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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입대 전날-275화 (275/347)

<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3) >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3)

행정반을 나온 이강진은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통에 받아져 있는 물들을 보면서 이강진은 생각이 많 아졌다.

'이걸 내가 독점한다면, 샤워하는 데 지장은 없을 거 같은데.'

하다못해 3분의 1분량이라도 이강진이 혼자서 사용할 순 없 을까.

사실 가능은 하다. 이제 이강진은 1중대 최고참이 되었다. 짬 으로 밀어붙여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간부 말고는 없다.

하지만 그건 이강진의 방식이 아니었다.

여태껏 쌓아온 착한 선임 이미지를 이런 악행 한 번으로 전부 날리고 싶지 않았다.

물 때문에 서로 고생한다는 건 다들 잘 아는 사실이다. 이 와 중에 이강진 혼자만 살겠다고 물을 독점한다는 건 양심에 찔리 는 행동이다.

영화 중에서도 가끔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핵전쟁 때문 에 지구가 반쯤 멸망해버린 상황에서 귀해진 물을 차지하고자 인간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사태까지 치닫진 않겠지만, 그래도 문제 가 될 일은 맞다.

'그래,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자.'

뒤로 돌아서고 싶었으나, 줄렁거리는 물결이 마치 이강진의 마음속처럼 흔들렸다.

저 투명한 물에 몸 한 번 담가 봤으면…….

멍하니 물이 담긴 통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야, 이강진."

갑자기 누군가가 이강진의 어깨를 툭 쳤다.

화들짝 놀란 이강진은 뒤를 돌아봤다.

"처, 철이냐?"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누가 봐도 뭔 일이 있어 보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고민이라도 있어? 내가 해결을 해 주진 못해도, 들어주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반쯤은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혹여나 누가 들을까 봐 이강진은 김철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한숨으로 시작하는 이강진의 고민 털어놓기.

"실은 아까 지윤 씨한테 전화가 왔었거든."

"그래?"

그게 고민거리는 아닐 터.

한지윤한테 연락이 온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이강진을 고민하게 만든 건 통화 내용에 있다.

"내일 종교 행사 올 수 있다고, 괜찮으면 나도 볼 수 있냐고 물 어보더라."

"보면 되잖아."

"이 꼴로?"

"……아."

그제야 김철은 이강진이 품고 있는 고민거리의 정체를 알아 냈다.

병사들끼리는 본인을 포함해서 서로 다 안 씻고 사는 중이었 기에 크게 차이를 못 느끼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지금 1중대원 들을 눈앞에서 만난다면 바로 인상부터 찡그릴 것이다.

그 정도로 이들의 위생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강진이 한지윤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김철도 이미 알고 있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건데, 이런 몰골로 만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바쁜 일 있다고 하고서 교회 안 나가는 건 어때?"

"이미 나간다고 했어."

"왜 ?"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어."

구체적인 사정까지 김철에게 전부 공개하고 싶진 않았다.

교회는 무조건 가야 한다. 이게 전제 조건이다.

머리를 굴리던 김철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관사로 내려가서 씻고 오는 건 어때? 부소대장님한 테 부탁하면 되잖아?"

"부소대장님, 휴가 가셨어. 지금 부대에 안 계실 거야."

그리고 부소대장보다 이강진이 가장 굴리기 쉬운 인물은 통 신반장이다.

하나 통신반장은 관사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게다가 지금은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고 하고서 주 말 동안 부산에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통신반장은 본인의 여행을 포기하면서까지 이강진을 도와줄만한 사람은 아니다.

간부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애매한 상황.

그렇다고 이런 부탁을 행보관에게 할 순 없었다.

이강진처럼 김철도 같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애매하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부대 근처에서 살고 있는 지인 없어? 있다면 그 지인분한테 면회 와 달라고 해서 면회 외출 나가면 되잖아. 그때 가서 씻고 오면 되지 않을까?"

"있을 리가 없……."

도중에 말을 끊은 이강진.

부대 주변에 사는 지인은 없지만…….

내일 이 근처로 오게끔 부를 수 있는 지인은 있었다.

"고맙다, 철아. 덕분에 살았어!"

"응? 살았다니? 그 지인이 진짜로 있어?"

"없으면 만들면 돼!"

이강진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빠르게 막사로 향했다.

* * *

생활관에 들러서 전화 카드를 챙긴 이강진은 곧장 공중전화 박스를 찾았다.

누군가와의 통화를 마친 뒤.

행정반을 찾은 이강진은 행보관에게 갑작스런 보고를 했다.

"행보관님, 면회 외출 신청 좀 하려고 합니다만."

"면회 외출? 누가 오는데."

"제 친한 후배가 마침 어제 서울로 올라왔는데, 제 얼굴 보고 싶다고 내일 내려가기 전에 면회 온다고 합니다. 이름은 나두석 입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멀리서 왔다는데 안 된다고 할 수 도 없었다.

그리고 행보관은 평소에 이강진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이 정도 사정은 행보관의 재량으로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말해 봐라."

"이 친구가 글쎄, 내일 아침에 일찍 온다고 합니다. 한 8시 30 분쯤 오겠다고 하는데……."

"8시 30분?"

"예, 그렇습니다."

사실 시간 조정은 이강진이 한 거였다. 덕분에 나두석은 새벽 에 눈을 떠서 이른 아침에 숙소에서 출발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이강진의 연애 사업이 걸려 있다니 협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에 나두석과 만나서 함께 대중목욕탕으로 향한다. 거기서 목욕을 한 뒤, 종교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다시 부대로 돌아와서 교회로 간다. 그리고 한지윤과 만난다.

