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9화. 실제 상황 (4) >
제89화. 실제 상황 (4)
"아니, 이강진 병장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류한일 상병이 놀라 물었다.
이들에게 여유롭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이강진은 초소 문부터 빨리 열라고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다급하게 올라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일단 류한일은 곧장 초소 문을 이들에게 개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성준형이 곧장 유선망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이강진은 초소 근무자들에게 지시했다.
"지금 사단장님 올라오고 계시니까, 입구 잘 지켜보고 있어 라."
"오, 올라오고 계십니까?"
"왜 연락을 안 주신 겁니까?"
이강진은 대답 대신에 성준형이 살펴보고 있는 탄약고 초소 키를 가리켰다.
"고장 나서."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근데 안 되니까 우리가 직접 여기까지 온 거야. 사단 장님 올라오시기 전에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가야지. 준형아, 다 끝났어?"
유선망과 한창 씨름을 하던 성준형 일병은 좀 더 걸릴 거 같 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대낮이라면 금방 작업이 끝났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깊은 새 벽이다. 짙게 깔린 어둠 탓에 작업이 쉽지 않았다.
"이상하네, 다 멀쩡한 거 같은데...... 헉!"
살펴보던 중에 성준형이 갑자기 헛숨을 삼켰다.
"이강진 병장님, 일 났습니다!"
"또 뭔데?"
이놈의 일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왜 계속 발생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선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단선됐다고?"
"예……!"
욕지거리가 튀어나을 뻔했던 것을 간신히 참아 낸 이강진.
손전등을 들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 인해 보기로 했다.
"이 런 썅……."
한숨을 내쉰 이강진은 성준형에게 거두절미하고 바로 물었다.
"복구하는 데 얼마나 걸려?"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사단장님이 이 곳 초소까지 올라오기 전에 끝내는 건 힘들 거 같습니다."
제대로 망했다.
여기서 성준형과 함께 탄약고 초소에서 통신기기를 계속 수 리하고 있다가 사단장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탄약고 초소와 행정반의 연락 체계 확립이 안 되었다는 게 들 통 나는 셈이니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매우 큰일이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방치하고 퇴각할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단장이 굳이 유선망까지 체크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어쩌면 확인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대대장의 경우에는 올 때마다 수시로 키를 확인해 보곤 한다. 하지만 사단장은 다를지도 모른다.
사단장이 확인을 안 할 거라고 믿고 그냥 퇴각하든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어떻게든 유선망을 복구시키든가.
선택의 시간이다.
고민하는 데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어느 하나를 택하든 최대한 빠르게!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강진은 류한일을 불렀다.
"한일아, 네가 해 줘야겠다."
"유선망 복구 작업 말입니까?"
류한일은 통신분과가 아니다. 수송이다. 차량 정비는 할 수 있 지만, 이런 작업은 무리다.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시키겠냐."
이강진이 류한일에게 맡기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
"준형이가 저거 고칠 때까지, 너희가 시간을 좀 끌어 줘야겠 다."
다시 한번 강수를 둬 보기로 했다.
간부들과 함께 탄약고 초소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오르게 된 사단장.
"여긴 길이 좀 가파르군."
사단장의 나이로는 매일 이곳을 오르락내리 락하기엔 다소 무 리가 있어 보였다.
중대장이나 소대장 같은 젊은 간부들은 육체적으론 괜찮았으 나, 정신적으로는 괜찮지 않았다.
혹여나 탄약고 초소 근무자들이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 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초소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평지에 발을 들이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사단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순간 의아해했다.
정지하라는 경고를 너무 멀리 떨어진 곳부터 해 온 느낌이었 그러나 사단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가볍게 넘기기로 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단장이다."
그러나 류한일은 여전히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문어를 외쳤다.
"기러기!"
"사단장이 라니까."
"기러기!"
사단장이 왔어도…… 아니, 국방부장관이 왔어도 답어를 대지 못하면 초소에 함부로 접근시키게 해선 안 된다.
특히 북한의 도발 때문에 비상 상황이 걸린 현 시국에는 더더욱 이런 규율을 엄수해야 한다.
사단장은 끝까지 버 티다가 결국 답어를 들려주기로 했다.
"등대."
"누구냐!"
"사단장."
"용무는!"
"초소 경계 순찰."
류한일은 일부러 천천히 사단장에게 물었다.
이유가 있었다.
"신원 확인을 위해 5보…… 아니, 15보 앞으로!"
말을 하면서 슬쩍 뒤를 바라봤다.
이강진이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수리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유선망 복구 작업을 위해서 류한일은 이들을 위해 최대한 시 간을 벌어 줘야만 했다.
그래서 류한일은 이강진의 작전에 따라 평소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사단장 일행에게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고 경고를 날렸던 것이다.
임무를 완수한 이강진은 성준형과 항께 빠르게 초소를 벗어 났다.
이들의 모습이 사단장 일행에게 들키지 않도록 후임 근무자 인 고영진이 몸으로 가려 줬다.
이강진의 작전은 성공이다.
초소를 빠져나온 이강진은 바로 행정반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유선망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류한일 조가 사단장 앞에 서 제대로 경계근무 수칙 등을 말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계속 근처에 남아 있기로 했다.
FM대로 모든 절차를 소화한 사단장은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류한일이 사단장에게 외쳤다.
