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화. 마지막 훈련 (1) >
제98화. 마지막 훈련 (1)
진지를 점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대대장이 이곳을 찾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보통 대대장이 순찰을 도는 코스는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행정반에 들른 다음에 탄약고 초소, 그리고 목진지들을 하나 둘씩 점검한다.
그런데 대대장이 지금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는 소리는…….
'다른 곳은 안 들르고 여기에 바로 왔다는 뜻인가.'
대대장이 변수를 둔 것이다.
한편, 갑작스러운 대대장의 등장에 허인강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01, 이강진 병장님! 대대장님이십니다!"
"알고 있어, 인마. 너, 오늘 암구호 뭔지 알아?"
"이 병 허인강! 오늘의 암구호를 말씀드리겠습……."
"그딴 건 생략하고 그냥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한시가 급한데 얌전히 기다려 줄 여유 따윈 없었다. 허인강은 그제야 이강진이 원하는 대답을 꺼 냈다.
"문어에 우산, 답어에 물고기입니다."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오케이, 알았어."
말년쯤 되다 보니 이강진은 암구호를 외우고 다니는 것도 귀 찮아졌다. 그래서 허인강에게 물어본 것이다.
잠시 뒤에 대대장이 참모진과 함께 이들 앞에 섰다.
"강진이 자네, 여기서 나하고 많이 마주쳤던 거 같은데."
"병장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지긋지긋한 인연이다.
하나 대대장은 이강진을 자주 보는 게 좀은 모양인지 허허 하 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누구도 예상 못한 말을 꺼냈다.
"강진이가 있으면 여긴 뭐 털고 싶어도 못 털겠군. 중대장, 다른 곳으로 가지."
여태껏 이강진은 대대장에게 단 한 번도 털렸던 적이 없었다.
한때는 대대장이 일부러 작정하고 이강진을 털려고 했던 적 도 있었다. 그러나 이강진이 그런 수법에 당할 리가 없었다.
이강진은 대대장에게 있어서 절대로 뜷리지 않는 방패 같은 존재였다.
별의별 것을 다 물어봐도 이강진은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그렇다 보니 대대장은 이제 아예 상대가 이강진이라면 지금 처럼 먼저 백기를 드는 수준에 다다르게 되었다.
사실 대대장은 오늘, 무조건 꼬투리 하나 잡아서 1중대를 털 겠다는 각오로 일부러 평소 고집하던 순찰 순서도 무시하고 이 곳으로 바로 왔었다.
그래서 이강진이 예상 못 한 타이밍에 대대장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이곳에서 마주칠 상대가 이강진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리는 대대장 일행.
중대장은 이강진과 허인강에게 엄지를 척 세웠다.
한편, 허인강은 대대장을 그냥 돌려보낸 이강진의 위엄에 감 동한 모양인지 눈을 반짝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강진 병장님!"
"뭐…… 이 정도야……."특별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이러니까 오히려 이강진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 * *
준비 태세가 끝난 후, 이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병사 식당으 로 향했다.
혹한기 훈련 도중에 병사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지 금이 마지막이다.
나머지는 죄다 야외 식사를 진행해야 한다.
취사병들도 바쁘게 준비해서 그런지 평소에도 맛없던 밥이 오 늘따라 유독 더 맛이 없었다.
메뉴도 최악이 었다.
백우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참치하고 고추장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
후회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도 남은 훈련을 위해서 맛없는 짬밥이라도 억지로 입 안 으로 쑤셔 넣었다.
먹어야 힘이 나지 않겠나. 맛없다고 이마저도 안 먹고 빈속으 로 하루를 버틸 수는 없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혹한기 행군을 시작해야 한다. 미리 에너 지를 채워 두는 편이 좋아 보였다.
식사를 마친 뒤에 1시간 정도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뒤에 병사들은 어젯밤에 미리 꾸려 뒀던 완전군장을 짊 어지고서 사열대로 향했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가라군장이었기 때문에 한결 가벼운 느낌 이었다.
두 사람 다 입대한 이후 처음으로 가라군장을 해 보는 거였백우호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와…… 이런 느낌이었구나! 야, 이 정도면 24시간도 행군할 수 있겠다!"
"그건 오버고."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너무 갔다고 일침을 날렸다. 아닌 건 0^닌 거다.
그리고 아직 백우호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무리 가라군장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완전군장처럼 똑같이 무겁게 느껴진다.
군장을 메고서 사열대로 집합한 병력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중대장 또한 군장을 메고서 이들 앞에 등장했다.
"오와 열 맞추고 대대 연병장으로 향한다. 실시!"
"실시!"
대대 연병장에는 이미 본부중대가 와 있었다.
1중대를 시작으로 2중대, 마지막으로 3중대까지.
모든 중대원들이 줄을 맞추고서 대대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대대장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대~ 차렷!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훈련 초반이어서 그런 걸까, 아직까지 병사들의 목소리는 팔 팔했다.
대대장은 다시 한번 병사들에게 겁을 줬다.
"이 번에 사단장님 오신다는 거, 다들 알고 있을 거다. 사단장 님 앞에서 절대로 추한 모습 보이지 않도록 한다. 군인답게 패 기 넘치는 태도로 훈련에 임해야 사단장님도 우리 1075대대 병사들이 이번 혹한기 훈련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하실 거다. 항상 긴장하도록. 알겠나!"
"예!"
