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화. 마지막 훈련 (4) >
제98화. 마지막 훈련 (4)
1중대 소대장이 좋아하는 FM에 따르면, 절대로 받아선 안 된 다.
간식거리라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술은 무조건 안 된다.
애초에 영내에서 음주를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그런 데 훈련 도중에 술이라니,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다.
허인강은 이강진의 눈치를 살폈다.
머릿속으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막걸리와 안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문득 '받았으면 좋겠다.'라 는 약간의 바람이 생겼다.
하나 허인강에겐 선택권이 없다.
이것은 이강진이 결정할 일이다.
고민의 시간은 꽤 길었다.
이강진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보따리 안에 슬쩍 보이는 두부와 볶음김치, 그리고 막걸리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음식 중 하나라 불리는 전까지.
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려운 고민 끝에 결국 이강진은 결단을 내렸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
허인강은 화들짝 놀랐다. 내심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 긴 했었지만, 정말로 이강진이 노인의 정성을 받아들일 줄은 몰 랐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강진, 허인강에게 힘내라면서 다시 도로를 건너 본 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준 뒤에야 허인강은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
"이강진 병장님, 정말로 그거, 저희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럼 왜 받았나?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게 군 생활의 낙 아니겠냐."
"하하하하하……."
공감이 가는 듯하면서도 안 가는 듯한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아무튼 기왕 받았으니, 처리는 해야 할 터.
허인강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지금 바로 먹습니까?"
"아니, 그러면 너무 위험해."
안전하게 먹는 방법이 있다.
"훈련 끝나고 텐트에 가서 먹어야지."
1부소대장은 이번 혹한기 훈련 때에만 통신분과 텐트에 가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통신 쪽이 자리가 많이 남기 때문이었다.
간부가 없는 텐트.
병사들끼리의 비 밀스러운 공간에서 이강진은 고된 하루의 회 포를 분대원들과 같이 풀고 싶었다.
"안줏거리는 어차피 먹어 치우면 그만이고. 막걸리는 한 잔씩 다 마신 다음에 땅 파서 병을 몰래 묻어 두기만 하면 돼. 안 그 럼 냄새날 테니까. 그러면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할 수 있지."
"역시 이강진 병장님이십니다!"
그동안 이강진은 너무 바른 군 생활만 해 왔다.
이제 분대장도 내려놓았고. 전역도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 때 문인지 이강진은 외도를 즐기고 싶어졌다.
'어차피 내 계획대로 되면 절대로 안 들킬 테니까.'
사단장의 기습 방문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무사히 살아남았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군대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의 손바닥 안이니까.
* * *
오전에는 제설. 오후에는 훈련.
이중고를 겪고 돌아온 병사들의 피곤은 평소에 비해 배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서 텐트로 돌 아온 병사들.
제설 작업 때문에 오전 훈련을 못 했던 탓에 남은 시간 동안 더더욱 빡센 훈련이 진행되었다.
그것까지 마치고 나니 몸이 녹초가 되는 건 당연했다.
백우호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절대로 냉수 샤워 안 한다! 안 해!"
그의 말에 기운상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 날씨에 하는 냉수 샤워는 오히려 고통이었다.
드러누운 백우호를 보면서 이강진은 그의 배를 손으로 '탁!'
쳤다.
"저녁 먹었냐?"
"먹었지. 맛 더럽게 없어서 고추참치 꺼내서 먹었다. 너는?"
"나는 이거 먹었지."
군장과 의류대가 쌓여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은 이강진.
휘적이던 그의 손에 커다란 무언가가 들려 나왔다.
파란색 보따리 덩어리였다.
"뭐냐, 그건?"
보급품이라고 보기는 힘든 물건이었다.
"이게 뭐냐면 말이다……. 아, 그 전에 분섭아, 텐트 입구 닫아 라.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체 뭐기에 이러는 걸까?
어느새 분대원들의 관심이 보따리에게 집중되었다.
이강진이 입으로 자체 효과음을 냈다.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바람씨"
보따리 안에 고이 감춰져 있던 내용물들을 확인한 순간. 병사들은 기겁을 했다.
"이, 이강진 병장님! 그, 그거! 막걸……."
"쉬 잇!"
후임들을 조용히 시키는 이강진.
"괜히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간 큰일이 니까 일단 조용히 해라."
"……죄송합니다."
"근데 그거,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는 근처 동네 슈퍼에서 몰래 들러서 사 올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안줏거리는 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들이었다. 이건 슈퍼에서 파는 것들이 아니다.
이강진이 직접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로 했다.
"아까 낮에 우리가 눈 치워 줬던 어르신, 기억하지?"
"예."
"도로 너머에 있던 그 집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기. 내가 인강이하고 같이 경계 근무 서고 있는데, 그 어르신이 오셔서 낮에 우리 고생했다고 몰래 챙겨 주셨더라고. 안 받을까 하다가, 그냥 받아 왔어. 어차피 간부님이 텐트 안으 로 들어올 일도 없을 테고."
놓치기 아까운 기회라고 생각했다.
말년에 혹한기 훈련 받는 것도 억울한데, 이런 거라도 위로 삼 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운상은 불안했다.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운상아, 나 믿어라. 안 들켜."
