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2화. 후임 군종병 (4) >
제82화. 후임 군종병 (4)
하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곽분섭은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 그는 아침 점호를 마친 후에 3생활관으로 향했다.
"최일근 병장님, 식사 하시 러 가십니까?"
"식사? 왜?"
"오늘 최일근 병장님하고 저하고 같이 7시 근무입니다."
"아, 그거 바뀌었어."
"잘 못 들었습니 다?"
갑자기 근무가 바뀌었다는 말에 곽분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 저녁, 자기 전에 확인했을 때만 하더라도 곽분섭은 최일 근 병장과 근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근무가 바뀌었을까.
"공찬이가 근무 바꿔 달라고 하더라고. 공찬이랑 같이 식당 내 려가면 된다."
"아……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왜 바꿔 달라고 한 건지는 곽분섭도 대충 알고 있었다.
'PX병 때문이겠지.'
오늘 오전 근무는 아무래도 좀 길게 느껴질 것 같다.
* * *
탄약고 초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공찬은 곽분섭에 슬쩍 물 었다.
"어때, 생각 좀해 봤어?"
"죄송합니다.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해. 내일까지 시간 있으니까. 근데 이 건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서공찬이 방탄모를 벗으면서 물었다.
"군종병은 왜 되고 싶어 하는 거야? 너, 사회에 있을 때 무교 였다며. 포상 휴가가 필요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만약 포상 휴가가 목적이라면, 그거 포기하고 PX병 하는 게 좋을 거야.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고. 그리고 나도 있으니까 PX에서 야구 이야기로 노가리나 까면 돼. 먹고 마실 것도 충분 히 있으니까. 뭣 하면 내가 자주 쏠게! 형, 이래봬도 돈 많다?"
"하, 하하하.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사실 서공찬과 야구 이야기를 나누면 재미있다. 군 생활의 활 력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곽분섭에겐 활력소가 한 개가 아니었다.
최다연. 일주일에 한 번 그녀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곽분섭은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다.
곽분섭의 뒷모습을 힐긋 바라본 서공찬.
결국 그가 먼저 칼을 빼들기로 했다.
"오늘 PX병 체험 한 번 해 볼래?"
"제가…… 말입니까?"
"어, 안 그래도 본부중대 쪽 PX병 아저씨가 휴가를 내서 오늘 일손이 좀 필요했거든. 행보관님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한 번 해 볼래?"
나쁘진 않은 제안이다.
결정하더라도 미리 한 번씩 체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 각이 강하게 들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아리도 비슷하지 않은가. 어느 곳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해 봐야 '아,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음에 들면 바로 가입 신청서 쓰면 된다.
군대도 비슷하다.
직접 작업병 체험해 보고, 손에 맞는다 싶으면 보직을 인수인계 받으면 그만이다.
'PX에 가서 하루 일한다고 이강진 병장님이 뭐라고 하시진 않을 테니까.'
결정을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근무 끝나고 생활관에서 대기하고 있어. 행보관 님한테 보고 끝나면 나하고 같이 PX로 내려가자."
처음 경험해 볼 PX병 업무에 곽분섭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 거림을 느꼈다.
* * *
작업 도중에 잠시 생활관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는 걸 떠오른 이강진.
"손목시계가 어디 있더라……."
한지윤이 선물로 준 디지 털시계를 찾으려고 왔다.
잘 때를 제외하곤 항상 차고 다녔던 시계를 잠시 깜빡하고 두 고온 것이다.
"잃어버리면 큰일이지……. 찾았다."
관물대 안쪽 깊숙한 곳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차고 다시 사열대로 향했다.
그 순간.
낯익은 뒷모습을 보고 말았다.
곽분섭.
그리고 옆에는…….
'서공찬 병장인가.'
두 사람이 어디론가 바삐 내려가고 있었다.
방향으로 봤을 때에는 위병소 쪽으로 가는 듯했다.
위병소 근처에 있는 시설은 몇 개 없다.
조장실, 면회실 그리고…….
"PX 가나 보군."
얼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서공찬 병장이 PX병 일일 체험이라도 시켜 줄 생각인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서공찬 병장은 영악한 면이 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인 만큼 곽분섭을 어떻게 하면 자신 의 밑으로 데려올 수 있을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곽분섭이 군종병이 아닌 PX병을 택해도 사실 이강진은 크게 상관없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일부러 곽분섭과 서공찬, 두 사람 사이에 숨 겨진 내막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선택은 곽분섭의 몫이지, 이강진이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순 없다.
"내일쯤 결정알 거라고 했었지."
이강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하나 정말로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사실 이강진에겐 필살기가 하나 있었다.
그걸 사용하기만 하면, 곽분섭의 마음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
"목사님이 분섭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면 그냥 PX병 고 르게끔 했을 텐데."
이강진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곽분섭을 마음에 들어 했던 목 사의 그 반응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쩔 수 없지."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분섭아, 미안하지만 너는 그냥 군종병 해야겠다."
이렇게 된 이상, 이강진도 서공찬처럼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 * *
서공찬이 말했던 것 이상으로 PX병의 업무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수량이 맞는지 체크하고, 계산대에 앉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 기만 하면 된다.
