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1) >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1)
박령우와 휴가일을 바꾼 덕분에 이강진은 당장 휴가를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못 쓰는 거 아닌가 걱정했던 잔여 포상 휴가들도 이번 휴가에 싹 다 붙여서 총 9박 10일의 휴가를 나가기로 했다.
휴가를 나가기 전에 그가 항상 하는 일이 있었다.
나가서 무엇을 할지, 해야 할 일을 수첩이 정리해 두는 것이다.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일정을 다 정해 뒀 다.
물론 주식에 관련된 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이번에 팔 종목은…… 이렇게 세 개 정도면 되겠군.'
수첩에 휴가 기간 동안 할 일들을 끄적이다 보니 벌써 30분이 라는 시간이 흘렀다.
청소 시간이 되기 전에 이강진은 휴가 때 만날 사람들에게 미 리 연락을 하기로 했다.
"분섭아, 나 잠깐 전화 좀 하러 갈 테니까, 누가 나 찾거든 휴 게실 공중전화 박스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휴가를 나가기까지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에 일찌감치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 둬야 나가서도 편 하다.
막사를 나서려고 하던 찰나였다.
"어흐, 추워!"
겉에 깔깔이를 입은 김철이 오들오들 떨면서 막사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도중에 이강진을 발견한 김철은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강진아, 나가게?"
"어, 전화 좀 하고 오려고."
"옷 두껍게 입고 가. 나도 방금 전화박스에 갔다 왔는데, 장난 아니게 춥더라. 귀 깨지는 줄 알았어."
꽤 오랫동안 통화를 하고 온 모양인지 귀가 새빨개졌다.
"무슨 이야기 하다 왔길래 그래?"
"대학 때 나랑 같이 그림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친구하고 전화 좀 하고 왔지. 나 말이야……."
김철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공모전, 합격했다!"
"저 번에 응모했다던 그 웹툰 공모전?"
"그래! 오더, 씨! 대학생 때는 죽어라 해도 안 되던 일이 군대에 와서 이루어지네!"
지망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웹툰 작가가 되었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틈만 나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그림 연습을 했던 김철.
그 고생을 잘 알기에 이강진도 덩달아 기뻤다.
"축하해, 드디어 해냈구나!"
"솔직히 반신반의하면서 낸 건데, 심사위원들이 좋게 봐준 거 같더라. 심사평도 나쁘지 않고. 나 전역하면 바로 미팅 일자 잡 자고 연락 왔대."
취업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대신 나가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김철은 그래도 좋았다. 오히려 꿈을 이루었으니, 행복 하기 그지없었다.
"우호한테도 가서 말해 줘. 걔, 생활관에서 티비 보고 있을 거 야."
"우호? 음……."
김철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이강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호랑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잘 지내지. 싸운 적도 없고. 내가 신경 쓰는 건 그게 아니고… … 우호가 저번에 그랬잖아? 자기 전역하자마자 바로 오 디션에 지원할 거라고. 근데 내가 먼저 이런 말 꺼내도 될까 해 서. 우호가 경쟁심이 좀 쎄잖아? 괜히 자극 주고 싶지 않기도 해 서, 그냥 나중에 시간 지나면 말할까 했지."
백우호의 경쟁심은 누구보다도 이강진이 잘 안다.
이강진이 뭘 한다 하면 백우호도 좋든 싫든 무조건 자기도 하 겠다고 지원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김철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나 이런 걱정은 이강진이 보기엔 무의미한 것이었다.
"오히려 우호는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던져 줘야 더 잘하는 타입이야. 그리고 동기한테 기쁜 일이 생겼는데, 그거 듣고 얼굴 썩는 그런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가서 말해 줘. 오히려 나중 에 말하면 왜 이제야 말해줬냐고 역으로 화낼걸?"
김철보다 이강진이 백우호에 대해 더 잘 안다. 거의 2년 가까 이 같은 생활관에서 지냈기에 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훈련병 시절 때부터 김철은 이강진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이번에도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알았어. 가서 말해 줄게."
"그래. 그리고 전역하기 전까지 그림 연습 열심히 하고."
"당연하지!"
오늘처럼 의욕이 넘치는 김철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신병교육대에서 김철을 처음 봤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거의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었는데.'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기 마련.
이강진도 이번 겨울만 잘 넘기면, 따스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겨울은 얌전히 지나가는 법이 없다.
전화박스로 향하는 길.
이강진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비쳤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였다.
"설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씨발, 또 눈 오네!"
겨울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악마의 X가루가 또다시 1075대대를 찾아왔다.
* * *
저녁점호 시간이 다가왔다.
당직사관을 맡은 통신반장이 1생활관에 들어섰다. 생활관 책 임자인 기운상이 빠르게 인원 보고를 마쳤다.
이후 통신반장은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전체 주목."
"주목!"
"밖에 눈 오는 거, 다들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군인에게는 이보다 더 끔찍한 소식도 얼마 없을 것이다.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사들은 곧장 채널을 돌려 일 기예보를 시청했다.
물론 통신반장도 마찬가지였다.
"근무 투입할 때 조심하도록 해라. 눈 때문에 길이 많이 미끄 러울 테니까. 그리고 자기 전에 '제발 눈이 쌓이지 않게 해 주세 요.'라고 한 번씩 기도하고."
일기예보에선 눈이 많이 쌓이진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병사는 여기에 없었다.
하루 종일 맑은 날씨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일기예보 에도 눈과 비가 여러 차례 내렸었다.
