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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입대 전날-284화 (284/347)

< 제90화. 견장을 떼다 (2) >

제90화. 견장을 떼다 (2)

행보관이 1분대에게 작업을 시킨 게 있었다.

사열대 앞에 있는 죽구 골대 보수 작업이다.

골대를 옮기고 밑의 지면을 다시 평탄하게 만든 뒤, 골대를 원래 있던 자리로 원위치시키면 된다.

중간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골망도 케이블 타이로 수 선을 해야 한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다른 작업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없었다.

기운상이 최고 선임이다.

동시에 분대장이다.

"골대 무거우니까 다들 발 조심해서 옮겨라."

"예, 알겠습니 다!"

"하나, 둘…… 셋!"

기운상의 구호에 맞춰서 골대를 들어 올리는 1분대원들.

조금씩 조금씩 왼쪽으로 발을 맞춰 이동했다.

내려놓을 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발 조심!"

쿵!

골대를 내려놓은 뒤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돌부터 먼저 골라내자, 골망 보수 작업은 나중에 하고."

"예!"

1분대원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때, 허인강이 기운상에게 물었다.

"기운상 상병님, 제가 네기 가져오겠습니다."

"네기? 돌 고르고 난 다음에 하면 되잖아? 네기로 해 봤자 돌 때문에 안 될 텐데?"

손으로 돌을 골라낸 다음에 평탄화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었 다. 그러나 허인강은 생각이 달랐다.

"갈퀴 부분으로 먼저 땅을 한번 갈면 됩니다. 그러면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네기 반대쪽 으로 땅을 고르게 하면, 작업 시간을 헐씬 단축시킬 수 있을 겁니다."

노가다의 달인 허인강이 하는 말이다. 믿음이 가는 의견이었 다.

다른 분대원들도 허인강의 아이 디어에 찬성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니, 그냥 손으로 하자."

분대원들은 기운상의 결정에 귀를 의심했다.

왜? 어째서?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굳이 불편한 방법을 택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태강도 마찬가지 였다.

"기운상 상병님, 인강이 말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가 들어 봐도 괜찮은 의견인 거 같은데……"

"그러다가 막상 골대 다시 원래대로 돌렸는데 박혀 있는 돌 때문에 기울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손으로 하는 게 더 확 실하잖아.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라."

성태강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말년 병장 둘을 제외하고 분대 내에서 넘버 투인 성태강이 기 운상의 말대로 하겠다고 했으니, 나머지 후임들도 군말 없이 기 운상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

선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군대의 법칙이다.

사실 기운상도 알고 있었다.

허인강이 제안한 대로 하면 빠르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으손으로 일일이 돌을 골라내는 것하고 네기를 이용해서 작업하는 것하고 사실 그렇게까지 크게 차이가 없다.

골대 밑에서 돌이 발견되어도 다시 살짝 들어 올려서 그것을 빼내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운상은 허인강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 았다.

분대장인 자신이 허인강의 말대로 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거 부감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분대장을 달기 전에 기운상은 이런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후임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 면서 친근함을 토대로 분대원들을 이끌겠다고.

하나 막상 견장을 다니, 그 마음가짐이 벌써부터 무뎌지는 듯 했다.

*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병사들.

이강진과 백우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대로 매트리스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집합 시간인 오후 1시까지 이들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12시 57분.

행정반에서 방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 병력은 지금 즉시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 오후 집합이 시작되었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 병사들은 마치 좀비처럼 사열대 로 향해 걸어 나갔다.

기운상은 잠시 화장실에 들를 생각으로 이들보다 먼저 생활 관을 나섰다.

소변을 본 기운상은 손을 씻은 뒤에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도중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야."

1생활관 문이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 녀석들

뒷정리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가 잔뜩 난 기운상은 곧장 사열대로 향해 분대원들에게 버 럭 소리를 쳤다.

"1 분대!"

성태강을 비롯해 1분대 후임급들이 자신의 관등성명을 외쳤 다.

그들을 향해 기운상의 쓴소리가 이어졌다.

"뒷정리 제대로 안 하고 오냐! 백우호 병장님 자리가 엉망이 잖아! 아주 정신머리가 빠졌네, 빠졌어!"

"죄송합니다!"

"바로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이들은 생활관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1분대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백우호가 기운상에게 진 정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애들이 잘못한 거 아니야. 내가 마지막에 나올 때 정리 안 해서 그런 건데……."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집합하기 바로 전까지 뒷정리가 되어 있는지 확인을 하는 게 막내들 역할이지 않습니까? 이건 애들 이 명백히 잘못한 겁니다."

"크흠……."백우호는 괜히 자기 때문에 후임들이 쓴소리를 들은 거 같아 서 신경이 쓰였다.

한편.

이강진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기운상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평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기운상이 이렇게 까지 화를 내진 않았었다.

'견장의 무게감 때문인가.' 분대장이 되었다는 책임감이 기운상을 알게 모르게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 * *

근 이틀 동안 1분대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순간, 기운상의 잔소리가 생활관을 가득 채운다.

오늘도 담당 사로 휴지통 치우는 게 너무 느리다고 바로 집합을 걸었다.

덕분에 1생활관은 오전부터 텅텅 비게 되었다.

백우호는 열린 1생활관 문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운상이 녀석, 갑자기 사람이 왜 저렇게 달라졌대?"

이강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초록 견장을 단 순간부터 기운상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분대장 달았다는 중압감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런 걸로?"