군 생활만 4년째다. 웬만한 부사관보다도 더 오랫동안 군대에 몸을 담았던 이강진이었기에 안 들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들킬 거 같다 싶어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독박 쓸 테 니까."
그만큼 안 들킬 자신이 있었다.
이강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없던 믿음마저 샘솟을 정도였
"운상이가 취침 준비 다 끝났다고 보고하고 오면, 그때 파티 시작하자."
"예, 알겠습니다!"
혹한기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파티의 기대감으로 인해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술과 맛있는 안주, 그리고 분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어두운 환경에 눈치를 보면서,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마셔야 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행복했다.
훈련 도중에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겠나?
종이컵에 담은 막걸리 한 잔을 그대로 원샷한 분대원들. 입맛을 다시던 백우호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어르신, 막걸리 좀 많이 넣어 주시지. 입이 몇인데……."
고작해야 두 병밖에 없었다.
이강진은 그런 백우호를 향해서 쓴소리를 뱉었다.
"인마, 주신 것만으로도 어디야."
"그래도 아쉽잖아. 두세 잔 마시니까 금방 없어지네."
"나중에 전역하면 내가 원 없이 사줄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 려."
"그때 먹는 막걸리 맛하고 지금 먹는 막걸리 맛하고 똑같냐. 이렇게 몰래 마시는 술이 더 맛있지, 크큭!"
그 말도 맞다.
몰래 마시니까 더 맛있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분대원들의 기분이 전체적으 로 업되었다.
그 와중에 이강진이 조은석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은석아, 나중에 너, 전역하고 나서 태강이가 훈련 도중에 우 리하고 같이 술 몰래 마셨다는 거 기사로 내보내면 안 된다."
"하하하! 이강진 병장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공범이지 않습니까. 오늘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 보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땡 큐."
입이 많다 보니 노인이 줬던 막걸리와 안주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기운상이 후임들에게 각자 자리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슬슬 자자. 이강진 병장님하고 백우호 병장님도 오늘 근무 없 으시니 일찍 주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내일 또 아침부터 훈련받으시려면 고생이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우호야, 우리도 자자."
"잠깐만. 나, 오줌 좀 싸고 올게."
술이 들어가면 이뇨 작용이 활발해지는 타입이 있다. 백우호 가 딱 그런 체질이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강진은 먼저 자리에 누웠다.
'나가면 막걸리에 해물파전 하나 해서 먹어야겠네.'
오늘 못다 한 한을 나가서 풀고 싶었다.
그동안 휴가를 너무 자주 나가다 보니 군대에 있을 때에도 나 중에 휴가 나가면 이건 꼭 먹고 싶다는 생각이 거의 안 들었다.
마치 이등병 시절 때 신병위로휴가를 나가서 첫째 날에는 뭘 먹고 둘째 날에는 무엇을 먹을지 상상하면서 계획을 짜던 그때 그기분 같았다.
이런 기분, 상당히 오랜만이다.
'이러다가 술 마시는 꿈꾸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면서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텐트 입구가 활짝 열렸다.
백우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성태강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백우호 병장님?화장실에 사람 꽉 찼습니까?"
"아니, 화장실까진 귀찮아서 안 갔어. 큰 거도 아니고 작은 거 라서 그냥 근처에서 해결하고 왔는데…… 오다가 레토나 한 대가 여기 임시 진지로 들어오던데, 뭐지?"
신경 쓰이는 백우호의 말.
이강진은 확인 차원에서 백우호에게 되레 질문했다.
"제대로 본 거 맞아? 레토나였어?"
"어, 틀림없다니까."
"우리 부대 거?"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운상아, 혹시 분대장 집합 때 뭐 들은 거 없어?"
누워 있던 기운상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없었습니다. 대대장님이 잠깐 다른 곳에 갔다가 복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런가?"
어두워서 레토나 번호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별일 아니겠거니.
그렇게 생각한 백우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꾸벅꾸벅 졸고 있던 대대장의 텐트에 작전과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대대장님, 대대장님!"
"……뭐야."
게슴츠레 눈을 뜬 대대장.
작전과장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일어나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대대장님!"
"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간부들이 두려워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훈련 도중에 터지는 사건 사고다.
그래서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누차 안전을 강조하는 거였다.
작전과장이 가져온 건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다.
"사고가 일어난 건 아닙니다만……."사건 사고는 아니 라는 것. 이건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나쁜 소식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연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이불을 박차고 화들짝 잠자리에서 일어난 대대장.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연대장님이 갑자기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연대장님이 방금 레토나 타 고 이쪽으로 오셨다는 말만 전해 듣고 대대장님께 알려 드리기 위해서 황급히 왔습니다."
"이 런..
빠르게 전투복을 챙겨 입은 대대장은 작전과장과 함께 연대 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추, 충성!"
"충성. 자고 있었구만. 괜히 깨운 거 같아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보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연대장의 방문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야밤에 왜 이곳까지 직접 왔을까?
심지어 군복을 갖추고, 레토나까지 타고 왔다.
여기서부터 대대장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연대장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대대장이 여태껏 봐 왔던 연대장의 미소 중에서 지금이 유독 사악하게 보였다.
"왜 왔긴, 상황 걸려고 왔지."
최악의 방문 사유였다.
< 제98화. 마지막 훈련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