이것이 이강진의 계획이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행보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8시 30분이면 너무 이른데……."

"부탁드리겠습니다, 행보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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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이강진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이런 부탁은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결국 행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8시 30분이라고 했지?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마."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아침에 행보관이 당직이라는 소리를 듣고 최악의 하루라고 생 각했던 자신을 반성하기로 했다.

* * *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이강진은 아침을 대충 해결한 뒤에 곧장 전투복으로 환복했 다.

면회 외출을 나갔다가 곧장 교회로 가서 한지윤을 만날 예정 이기 때문에 미리 A급 전투복으로 환복했다.

오전 8시 30분.

결전의 때가 도래했다.

당직병이 생활관에서 대기 중이던 이강진을 찾았다.

"이강진 병장님, 면회 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강진은 쏜살같이 생활관을 벗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위 병소를 향해 뛰어가는 이강진.

어제 같은 경우에는 행여나 땀이 날까 봐 뛰는 것조차 꺼려했 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목욕탕에 갈 건데, 지금 땀이 나든 말든 그게 무슨 상 관이랴.

위병소에서 대기 중이던 나두석이 이강진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형님, 여기입니다!"

"바로 출발하자."

"예!"

차에 탄 두 남자는 빠른 속도로 시내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형 님 쓰시라고 샤워 타월하고 샴푸, 린스 같은 것도 다 사 뒀습니다."

"잘했어!"

역시 나두석이다.

무엇이 필요할지 굳이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 준비해 두는 눈치 빠른 동생을 둔 덕분에 이강진은 한결 편했다.

곧장 목욕탕으로 간 이강진은 탈의실에서 군복부터 벗어 버 렸다.

일단은 샤워부터.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몸 씻는 건 확실하게 해야 한다. 3일 동 안 거의 못 씻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두석아, 부대에서 목욕탕까지 차 타고 얼마나 걸렸었지?"

"한…… 30분 걸렸던 거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최소 9시 20분에는 나가야겠네."

10분 정도는 여유 시간으로 두고 싶었다.

평소라면 대중목욕탕에 온 김에 온탕에 들어가서 몸을 따뜻 하게 한 다음에 묵은 때를 밀었을 것이다. 시간이 된다면 중간 에 사우나도 한 번 들리고. 냉탕도 들어갔다가 나오고. 할 게 정 말 많지만, 지금은 샤워 한 번 하는 시간조차 아슬아슬했다.

탕에서 나온 이강진은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전부 닦아 냈다.

다시 전투복을 입고서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나두석은 그런 이강진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 평생 가장 짧은 목욕 시간이었던 거 같습니다."

"나도 그래."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大 A *

짧은 샤워를 마치자마자 이들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목욕탕 주인이 이들을 이상하게 쳐다봤지 만, 둘은 그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운전대를 잡은 나두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

"속도 좀 내겠습니다, 형님!"

오히려 이강진이 바라던 바다.

한참을 그렇게 달린 끝에 드디어 위병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교 행사까지 앞으로 5분밖에 남은 상황.

아슬아슬하게 부대에 도착한 이강진은 다시 나두석을 떠나보 냈다.

"고맙다, 두석아! 화요일에 휴가 나가면 내가 맛있는 거 살게!"

"비싼 거 사 주세요, 형 님."

"당연하지! 조심해서 내려가라!"

"예!"

나두석을 보낸 뒤에 이강진은 빠른 속도로 위병소를 통과했 다.

조장 근무자는 이강진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아저씨, 나간 지 2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오셨네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여기, 출입자 명단 작성 다 끝났어요. 그리고 잠깐 키 좀 써도 되나요?"

"네, 쓰세요."

이강진이 연락을 취한 곳은 바로 1중대 행정반이었다.

-통신보안. 상병 권수혁입니다.

"수혁아, 나, 강진인데."

-충성! 이강진 병장님, 벌써 부대로 복귀하셨습니까? 면회 외 줄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사정이 있어서 그래. 아무튼 나, 여기서 바로 종교 행사까지 참여한 다음에 애들하고 같이 막사로 올라갈 거니까 당직사관 님한테 그렇게 전해 둬라."

-예, 알겠습니다.

그냥 막사로 복귀해서 편히 쉬면 될 거 가지고, 굳이 귀찮게 종교 행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권수혁은 이강진의 행동이 이 해가 안 될 것이다.

애초에 면회 외출을 나갔던 이유가 오늘 있을 종교 행사 때문 이었다.

교회 문 앞에 선 이강진은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좋아, 완벽해."

오히려 평소보다 더 깔끔해 보였다.

문을 열고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1중대원들은 그런 이강진을 보고서 눈을 의심했다.

"이강진 병장님?"

"아니, 왜 여기에 계십니까?"

"면회 외출 나가셨던 거 아닙니까?"

이강진은 단체로 의구심을 드러내는 후임들을 애써 진정시켰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돌아왔지, 하하하!"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렇게까지 웃기진 않았다.

후임들은 '저분이 오늘따라 왜 저러신대?' 하는 눈초리로 이 강진을 쳐다봤다.

사실 종교 행사가 목적이 아니다.

피아노 앞에서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여인, 한지윤을 보기 위 해서다.

때마침 한지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보면서 싱긋 미소 짓는 두 사람.

병사들 앞에 선 목사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기도합시다."

그 말에 따라 이강진은 눈을 감고 두 손을 얌전히 모았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신께 감사를 표했다.

'무사히 종교 행사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 다, 아멘.'

<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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