기상청조차 예측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군대 날씨'다.
통신반장은 기도하고 자라는 말을 농담식으로 던졌지만, 이 강진은 진짜로 할 기세였다.
'아예 물이라도 떠 놓고 할까?'
이강진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발, 이러다가 휴가 못 나가는 건 아니겠지?'
* * *
야간 외곽 근무 투입을 위해 새벽 2시 45분에 눈을 뜨게 된 이 강진.
그는 불침 번을 불렀다.
"……인준아."
"일병 하인준."
"밖에 아직도 눈 오냐?"
자나깨나 눈 생각뿐이었다.
하인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눈 그쳤습니다."
"안 쌓였지?"
"예, 내리자마자 다 녹았습니다."
이번만큼은 기상청의 말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1075대대는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군부대다.
그렇다 보니 도로 상황에 따라서 재수가 없을 경우, 휴가가 취 소되는 일도 생각보다 자주 벌어지곤 했다.
그것만큼 억울한 일 또한 드물 것이다.
이강진은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강진은 곧장 하늘의 상태부터 살폈다.
아직도 먹구름이 잔뜩 껴 있긴 하지만, 불침 번의 말대로 눈이 계속 내리진 않았다.
후임 근무자인 허인강이 그런 이강진을 달랬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아까 행정반 에서 근무 투입 준비하다가 티비에서 실시간으로 일기예보 해 주는 걸 봤는데, 새벽에 바로 먹구름 걷힐 거라고 했습니다."
"인 강아."
"이병 허인강."
이강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믿지 않는 말이 세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뭔지 아냐? 바로 기상청이 하는 말이야. 우리나라 기상청 예측률이 높다느니 뭐니 해도 난 안 믿는다."
"그럼 나머지 두 개는 어떤 겁니까?"
"국방부, 그리고 간부가 하는 말."
현역이라서 그런 걸까, 허인강은 그 말에 공감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난 내가 무사히 휴가 나갈 때까지 절대로 방심하지 않을 거 다."
"근데 이강진 병장님이 방심하지 않으셔도 자연재해까지 컨 트롤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문제지."
인간이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순 없다.
회귀까지 한 이강진이어도 그건 불가능하다.
탄약고 초소 근무를 서면서 이강진은 여러 차례 기침을 내뱉 었다.
"엣취! ……어디서 바람이라도 들어오나? 왜 이렇게 춥지?"
"왼쪽 창문 아래에 바람막이가 찢어져 있습니다. 저기서 바람 이 들어오는 거 같습니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해결만 하면 된다.
"인강아, 네가 해결할 수 있지?"
"예, 물론입 니다. 바로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허인강한테 최근에 생긴 별명이 하나 있었다.
1중대 맥)《이버.
오랫동안 노가다 작업을 하다 와서 그런지 못 고치는 게 없었 다.
빠르게 바람막이 수선에 들어간 허인강. 그동안 이강진은 탄 약고 초소 오르막길을 감시했다.
허인강은 5분도 안 돼서 모든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다 끝났습니다."
"고생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수고한 허인강을 위해 이강진이 보답을 하기로 했다.
천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무언가가 들려져 나왔다.
"자, 초코바."
"이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여기 천장 위쪽에 비밀 공간이 있거든. 근무자들이 주전부리 로 이렇게 몇 개씩 사서 채워 놓곤 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나름 군 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허인강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래 여긴 선임급만 아는 비밀 공간이야. 나중에 나 말고 다른 선임들이랑 근무 서게 되면,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건 모른 척해. 혹시 모르니까. 알았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또 하나 배웠다.
초코바로 당을 보충하면서 남은 근무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근무 시간이 끝나갈 때쯤.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
"이강진 병장님, 눈이 다시 오는 거 같습니다."
"뭐?"
정말이었다.
게다가 이번 눈발은 심상치가 않았다.
"이거, 불길한데……."
느낌이 영 별로다.
* * *
늘 안 좋은 예감은 왜 이리도 잘 맞아떨어지는지, 이강진은 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건 백색 풍경, 눈에 뒤 덮인 1075 대대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이강진은 죄 없는 침낭과 베개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시발!"
다른 병사들 역시 눈을 보고서 한숨을 안 쉴 수가 없었다.
아침 점호? 식사? 이런 건 사치다.
지금 당장 눈 치우러 나가야 한다.
제설 도구들을 가지고 사열대로 모여든 병력들.
이때, 통신반장이 그들에게 추가로 안 좋은 소식을 들려줬다.
"지금 도로에 눈이 쌓여서 행보관님, 중대장님이 출근을 못 할 지도 모른다고 하시더라. 열 명 정도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전 부 도로 제설 작업하러 갈 테니 준비해 둬라."
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
이 패턴, 이강진에겐 낯설지 않았다.
"병장 이강진!"
번쩍 손을 든 이강진이 불안한 마음을 담아 통신반장에게 질 문했다.
"그럼 오늘, 내일 휴가 출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통신반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못 나가는 거지, 뭐."
아직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제설차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주임원사님이 제설차 부르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방금 연락 왔는데, 제설차가 시동이 안 걸린다고 하더라. 정 비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대."
불운이 겹겹으로 찾아왔다.
이대로 포기할 건가?
아니, 휴가를 앞둔 이강진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집합이 끝나자마자 이강진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오늘 내로 저 망할 눈들, 다 치워 버 린다! 각오 단단히 해 둬 라!"
이건 더 이상 제설 작업이 아니다.
눈과의 전쟁이다!
<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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