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6화. 바라 코리아 (1) >
제76화. 바라 코리아 (1)
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이강진은 며칠 뒤에 또다시 짐을 꾸려 야 했다.
바로 휴가 때문이었다.
휴가를 나가기 전날 저녁.
이강진은 백우호를 불렀다.
"우호야, 이거 받아라."
분대장 수첩이었다.
백우호는 이강진에게 눈을 흘겼다.
"요즘 너, 휴가 너무 많이 나가는 거 같지 않냐?"
"많이 나가지. 인정할게. 근데 가지고 있는 휴가는 다 쓰고 전역해야 할 거 아니냐. 앞으로 최소 한 달에 한 번씩, 최소 4박 5 일 이상의 휴가를 나가야 전역하기 전까지 다 쓰고 나가니까 네 가 이해 좀 해 줘라."
"이 런 부러운 녀석을 봤나……. 누구는 휴가 없어서 죽을 맛인 데, 누구는 전역 때까지 휴가 다 못 쓸까 봐 불안해하고 있네. 하 여간 있는 놈들이 더한다니까."
군대도 결국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되는 구조다.
그래도 이강진은 될 놈이 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군대를 두 번이나 왔는데, 이 정도는 봐 줘야 하지 않겠나. 물 론 속사정을 모르는 백우호로선 이강진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 었다.
분대장 수첩을 백우호에게 건네주려고 하던 순간, 스피커에 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분대장들은 지금 즉시 행보관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이 분대장 회의하시려고 하나 보네."
백우호는 막 이강진한테 건네받은 분대장 수첩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
"오늘까지만 네가 가라."
"알았다, 알았어."
분대장도 아닌데 이강진이 없는 동안 분대장 역할을 해야 하 는 백우호를 위해서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었다.
두툼해진 분대장 수첩을 들고 행정반을 방문한 이강진.
인원 파악을 끝낸 행보관은 곧장 분대장 회의를 진행했다.
"얼마 전에 7849대대로 파견 갔던 병사들 있지? 걔들한테 1 박 2일 포상 휴가 줄 테니까 그렇게 전해 두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 다!"
이강진을 따라 근무 지원 파견을 나갔던 병사들은 씨익 웃었 다.
이게 다 포상 휴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이강진 덕분이었다.
이강진은 행보관이 한 말을 분대장 수첩에 메모하면서 생각 했다.
-이번에 받은 건 다음 휴가에 붙여서 사용하면 되겠네 :이제 휴가를 비축할 여유 따원 없다. 받으면 바로바로 사용해 야 한다.
중간에 훈련 때문에 휴가를 못 나가는 달이 생겨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어떻게든 전역 전에 휴가를 다 쓰고 나가게끔 해 야 한다.
계속 진행되는 회의. 금일 분대장 회의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 다.
마지막으로 행보관은 분대장 회의가 끝날 때마다 늘 묻는 질 문을 이들에게 건넸다.
"특이 사항 있는 분과는 거수하도록."
"병장 이강진."
이강진이 번뜩 손을 들었다.
"내일 저하고 성태강 일병이 휴가 나갑니다."
"넌 얼마 전에도 갔다 온 거 같은데."
"예, 이번에 또 나갑니다."
"쌓여 있는 포상 휴가가 그렇게 많냐?"
이강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많지 않습니다."
약간의 겸손을 차려 봤다.
하지만 병사들은 알고 있다. 이강진이 휴가가 너무 많아서 허 덕일 정도란 사실을.
이강진이 대놓고 부정행위를 저질러서 받은 것도 아니고. 군 생활 잘해서 받은 것들인데, 그거 가지고 태클을 거는 건 말이 안 된다.
군 생활은 이강진처럼
이것이 1중대에 돌고 도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강진처럼 군 생활을 하려면, 회귀 트럭에 치 여 재입대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걸 주의해야 한다.
"이강진, 성태강. 이렇게 두 명 말고 내일 휴가 나가는 병사 있 나?"
분대장들은 입을 모아 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다. 해산해도 좋다."
"예!"
분대장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강진은 빠른 걸음으로 1생활관을 향해 직행했다.
오자마자 분대장 수첩을 다시 백우호에게 건넸다.
"자, 여기."
"이젠 내가 분대장인지, 네가 분대장인지 모르겠다."
"원한다면 견장 넘겨줄게."
"아니, 그건 됐어. 필요 없으니까 무서운 말 하지 마라."
이강진은 지금 당장에라도 분대장을 물려줄 자신이 있었다. 하나 백우호는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으면서 싫다는 의사를 격 렬하게 드러냈다.
이제 막 병장으로 진급했고, 군 생활도 슬슬 편해지려고 하는 데 스스로 지옥문을 열 바보가 어디 있겠나.
이강진이 사고라도 쳐서 타 부대로 전출당하면 백우호가 강 제로 분대장을 차는 일이 생기겠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이 강진은 그렇게까지 큰 사고를 저지를 인물이 아니니까 말이다.
* *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강진은 반쯤 눈이 감긴 성태강에게 당부했다.
"환복할 때 A급 전투복으로 환복해라. 점호 끝나자마자 바로 나갈 거니까."
"……앗, 예, 알겠습니다!"
오늘 당직사관은 통신반장이다.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 만, 그래도 통신반장의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휴가를 일찍 내보내 준다는 거였다.
이강진은 평상시 통신반장에게 주식 정보를 흘리면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러다 보니 아침 점호 끝나고 바로 휴가를 나가는 일이 가능해졌다.
점호도 속전속결로 끝났다. 아침 구보를 생략한 약식 점호, 병사들에겐 최고의 시나리오다.
바로 막사로 올라온 이강진은 성태강을 찾았다.
"휴가자 신고하러 가자."
