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1) >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1)
얼마 남지 않은 이강진의 휴가일이 찾아왔다.
화요일 오전 아침부터 이강진은 개인 짐을 챙기며 휴가를 나 갈 준비를 서둘렀다.
가기 전에 화장실도 잠시 들르기로 했다.
소변기 앞에 선 이강진.
볼일을 다 마치고 나니, 이제는 소변기에서 물줄기가 시원스 럽게 흘러나왔다.
일요일 저녁에 단수 문제가 해결되었다. 단수 때문에 이강진 은 자칫 씻지도 못한 채 한지윤 앞에 설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두석이 이강진을 한번 살려 준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이강진.
이제는 휴가의 소중함을 깨달을 차례다.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작은 종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 휴가 갔다 오마."
"잘 다녀와."
"휴가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충성!"
"이강진 병장님! 어제 제가 사 와 달라고 했던 거, 꼭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강조를 하더니 오늘도 출발하기 전에 또다시 언급하는 최 영고의 태도에 이강진은 알았다고 말하면서 그를 안 심시 켰다.
행정반으로 들어서자, 이미 먼저 와 있던 김철이 이강진을 보 고선 손짓을 했다.
"강진아, 지금 트댁시 왔대. 빨리 와서 신고해."
"아, 그래?"
출근한 간부 중 아무나 붙잡고 신고를 하기로 했다.
"통신반장님! 저희, 휴가 나갔다 오겠습니다!"
"너희 둘이 같이 나가냐?"
"예, 그렇습니다. 지금 위병소 앞에 콜택시가 와 있다고 하는 데, 빨리 내려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려가 봐라. 행보관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 둘게."
"감사합니다!"
통신반장은 이럴 때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다.
빠른 속도로 위 병소를 향해 걸어…… 아니, 뛰어 가는 두 남자. 위병소를 통과한 뒤에 곧장 택시에 올라탔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 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1중대 막사에서 위병소까지의 거리가 제법 된다. 그 거리를 뛰어왔으니, 아무리 날씨가 춥다 하더라도 땀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동 중에 이강진과 김철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창 문을 내렸다.
초겨울 바람이 바짝 달아오른 두 사람의 얼굴을 빠르게 식혔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그러게."
말년 병장이 되었어도 부대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이건 아마 전역 때에도 같을 것이다.
다시 창문을 올린 김철이 이강진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가서 아점 하고 갈까? 아니면 바로 헤어질까?"
"사회에 나왔으니 밥은 꼭 챙겨 먹어야지."
"하긴, 그렇지."
휴가를 나오면 하루 3끼가 아니라 5끼도 먹을 수 있다. 그동 안 먹고 싶었으나 못 먹은 음식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었다.
시내에 도착한 이들은 어느 가게에 들를지 고민에 빠져들었 다.
이강진이 먼저 김철에게 선택권을 줬다.
"뭐 먹을래? 한식? 중식? 아니 면 일식?"
"내가 얼마 전에 괜찮은 쌈밥집을 찾았거든. 거기서 먹을래?
저번에 보니까 아침에도 문 열더라."
"혹시 수형이네 쌈밥집 아니야?"
"응? 너도 알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이곳 근처에서 맛있는 식당을 찾아 헤맨 지 언 4년 차.
이강진이 모르는 맛집은 없었다.
"거기 맛있지. 가자."
심지어 이강진은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까지 다 알고 있었다.
김철은 모르는 게 없는 이강진에게 이제 경외심마저 느낄 정 도였다.
가게에 앉자마자 김철은 이강진을 보면서 말했다.
"넌 진짜 다 아는구나."
"뭘?"
"군대에 대해서. 병영 생활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대 근처에 무 슨 맛집이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으니…… 진짜 대단하다."
사실 이강진이 원치 않은 대단함이었다.
전역한 후로 회귀했더라면 이런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을 것 이다.
그래도 어쩌랴, 입대 전날로 회귀해 버린 것을.
'군인이어도 해 둘 건 다 해 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전역을 대비해서 이강진은 이미 여러 가지 준비들을 다 끝내 둔 상태였다.
이제 마지막 과제만이 남았다.
무사히 전역하는 것.
이 과제를 클리어하면, 이강진의 본격적인 인생 2막이 펼쳐지 게 된다.
전역 이후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건 비단 이강진만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김철도 마찬가지다.
"웹툰 공모전 결과는 언제 나온대?"
"신청 기간이 다음 달 중순까지니까…… 결과는 나 전역할 때 쯤에 나오겠지. 수상, 입선하는 사람들은 미리 연락이 간다고 하 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연락을 주는지 모르겠어. 난 그런 경험 이 전혀 없으니까."
"이 번에는 하게 될 거야."
이강진의 말을 듣고서 김철은 활짝 웃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김철과 좀 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제육쌈밥 2인분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빠른 손놀림으로 크게 한 쌈을 만들었다.
쌈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김철이 깜짝 제안을 했다.
"강진아, 건배하자."
"건배? 술도 없는데?"
"이게 있잖아."
손에 든 쌈을 가리키는 김철.
건배가 아니라 쌈배였다.
이강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김철의 장단에 맞춰 주기 로 했다.
근 5개월 만에 온 쌈밥집.
입안에 있던 쌈을 꿀꺽 삼킨 이강진은 입맛을 다셨다.
'이곳에 올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이별의 순간.
