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바라 코리아 (2)
재입대를 하기 전, 그러니까 이강진이 다시 이 시간대로 회귀 하기 전에 그는 나름 잘나갔던 인생을 산 남자였다.
비록 끝은 허망했을지언정, 과정 자체는 성공한 인생 그 자체 였다.
자신의 인생 곡선이 정점을 찍었을 때 이강진의 인복도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
주변에는 이강진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기 억나는 몇몇 인재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나두석이었다.
주식 투자에서나 회사 운영에서나 나두석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냈다.
이강진이 데리고 있기에 너무 아쉬운 인재라는 생각이 들 때 도 있었다.
그 인재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회사가 부도가 나도 할 말이 없지.'
당시에 이강진은 자신의 고집을 너무 앞세웠다. 자신이 손만 대면 뭐든 다 성공하는 미다스의 손인 줄 알았다.
하나 이것은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자만과 오만은 이강진의 눈과 귀를 닫게 했고, 결국 얼마 안 가 이강진은 파산 신청을 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나두석과의 연락도 끊겼다.
나두석이 일방적으로 끊은 게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강진 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늘 희망을 심어주려고 했었다. 하나 이강진이 그의 연락을 피했다. 나두석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 문이었다.
이강진 때문에 나두석도 수억대의 빚을 떠안게 되었는데, 무 슨 낯으로 그를 보겠나.
이강진이 나두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 죄책감이 한동 안 이강진을 괴롭혔다.
하지만 회귀한 이후에는 달랐다.
'이번 생에선 내가 어떻게든 두석이를 책임져야지.'
자신의 성공 로드에 나두석도 같이 데려가고 싶었다.
속죄라고 불려도 좋다.
자기만족이라고 불려도 좋다.
전생에서 못 다한 것들을 나두석에게 해 주고 싶다. 지금은 단 지 이 생각뿐이다.
그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면 두석이와 접점을 만들 수 있을까?'
전생에선 친한 형, 동생이었지만 이번 생에선 다르다.
생판 모르는 남이다.
이강진이 먼저 접근한다고 해도, 나두석은 경계심만 높일 것 이다.
그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강진에게 할당된 시간은 기껏해야 6박 T살.
물론 다음 휴가 때에도 기회는 있을 테지만, 기왕 연락이 닿 은 김에 이강진은 지금 나두석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 다.
그리고.
'두석이가 있어야 외식 사업이 진전을 보일 테니까.'
군대만 아니면 이강진이 알아서 했을 테지만,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이강진의 빈자리를 메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
황민수나 오호만은 애초에 사업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요 리 쪽은 전문가지만, 경영은 잼병이다.
그렇다고 죄영혜에게 모든 걸 떠넘길 순 없다. 그녀에게는 미 안한 말이지만, 이강진은 아직 그녀에게 사업체 전반을 맡길 정 도로 죄영혜를 맹신하지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강진을 배신하지 않을 만한 사람.
이강진의 말에 따라 손처럼, 발처럼 움직여 줄 충성스러운 존 재.
'역시 두석이가 딱인데...... :
어떻게 하면 그를 데려올 수 있을까.
일단 머리를 굴려 보기로 했다.
* * *
이른 새벽 나두석은 아주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가족들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밖을 나온 그는 곧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안전모를 착용한 채 시멘트 포대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게 오 늘 나두석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후우…… 후우….?!"
벌써부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제법 날씨가 선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땀으로 흠 뻑 젖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두석은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노동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아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21 세이라는 상당히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7살 연상인 지 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새로운 가족이 태어났다.
회사원이었던 아내는 출산 이후 몸이 급격하게 나빠진 탓에 집과 병원을 오가면서 생활해야만 했다.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두석은 생전 해 본 적도 없는 막노 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눈에 땀이 들어간 모양인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결국 포대를 내려놓고 잠시 쉬어가야만 했다. 그러자 작업반 장이 바로 쓴소리를 내뱉었다.
"나두석! 또 쉬냐! 너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뭐 그리 농땡이를 부 려!"
"죄,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포대를 짊어져야만 했다.
허리가 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일당을 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새벽부터 오전, 오후 내내 일만 한 나두석은 금세 녹초가 되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공사장 일이 모두 끝났다.
나두석은 스마트폰을 꺼 내들었다.
안에 저장되어 있는 가족사진을 펼쳤다.
아내와 어린 아들 그리고 나두석. 이렇게 셋이서 활짝 미소 짓 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책임을 져야 했기에 나두 석은 대학도 과감히 포기해 버렸다.
지금은 돈을 벌 때다.
'슬슬 가야지.'
마음 같아선 집으로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저녁 8시부터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하루에 두 탕. 견딜 수 없는 피로함이 나두석의 어깨를 강하 게 짓눌렀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가장의 무게 정도는 이제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다리에 억지로 힘을 집어넣으며 공사 현장을 벗어났다.
입구에서 막 빠져나온 순간.
"나두석 씨."
누군가가 나두석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이강진 씨?"
한때 티비에 자주 나왔던 이강진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나두석에게 다가왔다.
나두석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십니까?"
