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0화. 성공을 갈망하다 (1) >
제80화 성공을 갈망하다 (1)
오랜만에 종교 행사에 참가하게 된 한지윤은 1075대대 안에 위치한 교회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들었다.
"여긴 그대로네요."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 허허."
목사가 너 털웃음을 흘렸다.
변화에 가장 둔감한 조직 중 한 곳이 바로 군대다. 부대 안에 있는 교회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매번 변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이다.
1 년 전에 봤던 병사들과 지금의 병사들을 비교하면 상당히 달 랐다. 이미 과반수가 전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사라지 면 새로운 얼굴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 될 시점, 또다시 새로운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길어 봤자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밖에 연을 맺지 못하는 장 소지만, 목사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이곳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 다.
이 특별한 곳에 오랜만에 딸과 함께 오게 되었으니, 그의 기 분 또한 남달랐다.
"슬슬 짐 나르자꾸나."
"네."
회상에 잠기는 것도 좋지 만, 그건 종교 행사가 끝난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옷소매를 걷어 올리는 부녀.
그때 이강진이 부녀를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기운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 이강진.
목사야 이강진을 매주 보다시피 했었기에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한지윤은 달랐다.
"어머, 강진 씨!"
한지윤의 시선이 이강진의 계급장에 머물렀다.
"병장 달고 계신 모습, 멋있어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다.
"시간 정말 빠르네요. 강진 씨, 이등병 때 처음 봤었는데……."
"개인적으론 더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야 전역일이 오니까요?"
"예,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군 생활에 미련은 없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면서 얌전히 전역할 때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목사는 이강진과 한지윤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 줬다.
목사의 배려 덕분에 이들은 그간의 화포를 풀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 촬영은 어떤가요?"
"잘되고 있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떨리고 무서 웠는데,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어요. 매니저 언니가저 보면서 '넌 배우가 천직이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예요."
"무사히 적응하셔서 다행입니다."
스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한지윤이 니 이런 결과는 이미 예정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영화는 언제 개봉하나요?"
"올해 말쯤 될 거예요. 나중에 개봉하면 같이 보러 가실래요?"
"물론이죠! 불러만 주세요. 지윤 씨가 찾으신다면, 어디에 있 든 한 걸음에 달려가겠습니다!"
오버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하는 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지윤이 자신을 보고 싶다는데, 무조건 달 려가야 하지 않겠나.
단, 전역하고 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군대에 있을 때에는 한지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가게 되면 탈영이다.
아무리 한지윤이 보고 싶다고 해도 탈영으로 군 생활을 늘리 는 짓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강진 씨, 조만간 휴가 간다면서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즘 휴가 자주 나가시네요?"
"그동안 쌓아 뒀던 휴가가 너무 많은 탓에 그렇습니다."
행복한 고민이라는 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월요일날에 나가시는 건가요?"
"아니요. 화요일입니다."
"어머, 그럼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해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좋죠."
한지윤과의 데이트는 언제나 환영이다.
* * *
휴가 첫 날.
이강진은 아침 점호를 끝낸 뒤에 행정반으로 향했다.
휴가 신고를 하기 위해 당직사관을 찾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1부소대장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이강 진을 응시했다.
"휴가 나가냐?"
"예, 그렇습니다."
"너 혼자?"
"금일 휴가자는 저 하나뿐입니다."
"그러냐. 병장 짬이니까 휴가자 교육 같은 거 안 해 줘도 되겠 지?"
이강진은 곧장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 거 해 봤자 시간만 낭비다. 그 시간에 차라리 좀 더 일찍 휴가를 출발하는 편이 훨씬 좋다.
"그래, 나가 봐라. 전화 하루에 한 통화씩 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졌 다.
하지 만 이 것만으론 부족하다.
'좀 더 주기를 줄여야 하는데.'
못해도 3주에 한 번씩, 4박 5일에서 5박 6일 정도 되는 휴가 를 꾸준히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이강진이 전역할 때, 1 일도 남 김없이 모든 휴가를 안정적으로 다 슬 수 있다.
'나중에 행보관님 찾아가서 담판을 짓든가 해야지.'
그동안 이강진이 행보관을 많이 도와줬으니, 그도 이강진의 편의를 봐주려고 할 것이다.
이건 나중에 휴가 복귀하고 난 다음에 해결해야 할 일이다.
지금 이강진에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다.
'지윤 씨하고 10시에 만나기로 했지.'
이른 시간에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좀 나눈 다음에 헤어 지기로 했다. 점심도 같이 먹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은 한 지윤이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커피 타임만으로 아쉬움을 달 래야 했다.
'어차피 나 전역하고 나면 시간은 많으니까.'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역시 해답은 전역뿐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 유명인이 된 한지윤.
외출을 하려면 마스크가 필수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한지윤을 바로 알 아봤다.
