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1) >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1)
사람이 절망을 느낄 때, 가장 잔혹한 경우가 있다.
바로 보이던 희망이 사라졌을 때다.
그런 경우에 보다 더 큰 절망감을 느낀다.
이강진은 이번 생에서만큼은 두 번째 혹한기를 건너 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엔 이강진이 전역하고 난 후 혹한기가 진행될 거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군 생활 진짜 좆같네.'
입에서 온갖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이강진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행보관과 소대장 앞에서 갑자기 욕을 내뱉으면 큰일 이기 때문이었다.
소대장이 이강진을 이상하게 봤다.
"이강진, 갑자기 수첩을 왜 떨어뜨려. 몸이라도 안 좋아?"
"벼, 병장 이강진. 아, 아닙니다…… 어휴……."
깊은 한숨은 보너스였다.
한편 다른 분대장들은 이강진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이강진을 바라봤다.
이번 일은 아무리 이강진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 다.
그냥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혹한기 일정이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백우호는 하늘이 무 너진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거,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 멀쩡하던 혹한기 일정이 왜 갑자기 바뀌냐고!"
"낸들 알겠냐. 아무튼 소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너 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망할!"
짓궂은 운명의 장난에 할 말을 잃었다.
혹한기도 혹한기지만, 그전에 치를 올해 마지막 행군도 문제 였다.
이강진은 식사 집합 전에 분대원들을 모아 오늘 가졌던 회의 의 내용을 전부 공개했다.
특히 행군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조은석은 혹한기 일정 소식을 들은 백우호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행군이 죽도록 싫은 조은석이었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 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는 막내인 허인강을 돌아봤다.
"인강아,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 같다."
"자대 행군은 많이 빡십니까?"
"당연하지! 훈련소에서 했던 거하고 비교도 하지 마라. 저번 행군은 어땠냐면……."
'나 때는 말이야화법을 구사하려고 하려던 찰나였다. 이강진이 도중에 조은석의 말을 끊었다.
"인강이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은석이, 넌 너만 걱정하면 돼."
백우호 다음으로 행군에 최적화된 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 바로 허인강이다.
실제로 그는 훈련소에서 받은 주간, 야간 행군에서 그렇게까 지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냥 무거운 거 짊어지고 좀 오래 산책을 나가는 그런 기분이 었다.
노가다로 다져진 체력을 얕봐선 안 된다.
"주간 행군 아니고 야간 행군이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 리고 요즘 날씨 많이 추워지는 거 알지? 내복도 슬슬 꺼내 입고. 행군 전날에 감기라도 걸리면 본인 손해니까 건강관리 잘하도 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슬슬 본격적인 겨울 시즌이 도래하고 있었다.
모포만으로는 더 이상 추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이제 침낭을 기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 분대원들에게 말하는 이 순간에도 생활관에 한기가 감 돌았다.
전달 사항을 전부 끝낸 이강진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백우호도 이강진의 뒤를 따랐다.
"화장실 가냐? 나도 같이 가자."
이들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독 무거웠다.
이유는 뻔했다.
"강진아, 혹한기 어쩌냐?"
이강진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별수 없다.
아무리 이강진이 날고뛰는 병사라하더라도훈련 일정까지 마 음대로 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건 아니었다.
잘하면 혹한기 훈련 한 번 짬 처리할 수 있었는데. 아쉽지만, 그래도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백우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한기 때 말년 휴가 써 버릴까? 그러면 훈련에서 빠질 수 있 잖아."
"우리 대대장님 스타일, 너도 알잖아. 말년이라고 훈련 빼 주고 그런 거 없어."
"하긴.…."
훈련에 한해선 대대장이 소대장보다도 더 원리와 원칙을 중 시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다.
말년 휴가로 혹한기를 빠지 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하는 게 낫 다.
이렇게 된 이상, 이강진은 죄악에 죄악의 경우만큼은 어떻게 든 피해야만 했다.
'혹한기 받기 전에 분대장만큼은 운상이한테 인수인계해야겠 어!' 훈련을 받게 된 것만으로도 상당히 짜증나는데, 그때까지도 초록 견장을 달고 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전에 분대장을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면서 소변기 앞에 섰다.
볼일을 다 보고 난 뒤에 다시 바지춤을 올린 이강진.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왜 물이 안 나오지?"
소변기에서 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이강진은 자신이 사용한 소변기가 고장 나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백우호가 사용한 소변기도 마찬가지로 물이 나 오지 않았다.
두 개가 동시에 고장 났을 리는 없다.
이강진은 곧장 세면대로 향했다.
물이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수도꼭지조차도 감감무소식 이 었다.
"강진아, 세면대 물도 안 나와?"
"어, 이거, 보니까...... 동파된 거 같은데?"
요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싶더니,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 * *
막사에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 소식을 접한 행보관은 공병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 면서 수도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1시간 뒤, 다시 한번 분대장들이 소집되었다.
"동파 때문에 당분간 물 사용은 어려울 거 같다."
이강진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들어 보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본부중대하고 2중대, 3중대도 지금 동파 때문에 난리라고 하더라."
