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9화. 실제 상황 (3) >
제89화. 실제 상황 (3)
사단장이 왔다는 말에 행정반은 갑자기 남극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30초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졸려서 잠깐 눈 좀 붙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던 소대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싹 달아날 법한 충격적인 소식.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강진이었다.
"확실해? 사단장님 오셨다는 거, 진짜야?"
"그,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는데?"
"지휘통제실로 가셨다고 합니다!"
조장실에서 연락이 왔으니 방금 사단장이 위병소를 막 통과 했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면 1중대로 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강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수야, 총기 현황판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라. 금일 암 구호 적혀 있는지도 확인하고. 그리고 불침번 찾아서 실 내, 실 외 온도 체크판 갱신해 두라고 해! 어서!"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대장님, 제가 행보관실에 들어가서 물건들 다 정리 할 테니, 소대장님은 중대장실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알았다!"
그나마 이강진이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잘했다.
서광수와 소대장이 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분배시켜 준 뒤, 이 강진은 다시 한번 키를 들어 올렸다.
조장실에 연락해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통신보안! 1중대 행정반 병장 이강진입니다! 방금 사단장님 이 부대로 들어오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사단장님 혼자 오신 겁니까?"
궁금한 것들은 최대한 다 물어보기로 했다.
혼자는 아니었다.
사단장이 탄 레토나와 연대장이 탄 레토나가 나란히 같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들려줬다.
연대장이 같이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대장하고 연대장이 우리가 준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 줄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 대대가 털리면 연대장도 사단장에게 같이 털리게 될 테니, 연대장 입장에선 1075대대가 만반의 준비를 갖 출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도 안 털릴 수 있을 테니까.
지금쯤 지휘통제실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조장실과 연락을 마친 이강진은 바로 탄약고 초소 쪽으로 키를 넣었다.
-통신보안, 탄약고 초소 상병 류한일입니다.
"한일이냐? 나, 강진인데."
-충성!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이강진은 미리 경고했다.
"형이 하는 말, 놀라지 말고 들어라."
키 너머로 류한일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강진이 이렇게 급박하게 키를 넣는 일은 거의 드물다.
이유가 있을 터.
"사단장님께서 오셨다."
-아까 위병소 쪽으로 들어오던 차량들이…… 사단장님이었습 니까?
"그래."
근무자들 입장에선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그 많고 많은 탄약 고 초소 근무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자신들이 근무할 때 사단장 이 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랴. 원래 군 생활은 복불복이다. 운이 나쁜 걸 누 구의 탓으로 돌릴 순 없었다.
"후임 근무자, 누구냐?"
-고영진 일병입니다.
"영진이, 근무자 요령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 리고 암구호 꼭 기억해 두고 있어라. 오늘 암구호 뭔지 알고 있 지?"
-예.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사단장님, 아직 여기로 안 오셨으니까, 탄약고로 출발하실 때쯤에 내가 다시 너희한테 키 넣어 주든가 할게."
-예, 알겠습니다!
키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지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문제는 아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서 가볍게 넘겨 버린 이 강진.
그는 행보관실로 곧장 향했다.
어지럽혀져 있는 행보관실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이 이강진이 해야 할 일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정리, 정돈 작업에 들어갔다. 그사이, 행보관 이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행정반을 찾았다.
"사단장님, 아직 안 오셨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행보관님, 제가 방금 행보관실 정리 므I 끝내 뒀습니다."
"잘했다. 해야 할 거, 또 있나?"
"웬만한 건 다 체크해 뒀습니다. 행보관님이 마지 막으로 한 번 씩 확인만 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역시 이강진을 당직으로 기용하는 게 정답이었다.
행보관의 용병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분대장 교체식을 앞당기게 해줬다는 희생을 치르긴 했 지만, 그래도 사단장에게 털리는 것보다야 헐씬 나았다.
한창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던 찰나에 또다시 키가 울렸다.
이번에는 지휘통제실에서 온 연락이었다.
"통신보안, 병장 이강진입니다."
.어, 나 당직사령인데.
한숨을 크게 내쉰 그가 1중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했다.
.지금 막 사단장님 출발하셨다.
올 것이 왔다!
?k -k -k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있다.
관사에서 늦은 취침을 취하고 있던 중대장들은 이게 무슨 일 인가 싶어 허겁지겁 지휘통제실로 출동했다.
연대장이 온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별 두 개가 1075대대에 강 림한 것이다.
사단장은 중대장들을 바라보면서 허허실실 웃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다 나을 필요까진 없는데."
"아, 아닙니다!"
"사단장님께서 오셨는데, 어찌 저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대대장도 눈 뜨자마자 바로 군복 입고 지휘통제실로 뛰어왔 다. 이 와중에 중대장들이 두 발 뻗고 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단장은 간부들과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지휘통제실에선 크게 털릴 만한 건 발견되지 않았하나 순찰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본부중대가 끝났으니, 다음 타깃으로 이동할 차례다.
"1 중대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1중대장이 자진해서 먼저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사단장 일행.
사단장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대장과 행보관, 그리 고 이강진은 사열대 앞으로 향했다.
