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후임 군종병 (3)
"저한테…… PX 보직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마. 그리고 목소리 좀 줄어라. 다른 사람들 듣겠다."
"죄, 죄송합니다."
작업 병을 물려주는 일은 은근히 민감하다.
서로 내가 갖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 등 이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속으로 정한 후임이 있다면, 조용 히 인수인계를 하는 게 최고다.
서공찬은 다른 후보를 찾을 것도 없이 곧장 곽분섭에게 자신 의 PX병을 물려주려고 했다.
"우리 분과 애들이 PX병 받고 싶다고 나한테 은근슬쩍 어필 하는데도 다 무시하고 너를 1순위로 정한 거야."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가……."
"당연히 있지."
서공찬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내가 너한테 우스갯소리로 한 말 있잖아. 전역 때까지 군 생 활 심심하게 보내다가 전역할 뻔했다는 거. 근데 그거, 진심이 야. 네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내 군 생활에 뭐랄까…… 활력소라 는 게 생겼거든. 나 원래 말 많은 사람 아니라는 거, 잘 알지?"
"예, 알고 있었습니다."
곽분섭은 믿지 못했지만, 다른 병사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서공찬은 과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서공찬이 곽분섭만 만나면 수다쟁이가 되었다.
그만큼 곽분섭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는지를 나타내는 셈이 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후임.
서공찬은 곽분섭을 그런 존재로 보고 있었다.
목을 죽이게 도와준 오아시스에게 아무런 보답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뭔가 작게나마 보답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게 바로 PX병이다.
"PX병이 뭐 하는 보직인지 굳이 내가 설명 안 해 줘도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꿀 빠는 보직 이야. 남들 일과 시간에 좆뻉이 칠 때, 너는 시원한 에어컨, 따스한 난방 있는 곳에서 편하게 일하 면 돼. 종이 박스 몇 번 나르는 것 말고는 크게 할 일도 없어. 그 냥 물건 수량 체크만 하면 그날 하루 끝.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 냐?"
서공찬이 굳이 PX병의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모두 가 다 PX병이 되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곽분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에겐 큰 문제가 있었다.
'군종병은 어떻게 하지?'
이미 이강진에게 기독교 군종병을 물려받기로 한 마당에 이제 와서 말을 뒤집어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앞섰다.
한편 곽분섭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서공찬은 의아 해했다.
"분섭아, 왜 그러냐? PX병 달고 싶지 않아?"
"일병 곽분섭. 저, 사실은……."
일단 서공찬에게 왜 지금 당장 PX병을 인수인계 받을 수 없 는지, 그 이유부터 알려 주기로 했다.
이강진에게 기독교 군종병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듣 게 된 서공찬.
그러나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가벼 웠다.
"뭐, 어때. 그거 물리면 되잖아."
"물려도 됩니까?"
"왜 안 돼? 너, 아직 정식으로 인수인계 받은 거 아니잖아."
"그거야 그럼지만……."
"아직 군종병 공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두상 으로만 물려주겠다고 한 상황인데, 반드시 차야 하는 이유가 있어? 뭐, 강진이 기분이야 좀 나쁠 수 있지. 근데 말이다. 내가 강진이,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후임이니까 하는 말인데, 강진 이는 그런 거 가지고 너한테 워라고 할 사람은 아니야."
그건 곽분섭도 공감하는 말이었다.
이강진은 뒤끝 있는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배려심 있고 이해심 높은 남자다. 서공찬의 말대로 갑 자기 군종병을 못 맡게 되었다고 해도 이강진이 그에게 해코지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이강진은 어설프게 자신을 속이려 드는 것보단 그냥 있는 그 대로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걸 좋아한다.
군종병이냐, PX 병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곽분섭.
"서공찬 병장님, 지금 당장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 천천히 생각해 봐. 며칠 줄까?"
"이삼 일이면 될 거 같습니다."
어떻게든 그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더 이상 질질 끌게 되면 선택할 기회도 없이 바로 군종병을 차게 되기 때문이다. 서공찬은 곽분섭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담 없이 잘 결정해. 꿀 빨 수 있는 기회를 쉽게 날리지 말 라고. 그리고 네가 PX병을 택한다면, 내가 강진이한테 가서 잘 이야기해 줄게. 이러이러해서 분섭이가 PX병을 차게 되었다고. 너한테 피해 가는 일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
"예, 알겠습니다."
복덩이가 하나만 굴러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두 개나 굴러와 버리니, 오히려 거기에 깔리게 생겼다.
* * *
PX병이냐, 아니면 군종병이냐.
'편안한 군 생활 VS 사랑하는 여인'의 대결이었다.
사실 후자 쪽이 무게가 쏠리는 게 당연하다. 군 생활은 전역 하면 끝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은 어쩌면 평생의 반려자 를 구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 쪽에 잠재적인 문제가 있었다. 최다연과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곽분섭은 고민이 많았다.
아직까지는 최다연과 좋은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백해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법도 없지 않 은가.
서로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는 결말을 곽분섭은 이미 한 번 경험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면?
PX병을 선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남은 군 생활이라도 편 하게 보내다가 전역하면 좋지 않은가.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곽분섭. 분대장 간담회 때 이강진은 곽분섭을 따로 불렀다.
"분섭아, 요즘 무슨 일 있어?"
"01, 일병 곽분섭!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달랐다.
누가 봐도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뭐지?'
남들 앞에서 쉽게 말 못할 민감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강진 은 지금 이 자리에서 구태여 곽분섭에게 말해 보라고 압박을 넣지 않았다. 저번에 이랬다가 허인강의 치부(?)를 강제로 끄집어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의 흑역사는 지켜 줘야 한다.