"충성 초소 경계 근무 중 이상 무!"
"근무는 잘 서고 있었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사단장이 위병소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부터 쭉 좌 경계총 자세를 유지하면서 FM 경계 근무 태도를 유지했다.
덕분에 벌써부터 팔이 저려 왔다.
그러나 눈앞에 사단장이 있다 보니 저린 팔의 사정 같은 건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암구호는 다 알고 있는 거 같고.근무자 수칙 브리핑 좀 해 보 게."
"예, 알겠습니 다!"
류한일과 고영진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초소 경계 근무자가 숙 지하고 있어야 할 근무 수칙을 빠르게 브리핑해 나갔다.
초소 근처에 몰래 숨어 있던 이강진은 그들을 속으로 응원했 다.
이강진의 응원이 닿은 걸까, 사단장의 테스트는 무사히 종료 되었다.
이제 이대로 돌아가나…… 싶었으나.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보고 가지."
갑자기 사단장이 손을 뻗었다.
목표는 유선 키였다.
수화기를 들어 올린 사단장은 고영진에게 명령했다.
"키 돌려 보게."
"예, 알겠습니다!"
고영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직접 키를 돌렸다.
사단장 일행이 모르는 내막을 아는 류한일은 입안이 바짝 마 를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작동할까?
미처 확인까진 못했다.
"행정 반."
-통신보안. 행정반 상병 서광수입니다.
"소리 잘 들리나."
예잘들립니다.
1075대대 인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심 통화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깔끔하게 연결되 었다.
성준형이 제대로 수리를 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과제까지 클리어했다. 사단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무 잘 서고 있군."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새벽부터 생고생을 했다.
사단장 일행이 다시 막사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이강진도 성준형과 함께 하산하기로 했다.
저들이 막사로 내려가기 전에 이강진과 성준형이 먼저 행정 반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가자, 준형아."
"예!"
그래도 올라올 때에 비해서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간밤에 벌어진 사단장 방문 소동은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종료되었다.
오전 9시가 되자마자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당직 완장을 바로 인수인계했다.
완장을 건네받은 백우호는 이강진에게 간밤에 있었던 소동에 대해 물었다.
"아까 광수한테 들었다. 사단장님이 갑자기 오셔서 새벽에 난리도 아니었다며?"
"그랬었지. 사단장님 오셨을 때, 하필 탄약고 초소 유선망이 먹통이 되어서 더 식겁했어."
"헉, 진짜? 안 털렸냐?"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강진은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사단장님이 초소로 가기 전에 나하고 준형이가 먼저 선수 쳐서 고치고 내려왔어."
"미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간부님들은 전혀 몰 라?"
"일부러 말 안 했어. 대신, 네가 좀 있다가 통신한테 가서 초 소 쪽 유선망을 전체적으로 점검 한번 해 보라고 전해 줘. 통신 반장 모르게 진행하라고 해. 어제 있었던 일이 통신반장 귀에 들어가면, 통신분과 탈탈 털릴지도 모르니까."
이것 때문에 이강진은 일부러 간부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 았다.
백우호는 알았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이강진을 안심시켰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이강진.
"그럼 난 자러 간다."
"그래, 고생 많았다."
"천만에. 아, 맞다. 그리고 나 대신에 준형이한테 칭찬 카드 두 장 줘."
성준형이 없었더라면 1중대는 사단장한테 제대로 털렸을지 도 모른다.
새벽에 고생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은 줘야 하지 않겠나.
이강진에게 칭찬 카드 두 장을 넘겨받은 백우호는 꼭 전달해 주겠다고 확답을 줬다.
이제야 모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샤워를 한 뒤에 이강진은 곧장 생활관으로 향했다.
달콤한 근무 휴식이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서 푹 자야겠어.'
사단장 때문에 새벽 내내 제대로 눈을 붙이질 못했다.
원래 이강진이 당직 근무를 섰을 때에는 1시간 내지 2시간 정 도 몰래 눈을 붙이곤 했었다.
아예 자러 행보관실로 들어가 버리는 행보관과 같이 당직을 설 때에는 그 이상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근무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단장이 한번 부대를 쓸고 가니, 그 긴장감 때문에 잠의 요 정이 오고 싶어도 방문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강진의 머릿속은 못 잤던 만큼 근무 휴식 때 푹 잘 생각으 로 중만했다.
하나 행보관이 그런 이강진을 불러 세웠다.
"근무 휴식 하러 가는 거냐."
"병장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행보관은 이강진의 등을 두세 번 토닥여 줬다.
"간밤에 고생 많았다. 네 덕분에 사단장님도 만족하시고 가셨다."
"해야할 일을 했을뿐입니다."
그리고 이강진은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행보관도 고생을 많이 했다.
대뜸 행보관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분대장 교체식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보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강진의 군 생활 중 몇 안 되는 숙원 사업이기도 한 분대장 교체 프로젝트.
행보관이 그에 관해서 구체적인 일정을 언급했다.
"다음 주 수요일로 잡을까 하는데, 어떠냐."
"예, 괜찮습니다!"
수요일이면 어떻고, 목요일이면 어떠랴.
이 초록 견장만 뗄 수 있다면, 어떤 요일이든 상관없다.
< 제89화. 실제 상황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