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화. 마지막 훈련 (3) >
제98화. 마지막 훈련 (3)
지옥 같았던 냉수 샤워를 마치고 다시 텐트로 돌아온 1분대 원들.
자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태강이 다른 분대원들에게 물었다.
"여기는 저번처럼 폐가 없지 말입니다?"
지난번 훈련 당시, 폐가 때문에 1075대대는 난리도 아니었다.
겁이 없기로 유명한 곽분섭이 텐트 뒤를 샅샅이 살폈다.
"예. 폐가는 없고, 대신에 길 건너편에 민가들이 있습니다. 불이 다 들어와 있는 걸 보니, 사람은 살고 있는 집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저번 같은 소동은 안 일어나겠네."
조은석과 허인강은 성태강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자 줄신답게 호기심이 왕성한 조은석이 결국 참다못해 성 태강이 말하는 '소동'의 정체를 물었다.
"성태강 상병님. '저번 같은 소동'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말이지
도중에 기운상이 다시 텐트로 복귀하면서 본의 아니게 성태 강의 말을 끊었다.
"취침 보고 끝났으니까 바로 주무셔도 됩니다."
성 태강은 조은석 에게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하고서 자리에 누 웠다.
궁금증이 커져 갔지만, 그렇다고 이제 자라고 하는 기운상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반면, 이강진은 다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서 텐트를 나섰다.
곽분섭이 그런 이강진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강진 병장님, 근무 나가십니까?"
"어, 인강이하고 같이 근무더라. 가자, 인강아."
"이 병 허 인강. 예, 알겠습니다!"
야간 근무 중에서 초번초가 가장 좋다.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잠을 잘 수 있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복장을 갖춰 입은 채 CP텐트로 향하는 이강진과 허인강.
도중에 이강진은 몸이 굳어 버렸다.
난로를 쬐고 있는 행보관 때문이었다.
이강진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행보관에게 거수경례 를 했다.
"충성. 병장 이강진 외 1 명. 근무 투입하겠습니다."
"네가 초번초냐?"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만. 인원 체크, 온도 체크 똑바로 하고. 다 끝나면 고구 마 쪄 놓았으니까 와서 하나씩 까서 먹어라."
고구마라는 소리에 허인강이 먼저 반응했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뭐 ??런 걸로. 그리고 이강진."
"병장 이강진."
행보관의 한쪽 입꼬???슬쩍 위로 올라갔다.
"너, 나한테 한 번 빚진 거다."
"하, 하하하… …."
어색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 * *
혹한기 2일 차 아침.
병사들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전날에 9시간에 가까운 행군을 한 데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 면서 잠을 잤으니, 피곤하지 않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아침점호는 중대장이 직접 실시했다.
"간밤에 다들 ??잤나?"
"예!"
"환자는 거수하도록."
이강진과 백우호, 김철 셋이 나란히 손을 들었다. 그러나 중 대장의 반응은 매정했다.
"아무도 없나 보군."
이들이 꾀병을 부리고 싶어 한?募?걸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전체 뒤로 돌앗!"
1중대 전체가 중대장의 신호에 맞춰 몸을 돌렸다.
서리가 내려앉은 넓은 공터, 그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산 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장관이다.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병사들의 외침이 계속되었다.
애국가 제창, 우리의 결의 등??마친 뒤.
"전체 상의 탈의한다. 실시!"
"실시!"
이번에도 예외 없이 아침 구보가 시작되었다.
임시 진지 주변을 뛰고 다시 텐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땀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아침점호가 끝난 후에 곧장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비 닐봉지를 씌운 식판 위에 밥과 국, 반찬을 받고서 자리를 잡 은 병사들.
아침 ?캑騈?보자마자 백우호는 혀를 찼다.
"강진아, 건브레이크라도 먹을까?"
"그러자."
어??행군 도중에 보급으로 받은 건빵과 오늘 아침에 부식으 로 나온 우유를 이용해 건브레이크를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는 두 말년들.
하도 많이 만들어 봐서 그런 걸까. 몇 분 만에 금세 먹음직스러운 건브레이크가 완성되었다.
후르릅!
가루가 된 별사탕이 우유에 적절하게 스며들어 입안을 단맛 으로 물들였다. 여기에 부숴 놓은 건빵이 식감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다.
텐트 안에서 남들 몰래 건브레이크로 아침을 해결한 뒤에 다 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두 사람은 부소대장과 딱 마주쳤다.
부소대장은 이강진과 백우호의 손에 들린 건빵 봉지를 보면 서 피식 웃었다.
"아침 안 먹고 건브레이크 만들어서 먹었냐?"
멋쩍은 미소를 짓는 둘.
부소대장은 그들에게 몰래 귀띔했다.
"먹는 건 좋은데, 중대장님하고 소대장님한테는 걸리지 마라."
"어차피 다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도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먹어야 훈련을 버틸 수 있다.
부소대장이 충고한 대로 이강진은 속이 빈 건빵 봉지와 우유 갑을 간부들 몰래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병사들은 다시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발랐다.
단독군장을 갖추고서 총기를 수령하려고 할 때였다.
"앗, 차가!"
이강진의 바로 앞에서 줄을 선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곽분 섭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왼쪽 볼에 갑자기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으로 만져 보니, 작은 물기가 묻어 나왔다.
곧장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강진 병장님, 올 게 왔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이강진의 눈에도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악마의 똥가루가.