'나중에 한 번 슬쩍 떠봐야겠군.'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분대장으로서 미리 파악해 둘 필 요가 있다.
행정반에서 저 녁 점호가 시작될 거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당직사관은 통신반장, 당직사병은 백우호였다.
할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통신반장이 주도하는 저녁 점호 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끝났다.
9시 45분에 끝난 덕분에 취침 시간까지 15분이라는 여유가 생 겼다.
일찍 잘 사람들은 일찍 자고. 조금 있다가 잘 사람들은 수다 를 떨거나 몰래 TV를 틀어서 보거나 하면서 짧은 여유 시간을 보냈다.
이강진은 다음 주에 나갈 휴가 때문에 김철과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취침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은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업무야?"
"어, 죽겠다. 통신반장님이 모레까지 보내야 하는보고서를 여 태껏 깜빡하고 계셨대. 그거 때문에 지금 미칠 노릇이야."
"그래서 저녁 점호가 일찍 끝난 거였군."
병사들은 좋지만, 당사자와 김철은 죽을 맛이었다.
"근데 왜? 나한테 할 이야기 있어서 찾아온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니까 업무에 집중해."
휴가 이야기 좀 하려고 했건만. 그렇다고 김철을 방해하고 싶 진 않았다.
내일 이야기하면 되니까. 이강진은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가 기로 했다.
그전에 백우호가 이강진을 불러 세웠다.
"강진아, 너 초번초 아니지?"
"어, 오늘은 근무 없어. 풀잠 때리러 간다."
"그래? 그럼 잘됐네.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심각한 거야?또 탈영 사건이 발생했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
백우호가 작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분섭이랑 관련된 거야."
"곽분섭?"
"어, 최근에 그 녀석, 고민 많아 보이지 않냐?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거든."
설마 이 이야기를 백우호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침 궁금해하던 거였는데, 잘됐다. 이강진은 얌전히 백우호 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취침 시간대라 그런지 사열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교차가 심한 날씨라 그런지 이제 저녁에는 깔깔이를 입고 다녀야 할 판이 었다.
"빨리 말해 봐. 추워 죽겠다."
"아까 운성이한테 들었는데. 오늘 운성이 주간 근무 파트너가 서공찬 병장이었거든."
"서공찬 병장?"
"어, 근무 끝나고 식사하러 병사 식당으로 갔을 때,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걸 우연치 않게 들었대. 서공찬 병장이 분섭이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더라."
잠시 말을 끊고 주변을 살핀 백우호.
누가 들으면 큰일 날 말을 조심스레 흘렸다.
"PX병 주겠대."
"분섭이한테? 진짜로?"
"어."
"……그랬군."
이제야 곽분섭이 고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기야 PX병 정도면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각자 나 름의 고충이 있다고는 하지만, 보직 중에선 그래도 PX병은 나름 괜잖은 편이다.
아니, 상당히 괜찮다.
"분섭이, 너한테 군종병 물려받기로 하지 않았냐?"
"아직 정식으로 인수인계한 건 아니야."
"그렇고만. 어떻게 할 거냐?그냥 기독교 군종병은 다른 애 주고, 분섭이는 PX 받게 할 거야?"
만약 곽분섭이 PX병을 받고, 이강진이 1분대 후임 중 아무한 테 군종병을 물려주게 되면 1분대는 백우호가 가진 이발병을 합 쳐서 총 3개의 작업병을 가져오게 되는 셈이다.
1분대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내가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K 분섭이가 정해야지."
"그 녀석도 참 골 때리네. 아니, 너한테 기독교 군종병 받고 싶어서 그렇게 알랑방귀를 뀌던 녀석이 PX병 제안 들어왔다고 저 렇게 고민을 하는 게 말이 되냐?"
"왜, 고민할 만하지."
물론 이강진에게 같은 제안이 들어왔다면, 고민도 없이 PX병 ……이 아닌, 기독교 군종병을 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지윤과 잘될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곽분섭은 다르다. 실연의 아픔을 최근에 겪었기에 연 애라는 세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가 겁이 날 것이다.
최다연과 이야기가 잘 풀렸다고는 해도, '만약에'라는 게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 연애의 함정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오히려 PX병을 고르는 게 더 득이 될지도 모른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곽분섭의 몫.
"우리는 그냥 얌전히 지켜보기만 하자. 어차피 다음 달에 군종병 인수인계하기로 했으니까, 분섭이가 생각이 있다면 그전 에 대답을 내놈겠지."
"만약 PX병을 택한다면?"
"다른 애한테 물려줘야지."
"2 순위가 있어?"
"어, 은석이한테 주려고."
백우호가 생각지도 못한 후보였다.
"왜 하필 은석이한테?"
"포상 휴가 받을 건덕지가 전혀 없으니까."
기운상에겐 분대장 활동으로 얻을 휴가가, 성태강에겐 그동 안 쌓아 온 포상 휴가들이 있다.
곽분섭은 PX병을 맡는다고 치니 걱정 없고. 허인강은 이미 노가다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선임들과 행보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포상 휴가 한두 개 정도 챙기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도 쉬울 것이다.
남은 건 최영고와 조은석뿐.
최영고는 누나 덕이라도 볼 수 있지만, 조은석은 그런 게 전 혀 없다.
게다가 이강진이 민원 사건으로 고생할 때 조은석이 곁에서 많이 도와주기도 했었기에 만약 곽분섭이 PX병을 포기한다면, 이강진은 그에게 군종병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진아, 그럼 만약 분섭이가 군종병을 택한다면? 은석이는 결국 국물도 없는 거잖아?"
"그것도 나름 방법이 있어."
이강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 제82화. 후임 군종병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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