견장을 차 본 적이 없는 백우호는 이강진이 한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하는 일이 좀 늘어났을 뿐인데, 그거 가지고 사람이 180 도 달라질 수 있을까?

하나 이강진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 분대장 달았을 때, 애들 군기 빡세게 잡았었잖 아. 기억 안 나?"

"그랬었나? 난 잘 모르겠는데."

"넌 나하고 동기여서 그런 거고."

앞으로 분대원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군기를 잡고 가 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상냥한 분대장, 착한 분대장. 물론 좋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

그래서 이강진도 불가피하게 분대장을 단 이후부터 1~2주가 량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후임들을 일부러 타이트하게 굴 렸었다.

하나 지금의 기운상은 기강을 잡느니 뭐니 하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의미 없는 채찍질을 계속하는 기분이었다.

갈구더라도 후임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로 갈궈야 하는데, 이 강진이 봤을 때에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별거 아닌 걸로 트집을 잡고, 그것으로 계속 갈굼을 이어 나 가면 오히려 반감만 커진다.

'이건 서로 지쳐 가는 꼴밖에 안 되는데.'

분대장이 바뀐 뒤로 이강진은 일부러 기운상의 방식에 간섭 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이강진 없이 기운상이 1분대를 끌고 가야 하는데, 분 대장을 인수인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강진이 이러면 안 된 다, 저렇게 하면 된다라는 식으로 관여를 하면 기운상이 분대장을 단 의미가 없다.

이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방관을 하고 있었으나…....

그 결심은 집합을 끝내고 돌아온 후임들의 얼굴 표정을 보자 마자 사라졌다.

아무리 힘든 군 생활이어도 밝은 표정을 보여 주던 후임들이 지금은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강진은 성태강을 따로 불렀다.

"태강아, 운상이 어디 있어?"

"막사 뒤에서 잠깐 앉아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강진.

그는 곧장 기운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강진이 생활관을 나서는 모습을 쭉 지켜본 백우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원래 이런 분위기 굉장히 안 좋아하는데."

* * *

생각이 많이 보이는 기운상.

이강진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기운상."

"상병 기운상."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후임들 기강 잡는답시고 그들을 계속 갈구는 건 기운상에게 도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후임들에게 초반부터 얕보이 면, 나중에 분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카리스마라는 게 필요하다.

이 카리스마를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바로 갈굼이다.

기운상은 이렇게 생각했다.

"애들 일부러 갈구는 거지?"

이강진은 기운상의 이런 생각을 단번에 간파해 냈다.

같은 처지를 경험했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기운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근데……제가솔직히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 르겠습니다."

분대장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평소 후임들과 잘 어울리 던 자 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기운상을 고달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강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었다.

"너, 담배 안 피우지?"

"예, 어머니가 아버지 담배 피우는 걸 굉장히 싫어하셔서 전 입에도 안 댔습니다."

"넌 소장님을 별로 안 좋아했었지?"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서로 간의 벽은 남아 있 는 거 같습니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원래 궤도로 돌리기가 어렵다 는 것.

이강진은 그걸 강조하고 싶었다.

"너하고 애들 사이에도 그런 감정의 벽이 쌓이게 된다면, 어 떨 거 같아?"

"부자지간에도 쉽게 벽이 허물어지지 않고 있잖아? 근데 애 들하고 벽을 쌓아 두면, 과연 그 벽이 훗날 쉽게 허물어질까?"

이강진이 생각하는 대답은 이렇다.

"아니, 전혀."

오히려 벽을 무너뜨리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좋든 싫든, 넌 애들하고 전역할 때까지 서로 얼굴 보면서 지내야 하잖아. 그런데 사소한 걸로 막 집합 걸고 그러면 애들이 과연 좋아할까? 너 같으면 어떨 것 같아?"

"저도…… 싫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대장이라셔?"

이강진은 혀를 찼다.

공감은 하지만, 갈굼만이 해답은 아니다.

"채찍만 휘두르면 누구나 다 지치게 마련이야. 당근도 줘야지.

계속 채찍질만 하면 네 팔이 먼저 나갈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다.

갑자기 달라진 이들의 관계.

그 속에서 기운상은 해답을 찾아야 한다.

원래 깊게 관여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강진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전에 지웅이 형이 필중이 형을 제치고 차기 분대장이 되었던 거, 기억하지?"

"예."

"그때 준렬이 형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L 그러면 해답이 나올 거야."

지위를 앞세운 일방적인 갈굼이 필요한 게 아니다.

후임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헤아릴 줄 아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병사니까, 서로가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서 힘들다는 걸 잘 아니까.

알고 보면 이들은 같은 처지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강진 병장님. 덕분에 이제야 좀 보이기 시작 하는 거 같습니다."

뭐가 보이게 된 건지, 이강진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강진의 충고를 듣고 기운상은 많이 달라졌다.

행보관이 시킨 작업을 하던 와중에 기운상은 허인강에게 와 보라고 손짓했다.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게 있나, 바짝 긴장하며 다가간 허인강.

그러나 갈구려고 그를 부른 게 아니었다.

"인강아, 난 노가다 해 본 적이 없어서 이거 어떻게 작업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혹시 좋은 방법 있어?"

"아…… 물론 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도 분대장, 막내 이런 직위를 생각하지 않고 후 임에게 먼저 다가가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했다.

달라진 그의 모습이 병사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 했다.

이강진은 흐뭇한 미소로 그런 기운상과 후임들을 바라봤다.

'이제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하겠지.'

마음의 짐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 제90화. 견장을 떼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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