사단장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강진이 행보관과 소대장 에게 불빛이 비치는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사단장님이 오고 계신 거 같습니다."
"그, 그래!"
소대장과 행보관은 긴장한 표정으로 사열대 계단 아래로 내 려갔다.
"충! 성!"
"충성. 다들 오랜만이군."
사단장이 먼저 소대장과 행보관에게 친근감을 표현했다.
그나마 행보관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면서 어느 정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소대장은 그러지 못했다.
"주, 중위 성태원! 사단장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 니다!"
"영광까지야. 시간도 늦었으니까 살펴볼 것만 살펴보고 가겠 네. 일단 행정반부터 가 볼까."
"예! 알겠습니다!"
1중대장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소대장이 금일 당직사관답게 빠른 속도로 브리핑을 진행했다.
실내, 실외 온도를 30분을 주기로 계속 불침 번들이 체크하고 있다든지. 비상연락망을 판때기로 따로 만들어서 행정반 잘 보 이는 곳에 붙여 뒀다든지. 이런 것들을 강조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는 행정반을 보면서 사단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되어 있군."
"감사합니다!"
작게나마 안심하는 소대장.
하지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본게임이다.
"초소 한번 올라가 볼까."
사단장의 뒤를 따라 간부들이 우르르 막사를 나섰다.
이강진은 행정반에 남았다. 탄약고 초소 근무자들에게 사단 장이 이제 막 출발했다고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수화기를 들어 올린 이강진.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탄약고, 탄약고."
아무리 탄약고 초소를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입김을 강하게 후후 불어 봐도 탄약고 초소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강진은 다급하게 서광수를 찾았다.
"광수야!"
"상병 서광수!"
"준형이 오라고 해, 어서!"
"알겠습니다!"
마침 불침번 후임 근무자가 통신분과에 소속되어 있는 성준 형 일병이었다.
아무리 이강진이 아는 게 많다고 해도 전문적인 지식까지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유선에 문제가 생기면 통신을 부르는 게 훨씬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일병 성준형!"
"이거, 키가 먹통이 되었는데, 왜 그런지 한번 알아봐."
"예, 알겠습니다."
성준형도 지금 사단장이 1075대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단장 앞에서 유선이 먹통이 된 모습을 보이는 순간, 1중대 통신분과는 한 달 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탄약고, 탄약고!"
이강진이 했던 것처럼 성준형도 애타게 탄약고를 불렀다.
"이상하네, 선은 다 연결되어 있는데……."
불과 15분 전만 하더라도 멀쩡히 작동하던 키가 갑자기 말썽 이다.
하필이면 이때.
타이 밍이 너무 안 좋다.
한참을 그렇게 끙끙 앓던 성준형은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당직들에게 설명했다.
"행정반 거는 이상 없고…… 제가 보기에는 탄약고 쪽이 문제 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내가 탄약고하고 연락 끝낼 때,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났거든. 혹시 이거하고 연관이 있나?"
"아마 선이 빠져서 그런 거 같습니다."
어디까지 나 추측에 불과하지 만, 확률은 높았다.
서광수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합니까, 이강진 병장님!"
"뭘 어째. 이미 답이 나왔잖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직접 올라가서 해결하는 수밖에."
미션. 사단장이 탄약고 초소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가서 유선 문제를 해결하라!
성준형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이강진은 빠른 속도로 오르막 길을 향해 올라갔다.
사단장 일행은 천천히 걸어가고, 이강진 일행은 사력을 다해 뛰었다.
속도 차이가 있다 보니 금세 사단장 일행이 있는 곳까지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여 기서부터가 문제다.
탄약고 초소로 올라가는 길은 외길이다. 사단장 일행을 제치 고 올라갈 방법이 없다.
하나 이강진은 애초에 길을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옆쪽으로 빠져서 올라가자. 내가 앞장설 테니까, 넌 내 뒤만 따라와라. 잘못하다가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경사가 있다 보니, 한번 발을 삐끗하면 밑으로 떨어쩔 수가 있 다. 게다가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위험천만한 야간 산행을 스스로 자처하는 이강진.
미리 챙겨 온 낫을 꺼내 들었다.
'설마 한겨울에 제초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면 가끔 무인도, 혹은 야생에 떨어진 주 인공이 정글도를 가지고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장 면이 나오곤 한다.
이강진은 마치 그런 서바이벌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존이 목적이라는 점은 같았다.
어찌 보면 지금 이 행동도 생존을 위해서 하는 건 마찬가지니 까.
"준형아, 어둡겠지만 불은 절대로 켜지 마라.사단장님한테 발 각되는 순간,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예, 알겠습니 다……!"
대답도 작게 해야 했다.
직접 길을 만들면서 산을 오르고, 오르고 계속 올랐다.
탄약고 초소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올라왔다고 생각한 순간.
초소 쪽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으, 으아악!"
"누, 누구냐!"
갑자기 튀어나온 이강진과 성준형을 보고 놀란 모양인지 초 소 근무자들이 기겁을 했다.
이강진은 그제야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게끔 비줬다.
"나다."
"이, 이강진 병장님?"
"으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강진이 귀신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었다.
< 제89화. 실제 상황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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