이강진은 대대장의 말에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뻔한 거짓말이다.
병사들은 정말로 사단장이 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속사정을 아는 1분대원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보였다.
이것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다.
* * *
행군의 첫 시작은 본부중대부터 였다.
그다음으로 1중대, 2중대, 3중대가 뒤를 따랐다.
"1중대, 파이 팅!"
"파이팅!"
"낙오 없이 반드시 완주하자!"
각오가 대단했다.
결의가 넘치는 병사들.
행군을 막 시작할 때에는 다들 이런 식으로 기운이 넘친다.
겨울이라 그런지 날씨는 줍고. 땅도 얼어서 미끌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눈은 안 오네.'
하늘을 바라본 이강진. 병사들의 머리 위에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게다가 군장도 가라군장이다 보니 이강진은 여태껏 겪어 온 행군 훈련 중에서 이번이 행군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복귀 행군 때에도 가라군장으로 가야겠네.'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전역 전까지 이강진은 말년 병장으로서의 특권을 원 없이 누 리다가 갈 생각이었다.
* * *
행군 4시간째.
파이팅이 넘치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좀비화가 되어 가기 시 작했다.
앞서 걷던 백우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가라군장인데 왜 무겁지? 내가 다른 군장을 가져왔나?"
이강진의 예상대로였다.
가라군장이든 완전군장이든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진다.
이강진도 초반에 비해서 지금은 군장이 상대적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다섯 번째 쉬는 구간에 돌입하게 된 1075대대.
딱 중간 지점이어서 그런지 쉬는 시간 또한 넉넉했다.
그때 이강진은 발을 말리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수통을 꺼내고서 안에 담긴 물로 목을 축였다.
이강진보다도 나이가 많은 수통이어서 그런지 물맛이 아주 참 진했다.
'압록강 물맛도 아니고…… 이거 참.'
여태껏 배탈이 안 났던 것이 용할 정도였다.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SOS를 요 청했다.
"강진아…… 나도 물 좀……."
"수통에 물 안 채워서 왔냐?"
"채웠지. 채웠는데 무게 줄인답시고 물을 너무 적게 받아 온 거 같아. 두세 모금 마시니까 금방 동나더라."
"어휴, 멍청한 녀석."
무게도 적당히 줄여야지, 자신이 마실 물의 양을 조절 못 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이강진은 마시던 수통을 백우호에게 건네줬다.
이강진은 행군할 때마다 항상 물이 남았다. 백우호한테 물을 나눠 줘도 이강진이 마시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벌컥벌컥!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백우호. 그 뒤로 1중대 간부들이 황급 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간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사고라도 터진 줄 알았다.
사고. 어찌 보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대장 집합을 끝내고 돌아온 기운상의 얼굴도 방금 이강진 이 본 간부들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 이강진 병장님! 크, 큰일났습니다!"
"왜, 누가 다쳤어?"
"그거보다 더 큰일입니다!"
기운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소식을 들어 버린 것 같은 반응이었다.
"사단장님이 진짜로 오고 계시답니다!"
옆에서 물을 마시던 백우호가 '푸웁!' 하고 입에 머금던 물을 분수처럼 뱉어 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사단장이 온다는 말은 대대장이 꾸며낸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거짓이 현실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했다.
이 때문에 간부들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지, 지금 사단장님 오신다니까, 다들 복장 똑바로 하고 있어라! 빨리!"
"알겠습니다!"
덩달아 병사들도 바빠졌다.
백우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이강진에게 물었다.
"가가가가가가강진아! 우, 우리, 괜찮은 거지?"
이강진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긴 했다. 사단장이 와서 잠깐 얼굴만 비치 고 다시 갈 수도 있다. 그러면 군장 검사도 생략할 것이다.
'그래,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어!'
설 령 군장 검사를 하더라도 이 많은 병사들 중에서 이강진, 백 우호 둘을 딱 지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 면 오히 려 사단장의 눈에 띄기 십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대범하게!
"아무 일 없는 척 행동해. 수상한 거동 보이는 즉시 사단장님 이 우리보고 군장 까 보라고 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 그래!"
침을 꿀꺽 삼킨 백우호는 일단 이강진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잠시 뒤.
정말로 사단장이 탄 차량이 1075대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 다.
"충! 성!"
대대장과 참모진의 우렁찬 거수경례 구호 소리가 이곳 공터 에 울려 퍼졌다.
사단장은 이들을 보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네."
"아, 아닙니다! 그보다 사단장님께선 어쩌다가 이곳에……."
"근처 부대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마침 자네 부대가 행군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왕 온 김에 행군 잘하나 볼 겸해 서 왔지."
병사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사단장.
"온 김에 간만에 병사들 군장 검사나 해 볼까?"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고 사단장에게 군장 검사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호흡을 한 대대장은 생각을 달리 먹기로 했다.
혹한기 훈련 시작하기 전에 대대장은 병사들에게 사단장님이 을지도 모르니 준비 단단히 하라고 압박을 가했었다.
사단장님이 오신다는데 가라군장을 꾸리고 왔을 간 큰 병사 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 간 큰 병사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을 거라곤 대대장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병사들을 쭉 훑어보던 사단장.
그가 갑자기 어느 한 무리를 지목했다.
"저쪽 병사들을 데리고 와 보게."
그의 선택은 바로…….
1중대 1분대원들이었다.
< 제98화. 마지막 훈련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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