이강진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병장 이강진으로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평소의 이강진이었더라면 김철과 헤어지자마자 바로 청주로 향하는 길에 올라섰을 것이다.
교통수단도 시외버스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이번 휴가는 시작부터 좀 특별했다.
전철을 타고 서울 강남역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지역답게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왕래하는 유동인구의 숫자가 많아 보였다.
이곳에 군복을 입은 이강진이 발을 들였다.
'이쪽 출구로 나와서 직진이었지.'
앞으로 쭉 걸어가던 이강진.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어느 상가 건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여기군."
이강진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작업에 여념이 없던 남자 들이 이강진을 보면서 외쳤다.
"젊은 청년! 여기, 공사 중이에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요!"
"아,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거 한 잔씩 마시면서 일하세요. 사람 숫자가 몇 명인지 구체적으로 듣지 못해서 일단 최대한 많 이 사 오긴 했으니 모자르진 않을 겁니다, 하하!"
불쑥 찾아온 군복 입은 남자가 이 런 말을 하니까 남자들은 당 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2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나두석.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들 중 유일하게 이강진을 반겼다.
"대표님!"
'대표'라는 칭호에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이곳 대표님이셨나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남자들을 향해 이강진은 작게 웃으면 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강진이라고 합니다."
군복을 입은 젊은 대표, 이강진이 먼저 이들에게 악수를 청했 다.
남자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와 한 번씩 악수를 나눴다.
이후 이강진은 나두석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향했다.
"아직 공사 마무리되려면 좀 멀었고, 일단 공간을 확장하는 작 업부터 진행 중입니다."
"넓고좋네. 여기가 몇 층까지였지?"
"3층입니다. 1, 2층은 일반 손님들 모시는 곳이고, 3층은 예약 자석만 따로 받는 공간으로 마련해 뒀습니다. 3층은 저번에 연 락드렸던 대로 룸 구조가 될 거예요."
"나중에 내가 이곳에 중요한 손님들을 모시고 올 수도 있으니까 방음 작업에 많이 신경 써 줘."
"중요한 손님이라면…… 혹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그런 분들 입니까? 아니면 엄청 유명한 연예인들을 데려오시는 건 아니겠 죠? 하하하!"
나두석은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강진의 반응은 나두석의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 었다.
"눈치 빠르네."
"……예? 지, 진짜로요? 형님 인맥이 고, 그 정도였습니까?"
농담이 진담으로 바뀌었다.
이강진은 그저 말없이 나두석의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평소에는 옆집에 사는 착한 이웃 형처럼 보이기만 하던 이강 진이었으나, 방금 한 말 덕분에 그가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 *
바라 식당 서울 지점 공사 현장에는 오호만도 와 있었다.
와이프와 통화하느라 잠깐 밖에 있었던 오호만은 뒤늦게 온 이강진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 현역일 때엔 너 군복 입은 모습 지겹도록 봤었는데, 오랜 만에 보네."
"앞으로는 볼 일 없을 거야."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강진의 말을 듣고서 오호만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그런 걸로 아쉬워하지 마. 어서 빨리 나 전역하기만을 기원 해 달라고."
"하하! 그래, 알았다, 인마."
나두석, 오호만과 함께 셋이서 바라 식당 서울 지점 공사 현 황을 직접 눈으로 체크한 이강진은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로 했다.
공사 현장 바로 옆에 2층 상가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바라 코리아의 디저트 브랜드, 티날레 본점이 될 곳이다.
이강진은 건물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 달에 저 가게 나가면, 바로 작업 착수하게끔 준비해 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원홍 씨한테 연락해서 혹시 선호하는 카페 인테리어 있는지 물어보고. 가게의 전반적인 색감이라든지 테이블 위치, 이런 거 말이야."
"그건 미리 다 확인해 뒀습니다."
역시 나두석이었다.
이강진이 말하기 전에 필요할 거 같다 싶으면 미리 다 준비를 해 뒀다.
덕분에 이강진은 마음 편히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다.
바라 식당 옆 티날레.
오호만은 이 두 가게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우리 바라 식당에서 밥 먹고, 옆에 있는 티날레로 와서 커피 나 차 한잔 하고. 시너지 대박이겠네."
"그거 노리고 일부러 티날레 본점을 바라 식당 옆에 세우게 한 거야.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운영하는 지점들 숫자가 많아지 면, 포인트 카드 같은 거 만들어 두려고. 바라 코리아 브랜드 가 게를 이용하면,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거야.
일정 포인트가 쌓이 면, 바라 식당이든 티날레든 아니면 나중에 추가될 우리 회사 요식 브랜드 가게에서 그 포인트를 원하는 만큼,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러면 시너지 효과가 더 커질 거야."
"오, 그거좋네!"
포인트 제도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이벤트도 주기적으로 열 생 각이다.
이런 마케팅 홍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한 명 있
'영혜 씨하고 슬슬 만나 봐야겠네. 그리고 인혁이 형도 조만 간 봐야겠고.'
휴가를 나왔을 때, 누구누구를 만나야 할지 머릿속으로 약속 일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에 이강진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이젠 말만 휴가지, 진짜로 휴가가 아니구나.'
오히려 부대에 있을 때보다도 더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강진이 만들어 놓은 판인데, 이강 진이 나 몰라라 한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업무를 떠나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문득 떠 올랐다.
'지윤 씨는 작품 잘 찍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며칠 전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그녀가 보고 싶었다.
<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