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3화. 무모한 용기 (1) >
제93화 무모한 용기 (1)
이강진이 휴가를 나가 있을 때였다.
다른 병사들은 평소처럼 열심히 행보관이 시키는 작업에 임 했다.
오늘 작업의 주된 테마는 혹한기 훈련을 대비한 준비였다.
"일광건조 하게 돼지갑바천하고 위장막, 텐트 꺼내서 사열대 앞에 쫙 펼쳐 놔라."
"예, 알겠습니다!"
1, 2분대가 일광건조 작업을 맡게 되었다.
창고에서 숙영 물자를 꺼내 사열대 앞까지 옮기는 것만으로 도중노동이었다.
오늘은 PX가 아니라 부대원들과 같이 작업을 하게 된 조은석 은 벌써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가장 안 좋은 조은석인데, 요즘 PX에서 여 유롭게 일을 하느라 그동안 노가다의 맛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 다.
게다가 행군까지 짬처리 되다 보니 체력을 기를 만한 기회가 많이 없었다.
반면, 최영고는 조은석과 정반대였다.
"은석아, 힘들면 그거, 나 줘. 내가 들고 내려갈게."
"아, 아닙 니다! 제가 들고 내려가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결국 조은석이 들고 있던 텐트봉 마대를 가로채는 데에 성공 했다.
왼손으로 마대를 들어 올리는 최영고. 무거운 물건을 듦과 동 시에 죄영고의 왼쪽 팔뚝에 잔근육들이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근육 라인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조은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영고 일병님, 요즘 운동하십니까?"
"응? 어. 성태강 상병님하고 시간 날 때마다 헬스장에 자주 들 락날락했거든."
처음에 최영고는 호기심 때문에 성태강과 함께 헬스장에 갔었다.
그때, 최영고는 보고 말았다.
성태강의 잘빠진 몸매를.
군대에 와서도 빼놓지 않고 자기 관리에 임했던 성태강. 안 그 래도 좋았던 몸이 훨씬 더 보기 좋게 업그레이드되었다.
남자가 봐도 반할 것 같은 근육진 몸매.
최영고는 순간 부럽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신도 저렇게 되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굉장히 괴로웠다. 바벨을 들고 난생처음 하 는 자세를 취했을 때 오는 통증은 이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그러나 하루가 삼 일이 되 고, 삼 일이 한 주가 되고, 한 주가 한 달이 되다 보니 점점 웨이 트에 익숙해져 갔다.
꾸준한 운동 덕분에 이제는 제법 잔근육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체력도 많이 붙었다. 아침 구보를 할 때마다 매번 헉헉거리던 최영고는 더 이상 없다.
근육이 붙고 체력이 생기니 군대에서 받는 훈련과 행보관이 시키는 작업도 이젠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은석이, 너도 헬스 꾸준히 해 봐. 전역하기 전에 몸이라도 만 들고 나가면 좋잖아. 안 그래?"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조은석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죄영고처럼 열심히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숙영 물자를 널고 난 뒤.
1부소대장이 나와 1, 2분대 병력들을 집합시켰다.
"뒤에 보니까 건조대 옆쪽 담벼락이 무너져 있더라. 멧돼지가 밟고 다니다가 망가뜨린 거 같은데, 행보관님 보시기 전에 보수 작업 하러 가자."
병사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썩어 들어갔다.
이 많은 숙영 물자를 일광건조 하느라 거의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해 버렸는데 삽질까지 하라니까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하나 최영고는 아직 에너지가 팔팔 넘쳤다.
"예, 알겠습니다. 자, 자! 그만 쉬고 작업하러 가자. 일찍 끝내 야 많이 쉬지."
힘찬 발걸음으로 앞장서서 걷는 최영고.
뒤따르던 조은석이 허인강에게 조용히 말을 붙였다.
"최영고 일병님이 원래부터 저렇게 의욕이 넘치시는 분이었 나? 내가 기억하기론 아닌데……."
"일병으로 진급하고 나시더니 갑자기 군 생활을 성실히 하시 는 거 같습니다."
계급에 따라 사람이 바뀌는 건 군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 이다.
일병은 일을 많이 하니까 일병이라고 불린다. 병사들 사이에 선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열정적으로 삽질을 하는 최영고의 모습을 보면서 부소대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영고, 일 잘하네."
"일병 최영고. 감사합니다!"
"아까 인사장교님 만나서 들었다. 진급 시험 볼 때, 네가 1등 이었다며?"
"예, 그렇습니다."
필기 만점, 화생방 테스트 만점, 사격 18발, 그리고 체력 테스 트 1위!
사격 훈련에서 2발을 놓쳐서 만발의 영예를 거머쥐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종합 성적으로 따지면 죄영고가 이번 달 진급 대상자 중에서 당당하게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부소대장은 죄영고를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이 정도면 포스트 이강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거다."
"아직 그 단계까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강진은 최영고의 목표이기도 한 인물이다.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인데, 부소대장한테 이런 말을 들으 니 많은 용기를 얻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외로 군대 체질인가?'
처음에 자대 생활을 할 때에는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 내다 보니 할 만했다.
자신감이 점점 커져 갔다.
이 자신감은 보통 장점이 되지만…….
가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부소대장님."
"어, 왜?"
"저 말입니다."
갑자기 죄영고가 폭탄 발언을 꺼냈다.
"부사관 지원해 볼까 하는데, 혹시 조언 같은 거 해 주실 수 있 습니까?"