자신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를 찾아온 게 틀림없다.
이강진은 옅은 미소를 흘렸다.
"이력서 보고 왔습니다. 나두석 씨를 채용하고 싶어서요."
"예……?"
뚱딴지같은 소리에 나두석의 의구심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 * *
저녁도 먹을 겸해서 한적한 가게로 이동하게 된 두 사람.
눈앞에 자글자글 구워지는 고기를 보면서 나두석은 침을 꿀 꺽 삼켰다.
얼마 만에 보는 고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먼저 고기 한 점 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가운데에 있는 건 다 익었습니다. 드셔 보세요."
"아닙니다! 강진 씨부터 먼저 드세요."
"전 여기 오기 전에도 고기 먹고 왔으니까 괜잖아요."
이강진의 눈치를 보던 나두석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올 렸다.
뚝뚝 떨어지는 육즙이 나두석의 침샘을 자극했다.
남이 사 주는 고기만큼 맛있는 건 없다. 이강진이 쏜다고 했 으니, 일단 나두석은 배부터 채우자는 심산으로 고기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고기의 식감이 나두석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두석이지만, 정작 고기를 입에 대 본 적은 거 의 없었다. 주방에서 늘 설거지만 하다 보니 기름 냄새만 지겹 도록 맡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고기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게다가 돼지고기도 아니고 소고기다!
고기 한 점을 꿀꺽 삼킨 나두석은 이강진에게 물었다.
"아까 이력서 보고 저를 찾아오셨다고 했죠?"
"예."
"전 강진 씨한테 이력서를 보낸 적이 없는데요."
맞는 말이다.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이강진은 일부러 핑곗거리를 만들어 왔다.
"구인 광고 사이트에 이 력서 올리신 적 있죠? 그거 보고 이렇 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올리긴 했었는데……."
설마 이강진이 그걸 보고 찾아올 줄은 몰랐었다.
가끔 기업에서 나두석의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해 오곤 했지만 죄다 다단계들뿐이었다.
혹시 이강진도 그런 쪽으로 사업을 펼치려는 게 아닐까?
불현듯 의심이 밀려왔다.
나두석의 표정 변화를 단번에 알아차린 이강진은 미리 선수 를 쳤다.
"다단계 같은 회사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혹시 바라 식당이라고 아십니까?"
마침 나두석이 아는 가게였다.
"청주에서 유명한 한식집 아닌가요? 작년에 와이프하고 데이 트할 때 거기서 밥 먹어 본 적이 있습니다. 맛있더라고요."
"그래요? 그럼 이야기하기 훨씬 쉽겠네요."
이강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쪽 사장님하고 같이 외식 사업을 해 볼까 합니다. 이야기 는 작년 말부터 계속 나누고 있었는데,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고요."
이강진이 바라 식당과 연관이 깊다는 건 나두석도 알고 있었 다. 백두원의 푸드기행 바라 식당 편에 이강진도 같이 출연했었 으니까.
"제 밑에서 일하겠다고 하시면 급여는 최대한 다 맞춰 드리도 록 하겠습니다. 청주에 집도 하나 잡아 드리겠습니다. 두석 씨 는 가족들 데리고 몸만 오시면 됩니다."
파격적인 조건이다.
솔직히 나두석 입장에서야 좋다. 언제까지 계속 공사판을 오 고 가며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 니 말이다.
그도 번듯한 직장 하나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 다.
하지만 납득되지 않는 게 있었다.
"전 회사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데요."
온라인에 등록해 둔 나두석의 이력서를 봤다면, 쉽게 알 수 있을 터.
그럼에도 이강진이 왜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나두석에게 관 심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험이 없는 건 큰 단점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나두석의 성장 가능성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잘 안다. 심지어 같이 일도 해 봤다. 경험이 없다고 해도 알려만 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두석에게 미래의 일을 들먹일 수는 없었 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결정적인 한마디가 필요하다.
그 순간 이강진의 뇌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이강진은 그 말을 입에 올렸다.
"두석 씨가 저하고 같이 일을 하면 복을 불러올 거 같은 관상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두석 씨를 찾아온 겁니다."
"관상……요?"
"예."
"관상도 볼 줄 아세요?"
이강진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싱긋 웃기만 했다.
이전 생에선 서로 입장이 달랐다. 역으로 나두석이 먼저 이강 진에게 동업을 해 보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때 나두석이 이강진을 설득할 때 사용했던 멘트가 바로 관상이었다.
그러면 나두석은 이강진과 다르게 관상을 볼 줄 알았을까?
천만에. 그도 똑같았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힐 괴상망측한 작업 멘트다.
하지만 상대가 나두석 이라면 어떨까?
갑자기 그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를 힐긋 노려볼 정도였다.
그제야 웃음을 그친 나두석은 이강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묘하게 저하고 코드가 맞네요."
한층 상기된 표정을 지은 나두석은 이내 씩씩하게 외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저야말로요.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었다.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사실 그가 군필인지 미필인지, 이강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두석의 어색한 미소가 이어졌다.
"저 면제입니다."
< 제76화. 바라 코리아 (2) > 끝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