* * *
이제는 눈이 오는 게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혹한기 훈련 일자에 눈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도 있었기 때문 에 눈에 와도 병사들은 그저 '오는구나.'라고 무덤덤하게 반응했 다.
방금 막 받은 좋은 다시 총기거치대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총 대신 이들이 손에 쥐어야 할 건 제설 도구였다.
소대장이 병사들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각 분대장들 인솔하에 제설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실시!"
눈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
1분대는 텐트 뒤쪽을 맡기로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30분도 채 안 됐건만, 벌써부터 바닥 이 흰색으로 물들었다.
눈발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가 안 될 정 도였다.
다행스럽게도 2시간 정도 지나니까 눈은 완전히 그쳤다.
하나 그 시간 동안 내린 눈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쌓인 눈 때문에 발목이 묻힐 정도였다.
눈삽을 든 이강진이 앞장을 섰다.
푹!
눈을 크게 퍼 올렸다.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전진, 또 전진했다.
순식간에 도로변까지 도달했다.
"운상아!"
이강진이 기운상을 불렀다.
"여기 도로까지만 치우면 돼?"
"아, 도로는 괜찮다고 합니다. 어차피 제설차가 와서 다 치울 거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대충 다 치운 거 같으니까, 이만 철 수할까?"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가면서 빗자루로 바닥에 남은 눈들만 대충 치우면 된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도로 너머에 서 있던 노인이 이강진과 분대원들을 불렀다.
"거기 젊은이들! 미안한데, 와서 나 좀 도와줄 수 있나?"
"무슨 일인데요, 어르신?"
못 본 척할 수도 없었기에 이강진이 먼저 나서서 상황을 살폈 다.
이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앞마당 쪽에 쌓인 눈만 치워 드리면 되나요?"
"그렇지, 그렇지! 이 늙은이가 힘이 없어서 그래. 부탁 좀 합 세!"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강진은 분대원들과 함께 후딱 노인의 집 주변에 쌓인 눈들을 치우기로 했다.
장정들이 한꺼번에 덤벼드니, 금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노인은 병사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들려줬다.
"내가 나중에 꼭 보답하겠네!"
"아닙니다, 어르신. 그럼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혀서 가!"
도로를 넘어서 다시 임시 진지로 돌아온 이강진과 분대원들. 이들이 복귀한 찰나에 제설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오후 3시 반이 되어서야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강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 덕분에 훈련 땡땡이친 건좋네.'
주말, 혹은 개인 정비 시간에 내리는 눈은 혐오스러움 덩어리 지만, 이럴 때 내리는 눈은 나름 괜찮다.
* * *
도로변에 있는 호에 들어가 경계 자세를 취하던 이강진은 쏟 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버텨 냈다.
지금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자고 싶 었다.
하나 그랬다가 대대장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바로 군기교육대 로 끌려갈 것이다.
"인강아, 졸린데 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없어?"
선임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없었다.
허인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강진.
'그럴 줄 알았다.'
이미 허인강은 졸음과의 싸움에서 GG 선언을 하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잠에 빠져든 허인강을 보면서 이 강진은 발을 움직였다.
오른발 끝으로 허인강의 왼쪽 발을 툭툭 건드렸다.
그제야 허인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 병 허인강!"
"야, 허인강, 훈련 시간에 조냐?"
"죄, 죄송합니다!"
후임의 근무 태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졸리고 피곤한 거 나도 다 아는데, 그러다가 간부님한테 들 키면 어쩌려고 그러냐. 좋게 말하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니까, 이 후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라. 알겠냐."
"예, 알겠습니 다!"
상병 이강진이었더라면 훈련 끝나고 바로 집합을 걸었을 것 이다. 하나 말년 병장 이강진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은 눈감아 줄 수 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같 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이강진은 오랜만에 상병 시절 군기반장 이었던 자신을 강림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허인강은 더 이상 조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강진 병장님!"
허인강이 이강진을 다급하게 불렀다.
"왜, 대항군이라도 나타났어?"
"대항군은 아니지만, 거수자가 오고 있긴 합니다."
"누군데? 민간인?"
"예, 아까 저희가 눈 치워 줬던 그 할아버지입니다."
이강진은 허인강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인강이 말한 대로였다.
"저분, 우리한테 오는 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강진과 허인강을 부르기까지 했다.
"젊은이들!"
"무슨 일이십니까?"
또 눈 치워 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때는 정중하게 거절할 생 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지키는 게 군인의 임무라 할지라도, 훈련을 내팽개치면서까지 눈을 대신 치워 줄 순 없기 때문이었다.
이강진과 허인강이 지키고 있는 호까지 다가온 노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
"훈련 중인감?"
"예, 그보다 다치실 수도 있으니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어 르신."
훈련을 진행하는데 민간인이 부상을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문제가 되기 전에 이강진은 미리 노인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아까 말했잖여, 꼭 보답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고 온 보따리 하나를 이강진에게 내 밀었다.
"이거 받어."
"이게 뭡니까?"
노인이 씨익 웃으면서 이강진에게 작게 속삭였다.
"막걸리하고 안주 조금 담았어. 훈련 끝나면 입이 많이 심심 할 테니까 가서 먹어."
갑작스러운 술과 안주의 유혹.
이것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거절할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이강진은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 제98화. 마지막 훈련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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