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5화. 뒤바뀐 입장 (2) >
제85화 뒤바뀐 입장 (2)
오랜만에 라인혁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이강진은 어머니가 준비를 끝낼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고민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강진이냐? 형이야.
"형이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야? 그보다 나, 휴가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
누가 알려 주기라도 한 걸까.
전화 걸어온 것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호만이한테서 들었지. 오늘 호만이 결혼식 있잖아. 너, 설마 몰랐냐?
"모를 리가 없지. 나 결혼식에 직접 가기까지 할 건데."
-그럼 그렇지. 저번 달에 호만이한테 청첩장 받았거든. 그래 서 나하고 준렬이하고 지웅이, 필중이. 이렇게 넷이서 지금 청 주 내려가는 중이거든. 너 왠지을 거 같아서 식장에서 보자고 미리 연락한 거야.
이들까지 올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쭉 알고 지내온 사이도 아니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어쩌다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을 뿐인데, 오호만의 결혼식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겠다고 하니 의리가? … 아니, 전우애가 물 씬 느껴졌다.
-결혼식 1 시 30분이지? 너는 몇 시쯤 올 거냐? 우린 결혼식 시 작하기 20분 전에 도착할 거 같은데.
"나는 좀 더 일찍 도착할 거 같아. 인사 드려야 할 사람들이 많 거든."
오호만과 같은 직장이다 보니 대부분은 이강진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다.
-알았다, 그럼 우리 도착하면 연락할게. 조금 있다 보자.
"천천히 내려와. 안전 운전하고."
-그래, 안 그래도 지금 지웅이가운전 중인데, 이 새끼 초보 운 전이라서 불안해 죽겠……! 야야야! 옆에 차 있잖아! 차선 변경할 때 사이드 미러 보고! 깜빡이 켜고! 그러고 변경하라고! 우리 다 죽일 셈이냐!
자칫 잘못했다가 예식장이 아닌 황천길로 갈 뻔했다.
이강진은 쓴 미소를 지으면서 이들의 무사를 기원했다.
청주 외곽에 위치한 예식장.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물 안과 밖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강진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3층으로 올라가면 돼요.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타요."
"그러는 게 좋겠구나."
한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꽉 찼다.
띵
3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한꺼 번에 우르르 내렸다.
이강진은 어머니와 함께 1 번 홀로 이동했다.
일찍 나와 있던 오호만이 두 사람을 반겼다.
"아주머님! 강진아! 여기!"
양손을 붕붕 휘두르면서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렸다.
왁스로 단단하게 머리를 고정시킨 오호만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나도 달랐다.
깔끔하고 단정했다.
이강진의 어머 니는 오호만을 보고서 작게 웃었다.
"매번 주방에서 앞치마 두르고 일하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옷 차려 입은 모습을 보니까 신선하네, 호호! 훤칠하고 잘생겼 어!"
"감사합니다, 아주머님. 강진이, 너도 힘 많이 주고 왔네?"
"형 결혼식인데, 대충 할 순 없지. 마음 같으면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도 하고 오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쉽네."
"하하하! 왜, 그 머리도 잘 어울리는구먼!"
"기쁜 날에 그런 끔찍한 농담은 피해 줘."
군인 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 이강진.
듣기만 해도 소름이 절로 끼쳤다.
"오늘 형들 온다며? 아까 집에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나한테 연락 왔어."
"아, 그래? 몇 시쯤 온대?"
"1 시 10분. 근데 좀 늦을지도 몰라. 지웅이 형이 운전하고 온다는데 그 형, 초보 운전이래."
"그럼 더 늦어지겠네. 알려 줘서 고맙다."
"천만에."
인사를 마친 뒤에 이강진은 어머 니와 함께 축의금 봉투가 있 는 곳으로 향했다.
미리 현금 인줄기에서 뽑아 온 돈을 봉투 안에 넣은 뒤, 신랑 측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강진에게 봉투를 건네받은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척 봐도 봉투가 엄청 두툼해 보였다.
상당한 양의 금액임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 식권 몇 장 드릴까요?"
"2장 주세요."
"알겠습니다!"
돈 주는 사람이 곧 왕이다.
많이 주는 사람은 왕 중의 왕이다.
이강진은 어머니가 받을 식권까지 챙겨 왔다.
"엄마, 여기 식권이요."
"고마워, 난 신부 얼굴 보러 갔다 올게."
"천천히 있다 오세요."
그사이에 이강진은 바라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근데 민수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
"밖에서 대본 연습하고 있어요. 아까도 보니까 사장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더라고요."
"가서 응원 좀 해 줘야겠네요."
황민수가 있다는 곳으로 향해 밖을 나섰다.
흡연 구역 바로 옆에서 대본을 들고 서 있는 황민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가, 강진이 왔구나."
여러 차례 헛기침을 하는 황민수.
"감기 걸리셨어요?"
"아니, 목 좀 풀려고. 죽겠다, 죽겠어. 설마 내가 주례 같은 걸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뭐,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연습은 잘 되어 가고 있어요?"
"전혀."
직원이 제보한 대로 황민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히 자신이 실수라도 했다가 소중한 제자의 결혼식을 망치 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 부담감이 황민수의 어깨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이강진은 그런 황민수의 굳은 어깨를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저씨. 그러면 잘될 것도 안 된다고 하잖아요? 평상시 직원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담 없이 하세요."
"직원들 대하는 것처럼 하면 큰일이지."
요리에 대해서 만큼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황민수였기에 정 말로 그렇게 했다간 시작하자마자 바로 쓴소리부터 날릴지 모 른다.
