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5화. 스키장에서 생긴 일 (2) >
제95화. 스키장에서 생긴 일 (2)
장비를 착용하고서 스키장으로 향하는 이강진과 한지윤.
눈밭을 보자, 이강진은 엊그제부터 겪었던 눈에 관련된 악몽 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눈 때문에 휴가도 못 나올 뻔했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눈 덕분에 이렇게 한지윤과 스키장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걸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는 걸까.
이강진은 한지윤 몰래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 한지윤은 어색한 걸음걸이를 보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딱 보자마자 이강진은 바로 감을 잡았다.
"지윤 씨, 스키 처음이신가요?"
"아…… 처음은 아니에요."
한지윤은 수줍게 웃었다.
이전에 한번 왔었던 그녀였지만, 스키에 소질이 없는 모양인 지 배워도 실력이 그대로였다.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할 때 스키 타는 장면이 있으면 곤란할 거 같아서 미리 배워 둘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좀 처럼 잘 안 되네요. 강진 씨, 괜찮으시다면 저한테 스키 타는 법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여러 아르바이트 경험을 겸비한 이강진.
스키장에서도 3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알바가 끝난 뒤에 이강진은 같이 일했던 형들과 함께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즐겨 탔었다.
실력이 프로 수준으로 엄청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한지윤처럼 스키를 막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 고 가르쳐 줄 만한 급은 된다.
"스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전 경 자세로 무게 중심을 앞쪽에 두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속도 를 제어할 수 있거든요. 무게 중심이 뒤에 있으면 속도도, 방향 도 통제할 수 없으니까 잘 기억해 두세요."
"네!"
한지윤이 따라 할 수 있도록 이강진은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 고 상냥하게 설명을 들려줬다.
만약 지금 이곳이 군대였다면, 그리고 가르치는 상대가 후임 이었더라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외울 거 있으면 그냥 툭 던지고 언제까지 외우라고 말만 했을 터.
그렇다고 한지윤에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다.
군대와 사회는 엄연히 다르니까.
* * *
연습이 끝나고 드디어 실전이다.
리프트를 타고 초급 코스에 도착한 두 사람.
이강진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완벽하게 S 자를 그리면서 내려가는 이강진의 모습에 한지윤 은 박수를 보냈다.
"대단해요, 강진 씨!"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까 제가 알려 준 대로만 하면, 지윤 씨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럴까요?"
"네, 자신감을 가지세요."
이강진의 응원 덕분에 용기를 얻었는지 한지윤은 드디어 첫 걸음마를 뗐다.
조금만 움직여도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갈 것만 같은 미끄러 움. 그것이 한지윤을 덜컥 겁먹게 만들었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한지윤에게 다가간 이강진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제 손 잡으세요, 지윤 씨."
"고, 고마워요."
이강진이 내민 양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던 찰나에 미끄러운 바닥 탓에 순간적으로 무게 중심을 다시 잃어버렸다.
그녀가 넘어지기 전에 이강진이 먼저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한지윤의 허리를 감쌌다. 그 상태로 자신의 몸 안 쪽으로 그녀를 당겼다.
두꺼운 스키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지윤의 가느다란 허리가 오른팔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한지윤과 알고 지내는 동안, 서로 이렇게까지 가깝게 붙어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의 이강진에게 안기다시피 하게 된 한지윤은 얼굴을 붉혔 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흠! 괜찮나요, 지윤 씨?"
"네? 아, 전 괜찮아요. 강진 씨는요?"
"저도…… 일단은 괜찮습니다."
몸은 멀쩡하지만, 심장이 너무 두근대서 그런지 아플 지경이 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하지만 마음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밭을 헤치고 휴가를 나오길 잘했어!'
당시에는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과거의 자 신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스키장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마친 두 사람은 슬슬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해가 저물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제시간에 한지윤을 무사히 집으로 바래다줄 수 있다.
욕심 같으면 여기서 그냥 하루 머물다가 가자고 말을 하고 싶 었다. 그러나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같이 외박을 하자고 말을 꺼내는 건 오히려 한지윤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신중하게, 그리고 차근차근 한지윤과의 거리를 좁혀 가면 된 다.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전역하고 나면 만날 기히가 더 많아질 테니까 :그때 단숨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생각이다. 그리고 서 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싶을 때.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다.
스키 장비를 반납한 뒤에 밖에 먼저 나와서 한지윤을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가 이강진에게 다가왔다.
"강진 씨!"
정태성. 그가 이강진을 조용히 찾았다.
"어땠습니까? 재미있게 잘 즐기셨나요?"
"예,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기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 이벤트만 남았네요."
"네?"
이벤트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순간 정태성이 뒤에 숨겨 온 물건들을 건넸다.
꽃다발과 작은 케이크였다.
"직원들도 지금 대기 중입니다. 강진 씨가 신호 보내면, 저희 가 거기에 맞춰서 '짜잔!' 하고 등장하겠습니다. 그때 지윤 씨한 테 '고백'하시면 됩 니다."
"……?"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고백요? 제가요?"