나갈 땐 나가더라도 신고는 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성태강은 들었던 세면백을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씻을 시간조차 주지 않는 선임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움직여 야만 했다.
1075대대 1중대에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게 있다.
성태강과 같이 휴가를 나가지 마라.
그와 함께 휴가를 나가는 순간, 지옥을 맛보게 되리라.
그러나 올해 3월부터는 이런 말이 쏙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태강이 휴가를 나간다는 사실을 최대한 비밀로 했기 때문 이다. 심지어 가족들, 소속사한테도 알려 주지 않았다.
오로지 픽업하러 온 최창우 매니저만 알고 있었다.
이 방법은 나름 괜찮았다. 그 덕분에 성태강이 휴가를 나갈 때 마다 위병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사생팬들이 보이지 않게 되 었다.
위병소를 나오자마자 그들은 최창우가 끌고 온 차량으로 향했다.
이강진이 먼저 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창우 씨."
"엇, 강진 씨 오셨군요! 잠깐만요."
담뱃불을 끈 최창우는 밝은 미소를 유지했다.
"일찍 나오셨네요. 좀 걸릴 줄 알았는데."
"휴가 나가는 날에는 부대에 있는 일분일초가 아까워서요. 그 래서 전날에 아침 점호 끝나고 바로 나올 수 있게끔 미리 다 세 팅을 해 놨습니다."
"역시 강진 씨군요. 그럼 빠르게 바래다 드려야죠. 자, 타세요. 태강아, 너도 타. 바로 출발할 거니까."
"아무리 바빠도 과속은 하면 안 됩 니다, 형. 저 번에 막 밟다가 사고 날 뻔했던 거, 기억나시죠?"
"그때는 스케줄이 꼬여서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사고 안 났 으면 됐잖아? 이 형이 보기와는 다르게 안전 운전하는 스타일 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
최창우가 운전하는 차를 여러 차례 타 본 이강진은 알고 있저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래도 오이향 중위보다는 운전 잘하니까.'
그러면 된 거다.
* * *
같이 휴가를 출발하는 사람이 이강진, 성태강 둘 뿐이어서 그 런지 저번처럼 같이 술을 마시고 자시고 할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민원 사건 때문에 사단에서 휴가를 나가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는 지침 사항을 내려 보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얌전히 헤어지기로 했다.
이강진은 아쉽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할 일도 많으니까.'
이번 휴가도 저번처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청주로 내려가자마자 일단 이강진은 깊은 관계(?)로 거듭나게 된 황민수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 저 왔어요."
어머니는 이강진을 보자마자 이상함을 느꼈다.
"집에는 안 들렀다가 왔니?"
휴가를 나올 때마다 이강진은 집부터 먼저 들린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바라 식당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휴가를 나오자마자 집에 들리지 않고 바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군복 차림이었다.
"네, 아저씨랑 엄마가 잘 지내나 감시하러 왔죠."
"감시는 무슨……."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민수 아저씨는요?"
"호만이하고 같이 재료 사러 갔어. 점심에 단체 손님이 많이 몰렸거든. 그래서 생각보다 일찍 재료가 소진되었다고 차 타고 나갔어."
"나간 지 꽤 됐어요?"
"아니, 방금."
그러면 돌아오기까지 한참 걸릴 듯했다.
이강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황민수의 반응이 어떨지 보고 싶었는데. 그 재미는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나중에 다시 가게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에 이강진은 집으로 향했다.
아직 현관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행복이가 짖어 대기 시작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행복아. 옷 바로 갈아입을게."
행복이가 싫어하는 군복 냄새를 어서 지워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행복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강진 에게 다가가 머리를 부비면서 애교를 부렸다.
"요 녀석."
휴가를 나올 때마다 행복이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강진은 알게 모르게 힐링을 받는다.
하나 지금은 힐링 받을 때가 아니다.
"저쪽에 가서 잠깐 혼자 놀고 있어. 형 일 좀 해야 하니까."
컴퓨터 앞에 앉은 이강진은 습관적으로 마우스 커서를 주식 프로그램으로 가져갔다.
"아니지, 참."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장이 열리는 날이 아니다. 어차피 들어가 봤자 단타도 못 한다.
"다른 거 하려고 했지."
텍스트 파일 하나를 열람했다.
이강진이 기억을 더듬어 만든 지인들의 연락처였다.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이 전화번호가 맞는지 아닌지도 확신 할 수 없었다.
"회귀할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 좀 많이 외워 둘 걸 그랬네."
일단 막무가내로 부딪쳐 보기로 했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받겠지.'
이강진의 예상대로였다.
-네,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나두석 씨 번호 맞나요?"
-나두석이요? 아닌데요.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이강진.
"끝 자리가 4가 아니라 5인가?"
곧바로 두 번째 도전에 임했다. 하나 이번 도전도 실패였다.
5, 6, 1, 8…… 마침 내 9까지 도달했다.
이번에도 남자가 받았다.
"나두석 씨 핸드폰 맞습니까?"
물어보면서도 이강진은 애가 탔다.
제발 맞는다고 해 줘!
그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예, 맞는데요. 누구세요?
대답을 듣자마자 이강진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드디어 빙고다!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강제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두석이 전화번호는 맞군."
나두석은 이강진이 주식 투자 관련 일을 할 때부터 알고 지냈 던 친한 동생이다. 회귀 전에 이강진이 사업을 할 당시, 그의 손 과 발이 되어 적극적으로 이강진을 도와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회사의 전반적인 운영과 관리를 책임지면서 연일 최고 매출을 갱신하는 데에 큰 일조를 했던 나두석. 그러나 중요한 기로 에서 이강진은 나두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두석의 말이 충언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두석. 그는 이강진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못난 형이 조만간 다시 얼굴 비추러 가마."
< 제76화. 바라 코리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