모두가 오호만 부부를 축하해 주러 왔는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면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물 갔다 드릴까요?"
"아니, 됐다. 이미 3병이나 마셨어."
"결혼식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 꼭 다녀오세요."
"그래야지!"
긴장하는 황민수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황민수의 연습을 도와주려 던 찰나였다.
멀리서 이강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진아! 이강진!"
라인혁 일행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이강진과 오호만은 분명 이들이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올 거 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을 뒤집고 오히려 10분 일찍 도 착했다.
라인혁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너무 답답해서 그냥 내가 직접 운전하고 왔어."
라인혁은 운전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초보 운전자에 비하면 헐씬 안정적이고 빠르다. 운전자를 교체한 덕분에 이들은 도착 예정 시간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이강진은 안준렬과 황지웅 그리고 고필중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형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다들 살이 많이 찐 거 같은데?"
날씬하던 고필중도 뱃살이 제법 나왔다.
"군대하고 다르게 먹고 싶은 음식 마음껏 먹으면서 지낼 수 있으니까. 그러는 넌, 어째 살이 더 빠진 거 같다?"
"난 한창 고생할 때니까."
"아직도 분대장 차고 있어?"
"어, 행보관님하고 중대장님이 계속 나보고 차고 있으라고 압 박 넣더라고."
"차기 분대장이 운상이었던가?"
네 남자는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이 간부였어도 기운상이 분대장을 다는 시기를 최대한 미 루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 능력이 좋아도 문제다.
특히 군대는 더욱 그렇다.
"근데 강진아, 옆에 계신 분은 누구야?"
조용히 있던 안준렬이 황민수를 힐긋 보면서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들하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느라 소개가 늦 었다.
"오늘 주례 맡아 주실 분, 바라 식당 사장님이셔."
"아, 이분이……! 처음 뵙겠습니다. 강진이 선임이었던 안준렬 입니다."
안준렬을 시작으로 라인혁, 황지웅, 고필중까지 차례대로 자 신을 소개했다.
인사도 나눴으니, 이강진은 선임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 기로 했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는 황민수인데, 연습까지 방해할 순 없 기 때문이었다.
"민수 아저씨, 힘내요. 엄마랑 같이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 그래! 미영 씨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 보여 줄 순 없으니 까!"
마지막으로 이강진은 황민수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줬다.
이제 나머지는 황민수의 몫이다.
오늘부로 품절남이 될 예정인 오호만은 오랜만에 만나는 군 대 선임들과 인사를 나눴다.
"먼 곳까지 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짜샤! 우리가 누구냐. 전우 아니냐, 전우, 하 하!"
전역했어도 이들의 전우애는 여전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들은 미리 식장 안에 들어가 있 기로 했다.
오랜만에 뭉쳤으니, 이들의 근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필중이 형하고 지웅이 형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우린 뭐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지내고 있지. 지웅이는 편의점 알바, 나는 고깃집에서 알바."
"그래서 필중이 형 배가 이렇게 많이 나왔구나."
"고기는 인생의 진리지."
다른 사람들의 근황도 궁금했다.
안준렬은 하던 일을 관두고 석사 과정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게 끝나면 곧바로 박사 학위에 도전할 거라고 말했다.
왠지 안준렬과 어울리는 인생 테크 트리였다.
라인혁은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요즘 골치 아파 죽을 거 같다."
"형은 요즘 무슨 일 하는데? 전에 다니던 회사는?"
"관뒀어. 지금은 CA에서 일하는 중이고. 어딘지 알지?"
"편의점 브랜드잖아? 우리 집 근처만 하더라도 한 3개 있던 데."
"잘 아네. 하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지."
예상과 다르게 좋은 곳에 취직했다.
"대기업 들어갔네. 축하해, 형!"
"성공은 무슨."
직장만 들으면 아무 고민이 없을 거 같아 보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못 버티겠어. 그래서 조만간 사직서 내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기에 형이 못 버티겠다는 말을 하는 거야?"
이강진이 아는 라인혁은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그런 남 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기가 있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고 버티는 타입이었다.
그런 라인혁이 퇴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점 관리 업무. 지점 돌아다니면서 재고 일일이 다 확인하 고, 매출 체크하고 그러는데, 지점장들하고 만날 때마다 스트레 스야. 나도 내 사정이 있고, 지점장들도 지점장들 사정이 있다 는 건 아는데, 그렇다고 회사가 일일이 그런 것들 다 헤아려 주 는 것도 아니고. 피곤하다, 피곤해, 어휴!"
여기까지 와서 일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스트레스만 더 쌓 일 뿐.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곤 한다.
'지점 관리라
생각에 잠긴 이강진이 잠시 양해를 구했다.
"나 전화 한 통화만 하고 올게."
5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이들에게 돌아온 이 강진.
그가 대뜸 라인혁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형,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볼래?"
라인혁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다른 이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우리 회사 너 회사 차렸냐?"
"어, 바라 코리아라고, 요식업 관련 회사야. 바라 식당도 우리 회사가 운영하는 브랜드 중 하나고. 나중에 카페 쪽도 하나 오 픈할 건데, 이건 나 전역하고 나서 하게 될 거 같아. 어때? 대신, 면접은 봐야 해."
"음…."
옛 전우 결혼식에 와서 이직 제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안준렬이 옆에서 이강진을 옹호했다.
"강진이가 모난 후임은 아니었잖아? 네 월급 떼어먹을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퇴사할 거면, 한 번 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고필중과 황지웅도 안준렬과 같은 반응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그래, 알았어. 면접 본다고 돈 드는 거 아니니까."
현명한 선택이 될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될지.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제85화. 뒤바뀐 입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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