"네! 두석이한테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지윤 씨한테 고백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한테 강진 씨가 고백할 수 있도록 열심히 서포트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분위기 살려 드릴 테 니, 강진 씨는 진심을 다해서 고백만 하시면 됩니다. 아, 그 전에 지윤 씨한테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달라고 해 주세요. 직원들은 강진 씨가 누구한테 고백하는지 모르거든요. 저만 알고 있습니다."
가도 너무 멀리 가 버렸다.
애초에 이강진은 그냥 한지윤과 같이 스키 타러 온 것뿐이다. 고백이야 하긴 할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원흉은 따로 있었다.
'나두석, 이 녀석! 괜한 참견을……."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통화를 하면서 나두석은 이강진에게 계속 고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그러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태성 씨,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전 아직 지윤 씨 한테 고백할 생각이 없습니다."
"네? 두석이가 분명 그랬는데……."
"걔가 이상한 오해를 한 거 같아요. 굳이 직원들까지 불러서 이벤트 열 필요 없으니까, 다시 해산시켜 주세요."
"이런……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분위기 망칠 뻔 했군요."
"아닙니다. 이것도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아, 잠시만 요."꽃다발과 케이크 중에서 이강진은 케이크만 다시 그에게 되 돌려줬다.
"이 꽂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지윤 씨가 좋아할 거 같아서 요."
"네, 물론이죠!"
나두석의 오해 때문에 정태성이 기껏 준비한 것들을 모조리 다 물거품으로 만들기도 미안했다.
그래서 이강진은 최소한의 정성만 받기로 결심했다.
정태성이 떠난 뒤에 한지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이강진은 한지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
"가시죠, 지윤 씨."
이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강진이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한지윤은 보조석 문을 열었 다.
그러자 한지윤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어머!"
보조석 위에 아름다운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꽃다발의 등장에 한지윤은 놀랍기도 하고 동시 에 궁금했다.
"이거, 어디서 구해 오신 거예요?"
"여행 출발할 때 꽂집이 보이길래 몰래 사 뒀습니다. 지윤 씨 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와…… 고마워요, 강진 씨.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값비싼 선물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소소하게 정성을 드러 내는 행동이 여심을 감동시킬 때가 있다.
이강진은 예전에 오호만과 나두석에게 이런 스킬들을 전수받았었다.
'나중에 두 사람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 줘야겠네.'
유부남들의 충언 덕분에 한지윤과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한지윤을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서 이강진은 휴가를 나오면 꼭 들르게 되는 시내까지 오게 되었다.
이틀 전에 봤던 그 많은 눈들은 그새 다 녹아 없어졌다.
한지윤이 사는 아파트 앞에 잠깐 정차했다.
이강진이 선물로 준 꽂다발을 챙겨 든 한지윤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 즐거웠어요. 내려가실 때 운전 조심하시고요. 졸리다 싶 으면 휴게소 꼭 들러서 자고 가세요. 제 로드매니저 오빠도 운 전을 많이 하니까 졸리다고 할 때마다 제가 쉬었다가 가라고 늘 말하거든요."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 제일이다. 이것은 군대나 사회나 똑같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또 봐요!"
한지윤이 집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이강 진은 다시 차에 오를 수 있었다.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휴게소 보이 면 바로 들어가야겠네.'
첫 번째 휴게소에 가서 잠을 좀 청한 뒤에 다시 운전대를 잡 기로 했다.
톨게이트를 막 통과할 무렵.
나두석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형님?
"야, 나두석."
안 그래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지윤 씨한테 고백하려고 스키장에 간 거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태성 씨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어서 괜히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아,형님, 고백이 별거 있습니까? 분위기 올라왔다 싶으면 바로 찔러보셨어야죠. 고백이라는 건 계획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충동적으로 하는 겁니다. 필링(Feeling)이라구요.
"필링 같은 소리 하네. 아무튼 남의 연애에 너무 관여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 테 니까."
나두석은 다 좋은데 때로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문제는 서로에 대해서 알아 갈 시간이 부족했기에 발생하 는 것이다.
이강진은 나두석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나두석은 이강진에 대해 아직 많은 것들을 모른다.
그래서 이강진은 아닌 건 아닌 거라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주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형 님.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알면 됐어. 그리고…… 고맙다. 네 덕분에 지윤 씨랑 재미있게 잘 놀 수 있었어."
-헤헤, 아닙니다.
주눅 들었던 나두석의 태도가 이강진의 칭찬 한마디에 금세 회복되었다.
통화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예정대로 첫 번째로 보이는 휴게 소로 향했다.
늦은 저녁때라 그런지 차가 많지 않았다.
정차시켜 놓고 좌석을 뒤로 젖혔다.
그러나 막상 자려고 하니 잠이 안 온다.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실까."
차에서 내린 후에 카페를 찾았다.
"저기 있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다.
카페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강진.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음? 혹시 자네, 강진이 아닌가?"
누군가가 이강진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이강진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원라원의 아버지, 원도문.
설마 이곳에서 원도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 제95화. 스키장에서 생긴 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