예고도 없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간부들이 사용하는 관사는 무사하다는 거 였다.
"병력에게 전해라. 당분간 막사 내 화장실 사용은 금지라고.
볼일 생기면 야외 화장실 쓰고, 씻는 건 가벼운 세면만 허락하 겠다."
"상병 오훈정, 질문 있습니다."
행보관은 말해 보라는 식으로 그를 응시했다.
"물이 안 나오는데, 세면이 가능합니까?"
"근처 마을에서 물을 공급받기로 했다. 대신, 매우 한정된 양 이니까 아끼고 아껴서 써야 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위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건 가능해 도, 샤워 같은 건 안 된다.
"일단 업자 불러서 견적을 짜 봐야 구체적으로 알 테지만, 3 일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그때까진 불편해도 참아 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몰래 한숨을 삼켰다.
혹한기 때문에 안 그래도 뒤숭숭했던 마음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 * *
일시적으로 단수 현상을 겪게 된 1075대대.
사실 씻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여름처럼 막 땀이 나는 그런 계절도 아니고 말이다.
빨래도 3일만 미루면 된다.
정수기 문제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행보관이 병사들 과 함께 차를 타고 다량으로 식수를 구입해 왔기 때문이었다. 목 이 마른 사람은 물을 떠다 마시기만 하면 된다.
다 괜찮다. 하지만 유일하게 괜찮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1075대대에는 각 중대별로 야외 화장실을 두고 있었다. 단수 때처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미리 설치해 둔 곳이다.
평상시에는 야외 화장실을 이용할 일이 없다. 밖에서 작업을 하다가 막사까지 미처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급한 용무가 아니 면, 대부분은 막사 내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한다.
실내 화장실과 야외 화장실은 시설 자체가 하늘과 땅만큼 엄 청난 차이가 난다.
야외 화장실은 옛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푸세식 화장실이다.
악취, 위생 등등 온갖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니 야외 화장실이 인기가 없는 게 당연했다.
하나 단수 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애초에 야외 화장실밖에 쓸 수가 없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불 편함을 감수하면서 야외 화장실로 향해야만 했다.
제대로 된 소변기도 없다. 한쪽 벽면을 바라보면서 소변을 해 결해야만 했다.
기운상과 함께 야외 화장실로 오게 된 조은석은 기겁을 했다.
"윽, 냄새……. 우리 부대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사실 나도 두세 번 정도밖에 안 와 봤어."
기운상조자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다.
병사들이 기피하는 장소 중에서도 독보적인 순위를 자랑하는 야외 화장실.
들어가자마자 냄새가 진동했다.
비명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악취가 심했다. 소변 볼 때에는 잠깐만 참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변을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조은석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화장실 칸을 힐긋 바라본 조은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에 저기서 볼일 어떻게 봅니까?"
"몰라. 난 단수 문제 해결될 때까지 무조건 참을 거다."
투 스타의 아들도 야외 화장실의 위엄 앞에선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3일 동안 배변 활동을 참을 순 없었다.
원래 생리 현상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찾아올 때가 많다.
소변을 보고 야외 화장실로부터 탈줄(?)하는 두 사람 앞에 헐 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곽분섭이었다.
그의 얼굴 표정만 봐도 이곳에 어떤 용무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기운상은 씨익 웃었다.
"큰 거냐?"
"이, 일병 곽분섭……. 그, 그렇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꽤 큰 게 왔음을 직감했다.
"안에 벌레들 많으니까 조심하고. 어두우니까 위에 전등 켜고 볼일 봐라."
"알겠습니다!"
급하면 악취든 뭐든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일단 큰 거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이 몸을 지배하 게 된다.
사실 곽분섭도 기운상이나 다른 병사들처럼 단수 기간 동안 참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참아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신호 때문에 그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곽분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 신이시여……!"
눈을 질끈 감은 곽분섭.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재촉했다.
* A *
생활관으로 돌아온 기운상과 조은석은 한쪽 구석에 쌓여 있 는 물티슈들을 바라봤다.
기운상이 물티슈의 산을 가리키고서 성태강에게 물었다.
"태강아, 이거 뭐야?"
"아, 그거 말입 니까? 저희, 단수된 동안 얼굴이나 발, 손 씻을 일 있으면 사용하라고 놔둔 겁니다. 중대장님께서 사 오셨습니다."
단수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세삼 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쌓여 있는 물티슈들을 보면서 기운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티슈 말고 동파 문제나 빨리 해결해줬으면 좋겠는데……."
"3일만 참으면 됩니다."
다른 병사들에 비해 성태강은 낙천적이었다.
"넌 그래도 버 틸 만한가 보네?"
"제가 입대하기 전에 정글에 가서 생존하는 프로그램을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물티슈로 웬만한 건 다 해결하고 그 랬습니다. 그때는 진흙탕 물로 샤워하고 그랬습니다."
알고 보니 성태강은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었다.
성태강의 과거 촬영 썰을 들으면서 기운상과 조은석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업들이 괜히 경력자를 찾는 게 아니네.'
< 제87화. 그녀를 만나는 자세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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