순간 이강진은 흠칫하고 놀랐다.
"지윤 씨…… 혹시 머리카락 자르신 겁니까?"
"네, 맞아요. 잘 어울리나요?"
일요일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긴 생머리는 멀쩡했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머리카락이 온데간데없이 실종되어버 렸으니, 아무리 이강진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발머리가 된 한지윤을 보면서 이강진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는 건, 상당히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지인들에게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어머, 아니에요. 이번 주에 있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자른 거 예요. 제가 맡은 캐릭터가 남자 친구한테 차이고 다음부턴 남자 에게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결심하면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등 장하거든요. 그걸 위해서 자른 거예요."
"그……렇군요."
큰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한편 한지윤은 아까 이강진에게 했던 질문을 재차 반복했다.
"어울리나요? 단발머리는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해 보는 건데,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많이 어색하네요."
"지윤 씨는 어떤 헤어스타일이든 다 잘 어울리십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진짜 미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고마워요."
수줍게 미소를 짓는 한지윤.
그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이강진은 이번 휴가의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한지윤이 갑자기 단발머리가 된 덕분에 사람들은 그녀의 정 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 쭉 같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해 왔다. 긴 생머리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 상징을 작품을 위해서 과감하게 잘라 낸 것이다.
한지윤이 배우로서 얼마나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이강진이 먼저 지갑을 꺼내들었다.
"제가 사겠습니다. 지윤 씨는 마시고 싶으신 거 말씀해 주세 요."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군인에게 뭔가를 얻어먹는다는 게 미안한 모양인지 한지윤도 본인의 지갑을 꺼내려 했었다.
그러나 이강진이 그녀를 한사코 말렸다.
"괜히 직원과 말 나누면 지윤 씨라는 거 들킬 수도 있으니까 요. 지윤 씨는 미리 자리에 가서 앉아계세요. 제가 커피 받아가 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한지윤이 헤어스타일을 바꿨다고 해도, 얼굴과 목소 리까지 바꾸진 못한다. 성형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하겠지만, 지 금의 미모만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얼굴에 칼을 댈 필요가 있을까전혀 없다.
한지윤은 마지못해 이강진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미안해요, 강진 씨. 그럼 부탁드릴게요."
"예."
한지윤이 마시고 싶어 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먼저 주문 한 이강진.
"다른 한 잔은……."
메뉴판을 살피 던 이강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직원에게 물 었다.
"여기에는 에일 밀크티 없죠?"
"네? 에일 밀크티요?"
"예."
"잠시만요."
직원은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점장이 이강진에게 다가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에일 밀크티는 저희 매장에 없는 메뉴입 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기야.
미래에 유행할 카페 메뉴가 벌써 등장했을 리가 없다.
'그럼 저번에 내가 마셨던 그 에일 밀크티는 대체……'
지난 번 이강진은 이용진이 소개해 준 카페를 찾은 적이 있었 다.
번화가에서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카페.
그곳에서 이강진은 에일 밀크티를 접했다.
맛은 달랐지만, 기본 베이스는 분명 이강진이 아는 에일 밀크 티와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역시 그곳에 다시 가 볼 수밖에 없나.'
만약 그 젊은 사장이 에일 밀크티를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라면
'내가 무조건 낚아채가야지!'
이번 휴가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로이 정했다.
하나 이강진이 정해야 할 게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저기…… 손님?"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이강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다른 한 잔은 무엇으로 드 릴까요?"
"아."
아직 이강진이 마실 음료 주문을 안 넣은 것이다.
"그냥 같은 걸로 두 잔 주세요."
애매할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다.
* * *
한지윤과의 짧은 데이트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청주로 향하 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시 눈을 감고서 잠을 정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 왔네.'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체감상 상당히 빨리 도착한 듯했다.
역시 먼 거리를 이동할 때에는 잠만 한 게 없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 이강진은 터미널 입구로 향했다.
그를 보자마자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이강진에게 다가왔
"형 님, 고생하셨습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이강진에게 형님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는 남자.
지난 휴가 때 이강진이 고용했던 나두석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강진을 피해 걷기 시작했다.
"형님이래."
"혹시…… 조폭 아니야?"
"어머머, 세상에."
나두석의 깍듯한 인사 탓에 이강진은 본의 아니게 한 조직의 보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형님 말고 뭐라고 부르랬는지, 벌써 까먹었냐?"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제야 떠오른 모양인지 나두석은 말을 번복했다.
이강진이 청주에 집과 사무실을 마련해 준 덕분에 나두석은 빠르게 청주살이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강진을 픽업하기 위해 이곳까지 차를 끌고 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탄 이강진.
나두석이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집으로 모실까요?"
"아니."
오늘은 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무실부터 먼저 들리자."
"예, 알겠습니다."
나두석이 일을 잘 진행하고 있는지 먼저 두 눈으로 확인해보 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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