를 준다.
그러면 '앞에 빙판길이 있으니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심어 줄 수 있다.
백우호의 희생 덕분에 빙판의 유무를 판별할 수 있게 된 병사 들.
하나 빙판은 하나둘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미끄러운 빙판길이 이어졌다.
어두워서 그런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럴 때에는 다 방법이 있다.
앞서 걸어간 사람이 어딜 딛고 갔는지 눈으로 봐 둔 다음에 자신도 그대로 그 흔적을 쫓아가면 된다.
이강진은 백우호의 군장을 강하게 툭 치면서 물었다.
"잠 좀 깼지?"
"어, 정신이 확 들더라."
"조심해서 가. 빙판길 잘 보고."
"알았어."
백우호의 발 움직임을 보면서 이강진도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전우애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힘들다 싶으면 이렇게 서 로 협업을 하면 된다.
드디어 산 하나만 넘으면 혹한기 복귀 행군은 끝난다.
문제는 마지막 남은 이 산이 만만치가 않다는 거였다.
"발 조심!"
"앞에 부러진 나뭇가지들 많으니까 천천히 와라!"
"미끄럽습니다! 근처에 붙잡을 만한 거 있으면 그거 붙잡고 올 라오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난리도 아니다.
그래도 병사들은 꿋꿋하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체력으로 따지면 최하위권에 머물렀던 조은석도 마지막 힘을 다해서 산 정상에 올라섰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위험한 게 현실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조은석은 쉬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거 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바로 앞에서 힘들어하는 조은석의 모습을 보던 이강진은 그 의 군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은석아, 나하고 군장 바꾸자."
"잘 못 들었습니 다?"
갑자기 군장을 바꾸자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내 군장 매면 훨씬 나아질 거야. 가라군장이니까."
"아, 아닙니다. 괜히 이강진 병장님 고생시켜 드리고 싶지 않 습니다."
"괜찮아. 난 가라군장으로 충분히 뽕 뽑았으니까. 군장 줘, 얼 르 °조은석은 마지못해 이강진에게 자신의 군장을 넘겼다. 오랜만에 매는 완전군장.
그러나 무겁다, 괴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1시간 뒤면 부대 도착할 테니까.' 이강진 덕분에 숨통이 트이게 된 조은석.
완전군장을 매다가 가라군장으로 바꾸니, 무게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이강진 병장님. 이 은혜는 절대로 안 잊겠습니 곧 전역할 이강진이 후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 이었다.
하나 후임들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전역한 후에도 후임들이 이강진이라는 사람을 끝까지 기억해 주는 것.
그것이 말년병장 이강진의 바람이다.
107S대대 위병소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병사들 입에서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집 왔다!"
"집이다, 집!"
나름 오랫동안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이곳을 집이라고 부 르는 병사들이 있었다.
연병장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는 병사들.
이번에도 낙오 없이 모두가 전부 다 복귀 행군을 완주했다.
대대장은 흐뭇한 미소로 병사들을 바라봤다.
"4박 5일 동안 혹한기 훈련 받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다! 각 중 대장들 인솔하에 막사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한다. 실시!"
"실시!"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병사들은 군장을 내려놓고 샤워할 준비 를 서둘렀다.
추운 날씨에 땀 흘리고, 여기에 눈까지 맞았다. 이 찝찝함을 어서 빨리 온수의 따스함으로 씻어 내고 싶었다.
하나 샤워실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수는 한계가 있다. 1중대 전원이 한꺼번에 샤워실로 들어갈 순 없었기에 순서를 정해야 했다.
순서를 결정짓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분대장들끼리 모여서 가위바위보 한판.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방법 중 하나다.
1분대 대표로 나선 기운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분대장들이 한곳에 손을 모았다.
"가위바위……."
"보!"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분대장은 총 세 명.
운이 좋게도 기운상이 그 세 명 중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 다.
최소 3등은 확보다.
다시 한번 펼쳐진 가위바위보.
결과는…….
"앗싸!"
주먹을 낸 기운상의 승리였다.
생활관으로 뛰어간 기운상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분 대원들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저희가 1등입니다!"
"잘했다, 운상아!"
"역시 분대장님이십니다!"
"가자, 아그들아! 샤워실로 고고고!"
분대원들은 머리 위에 샴푸를 찍 묻히고서 목욕용품들을 들 고 부리나케 샤워실로 뛰어갔다.
팬티 바람으로 복도를 뛰어 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샤워실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온수가 이들을 맞이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몸 구석구석까지 씻은 후에 하나둘씩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이들은 곧장 침 낭을 꺼냈다.
점호는 따로 없다. 취침 준비가 끝난 분과부터 행보관에게 보 고를 마치면 된다.
머리를 말린 기운상은 행보관에게 취침 보고를 하고 오겠다 면서 생활관을 나섰다.
그사이.
노곤해진 이강진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꿈나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렇게 생활관 천장 볼 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월요일에 출발할 말년 휴가를 제외하면 3일 정도밖에 남지 않 았다.
꿈에도 그리던 전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제98화. 마지막 훈련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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