가끔 휴게실 청소도 하곤 했지만, 일과 시간에 휴게실을 사용 하는 병사는 없었기에 청소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때, 편하지?"
"세상에…… 군대에 이런 보직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크큭, 그렇지? 뭐, PX병이라고 항상 쉬운 일만 하는 건 아니 긴 해. 바쁜 날은 바빠. 물건 들어올 때가 제일 바쁘지. 아니면 수량 체크하는데 펑크가 나거나 이럴 때는 징계 받을 각오도 하 긴 해야 하는데, 자기가 일만 잘하면 트러블 생길 일 없어. 적어 도 난 그런 적 없었거든."
"그렇습니까."
"아, 이것도 있네."
갑자기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오른 걸까.
서공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가끔 간부들이 와서 행패 부릴 때가 있어."
"어떤 행패입니까?"
"외상으로 달아 달라느니, 왜 자기가 찾는 거 안 들여놓았냐 느니 하는 거 말이야. 특히 본부중대 쪽에 트러블메이커들이 많 아. 그런 간부들은 조심해야지."
PX병의 몰랐던 고충도 동시에 알게 되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는 법이다. PX병도 분명 힘든 점은 있다. 그래도 PX병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을래? 초코 파르페 딱 두 개 남은 거 있는데. 어때? 내가 사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1075대대 PX의 명물, 초코 파르페.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동이 나는 물품이기도 하다.
둘이서 나란히 초코 파르페를 하나씩 든 채 의자에 앉았다.
그 과중에서 곽분섭은 열려 있는 PX 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 다.
밖에서 땀을 잔뜩 흘리며 벌목 작업을 하고 있는 타 중대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병이나 되는 녀석이 톱질 하나 제대로 못하냐!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작업 끝내고 갈 생각이야!"
"죄송합니다! 금방 마무리 짓겠습니다!"
선임들의 닦달에 일병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같은 일병이어서 그런 걸까.
동질감이 느껴졌다.
'어후……!'
자기가 갈굼당한 것도 아닌데 몸이 오랫동안 참았던 소변을 본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서공찬이 일회용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술 퍼면서 물 었다.
"어때, 분섭아. PX병, 좋지? 이렇게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PX병의 특권이지."
"그런 거 같습니다."
"네가 왜 군종병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는 앞으로 없어. 기회가 왔다 싶으면 무조건 잡아야지, 못 잡으면 개고생 하는 거야."
서공찬의 말이 맞다.
이건 기회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곽분섭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 * *
오늘 하루, PX병 체험을 하고 돌아온 곽분섭.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드디어 결심을 내리기로 했다.
'그래, PX병으로 가자!'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사랑에 매달릴 바에야, 확실하고 안정적 인 PX병을 고르는 게 좋아 보였다.
'그리고 굳이 군종병이 아니더라도 다연 씨는 볼 수 있잖아?'
비록 최다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는 훨씬 줄어들 테지만, 그래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이제 다음 숙제를 풀어야 할 차례다.
"이강진 병장님."
이강진에게 직접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
군종병 대신 PX병을 택하게 되었다고.
이강진이 굉장히 실망할 것이다. 굉장히 미안한 일이지만, 그 래도 한 번은 겪어야 할 괴로운 경험이라면 빨리 하는 게 좋다.
"어, 왜?"
"저기…… 드릴 말씀이……."
"군종병 때문에 그래?"
"……예, 그렇습니다."
절로 숙여지는 고개.
이강진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강진은 씨익 웃었다.
"잘됐네. 나도 슬슬 너한테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말을 이으려고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당직사병이 1생활관을 방문했다.
"곽분섭, 전화 왔다."
"일병 곽분섭!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통화 끝나고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냐."
이강진은 기다리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행정반으로 간 곽분섭은 곧장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십중팔구 부모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병이 되었어도 주에 한 번은 이런 식으로 계속 부대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엄마? 저, 지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중에 말을……."
- 여보세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곽분섭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섭 씨인가요?
"그, 그렇습니다만…… 누구세요?"
자신이 아는 지인들 중에서 이렇게 젊고 아리따운 목소리를 지닌 여자는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는 아닐 터.
여성은 작게 웃으면서 스스로 이름을 밝혔다.
-저예요, 최다연.
"다, 다연 씨?"
사랑의 기적이 벌어졌다.
* * *
10분 뒤.
곽분섭은 하늘을 나는 듯한 표정으로 생활관에 복귀했다.
그를 보자마자 이강진이 손짓을 하며 불렀다.
"분섭아, 아까 나한테 뭐 이야기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일병 곽분섭! 그게? … 군종병 빨리 인수인계 받았으면 해서 그렇습니다!"
원래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하나 최다연의 전화 한 번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좀 더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독교 군종병을 무조건 맡아야 한다.
이강진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내일 바로 인수인계할까?"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 패기다. 군종병 일할 때에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심히해라."
"맡겨만 주시기 바랍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곽분섭의 목소리에 1분대원들은 이상 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곽분섭은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이 이강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 제82화. 후임 군종병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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