요 근래 들어서 최영고가 군 생활에 부쩍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건 이강진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부사관은 좀오버인데.'
처음에 부사관을 지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강진은 솔직 히 말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쳤다고.
다들 전역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자처해서 군대에 뼈 를 묻겠다고 나서는 이가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운상이한테는 말해 봤어?"
"지금 타 부대로 파견 가서 아직 말 못 했습니다."
"아…… 그랬었지."
후임들의 상담 요청을 받아 주는 일 또한 분대장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 분대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전(前) 분대장인 이강진이 후 임의 고민을 들어 줘야만 했다.
"부사관이라
이강진은 부사관 지원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끔 1중대 막사 복도에 부사관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을 때가 있다. 그때에도 이강진은 공고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 으려고 했다.
부사관은 무슨. 이건 전역에 목이 말라 있는 사람한테 마치 스 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이강진은 재차 최영고의 의사를 확인 했다.
"정말로 부사관 지원하게? 진심으로?"
"예, 부소대장님한테 여쭤보니까 마침 다음 주 수요일까지 부사관 모집을 받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지원해 볼까 생 각하고 있습니다."
"크흠……."
'회귀 이전에도 최영고가 부사관을 생각하고 있었나?' 그건 아니었다.
물론 이강진이 전역하고 난 다음에 부사관을 지원했을지 어떤지는 모른다. 전역 이후의 일은 이강진도 모르니까.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일지도 몰랐다.
뭐라고 대답을 해 주면 좋을까.
이강진이 여태껏 들었던 고민 상담 내용 중에서 가장 이야기 하기 껄끄러운 소재였다.
헤어진 여자 친구 문제라든지, 가족 중에 누가 아프다든지, 아니면 자격증 시험이 있는데 이거 보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이런 것들은 이강진이 그래도 어느 정도 조언을 해 줄 수 있 다.
하나 부사관은 좀…….
"부소대장님은 뭐라셨어?"
"제가 하면 잘할 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보관님은? 상담받아 봤어?"
"예, 제가 부사관 지원하는 걸 응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리고 기왕이면 이강진 병장님도 저처럼 부사관에 지원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말은 머릿속에서 바로 지워라. 듣기도 싫으니까."
끔찍한 소리였다.
본인이 부사관에 지원하고 싶다고 이렇게 강력하게 어필을 하는데, 이강진이 나서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꿈은 언제든 변하는 법.
군대에 와서 부사관이라는 새로운 꿈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강진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최영고의 새로운 꿈을 부정하겠나.
"그래,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한번 지원해 봐. 대신……."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었다.
"바로 지원하지 말고 좀 더 있다가 지원했으면 좋겠다. 어차 피 다음 주 수요일까지라며? 시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한 뒤에 지원해."
"예, 알겠습니다!"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
이게 이강진이 최영고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 * *
오전 집합 시간.
이강진은 그 전에 곽분섭과 함께 행정반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같은 분과 후임과 외곽 근무를 서는 기분이었다.
행정반에 먼저 들어가 빠른 속도로 말판과 총기현황판을 수 정한 곽분섭.
그런 곽분섭을 보면서 이강진은 씨익 웃었다.
"예전에는 뭔가 하나씩 계속 빠트리더 니만, 이제는 알아서 척 척척이네."
"저도 이제 곧 상병이지 않습니까. 이제 올챙이 시절 일은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상병 달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벅차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진급하는 것보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하는 것이 확실히 느낌이 많이 다르다.
후임급에서 선임급으로 넘어가는 구간이니까.
곽분섭이 상병이라니, 이강진은 상상이 잘 안 됐다.
"시간이 빠르긴 빠르구나."
"이강진 병장님도 이제 곧 전역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휴가두 번에 훈련 한 번만 거치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역의 순간이 찾아온다.
하나 스스로 전역일을 미룬 자도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최영고였다.
근무 교대를 마치고 탄약고 초소로 들어오자마자 이강진은 방 탄모 끈을 풀었다.
"분섭아, 영고 말이다. 부사관 지원할 거라던데, 너도 알고 있어?"
"예, 들었습니다. 아마 1분대 전체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은, 백우호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우호는 뭐라든?"
"미쳤냐고 했습니다."
이강진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준 셈이었다.
솔직히 이강진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나 정식으로 상담을 요청해 온 후임에게 그런 막말을 던지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미처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최영고가 원한 건 장난이 아닌 진지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 래서 이강진은 그에 걸맞은 대답을 해줬다.
"이강진 병장님도 같은 생각 아니십니까?"
"사실 그렇지. 근데 뭐, 군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나쁜 건 아니 니까."
일정 기간 동안 계속 복무하면 나중에 연금도 나오고, 국가에 서 받는 혜택도 있고. 나름 할 만하다.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도중에 부대에서 사고라도 벌어져서 불명예 전역이라도 하 면, 그런 게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게 큰 문제지."
사고 없는 부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로는 '무사고 XXX일째'라고 써 붙이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 은 사고가 참으로 많다.
부대 이미지 관리한답시고 사고를 사고로 인정하지 않아서 기 적의 무사고 행진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병사와 간부는 입장 차이가 심하다.
간부만의 고중이 있다. 이걸 잘 모르는 상태로 괜히 부사관에 지원했다가 견디지 못하고 전역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이강진은 최영고가 그런 신세가 될까 봐 걱정이었다.
< 제93화. 무모한 용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