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4) >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4)
가스 조절기를 손에 든 이강진은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대체 이게 어디서 난 거지?'
혹시 이강진과 같이 파견을 나온 병사들 중에서 누군가가 종을 들고 화장실에 왔다가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린 건 아닐까.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일단 확인부터 해 봐야겠어.'
휴지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은 후에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섰다.
순간 이강진은 소변을 보러 온 부소대장과 딱 마주쳤다.
"추, 충성!"
"누군가 했더 니 강진이, 너였구나. 아직도 안 잤어? 슬슬 자야 지."
"예, 곧 자러 가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충성!"
"오냐."
간부에게 들키면 큰일이다.
빠르게 화장실을 빠져나온 이강진은 곧장 행정반으로 향했다. 행정반엔 아무도 없었다.
'철이는 근무자들 인솔 나갔나 보네.'
차라리 잘됐다. 아무도 없을 때 가스 조절기가 없는 종이 있 는지 살펴보고, 만약에 있다면 조용히 주운 가스 조절기를 꽂아 두면 된다.
그리고 나중에 가스 조절기를 떨어뜨린 병사를 따로 불러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가스 조절기 관리 잘하라고 주의만 줄 생각이었다.
괜히 문제를 크게 키울 필요는 없다. 그러면 부대 분위기만 엉 망이 되기 때문이다.
'가스 조절기 잃어버린 건 큰 문제니까.'
간부에게 들킨다면, 최소 군기 교육대는 확정이다.
총기 보관함으로 다가간 이강진은 꽂혀 있는 1중대원들의 총기를 면밀히 살폈다.
그러나…….
'뭐야.'
전부 다 가스 조절기가 제대로 꽂혀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그러면 이강진의 건빵 주머니 안에 고이 들어 있는 가스 조절기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혹시 몰라서 이강진은 다시 한번 자신이 주운 가스 조절기를 꺼냈다.
'맞는데.'
가스 조절기가 틀림없다. 4년 차 군 생활에 접어든 이강진이 가스 조절기와 쇳덩이를 구분 못할 리가 없다.
생각에 잠길 때,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후! 시원하……. 응? 너, 자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냐?"
부소대장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이강진을 바라봤다.
"벼, 병장 이강진! 총기 현황판이 제대로 수정되어 있나 확인 하려고 왔습니다!"
"그건 당직인 철이가 확인하면 될 일이지. 그걸 네가 왜 확인 해?"
"철이가 저한테 부탁했습니다. 자긴 인솔 나가야 하니까 저보 고 대신 확인 좀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김철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핑계였다.
이강진은 부소대장이 눈치 못 채게 가스 조절기를 다시 주머 니 안쪽에 몰래 넣어 뒀다.
'마치 시한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거 같네.'
이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얼른 주인에게 넘겨주고 싶은 기 분이었다.
* * *
원라원과 부대원들은 어제 하루 동안 가스 조절기가 어디 있 나 찾아 헤맸지만, 마땅한 소득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원라원의 눈가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를 잡았다.
그의 동기인 서강전 병장이 팔꿈치로 원라원의 등을 쿡쿡 찔 렀 다.
"야 많이 피곤하냐? 몰골이 말이 아니네."
"……말 걸지 마라. 지금 굉장히 짜증 난 상태니까."
안 그래도 훈련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데, 후임이 가스 조절기까지 잃어버렸다고 하니 피곤함과 짜증함이 수십 배 로 밀려왔다.
이제는 후임을 갈굴 기운조차 없었다.
'일운이를 갈군다고 없던 가스 조절기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럴 기운 있으면 가스 조절기를 찾는 일에 투자하는 편이 더 좋아 보였다.
'오늘까지만 찾아보고, 못 찾겠다 싶으면 그냥 중대장님한테 말해야겠어.'
이곳 임시 진지에서 훈련을 하다가 오후에 다시 대대로 돌아 가서 추가 훈련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야 외 숙영을 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다.
원라원이 노리는 건 대대로 들어갔을 때다.
'가스 조절기가 막사 주변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훈련을 받는 척하면서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 볼 생각이다.
이미 분대원들에겐 말을 전해 뒀다. 그들도 대대에 들어가자 마자 바로 가스 조절기 탐색 작전에 들어갈 예정이다.
'어서 찾아야 할 텐데...... :
이러다가 분대장한테도 책임을 묻는답시고 당장 예정되어 있 는 원라원의 휴가까지 잘리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통화를 마친 행보관은 이제 막 점심을 먹고 올라온 이강진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7849대대가 이곳으로 잠깐 돌아와서 훈련 받고 다시 나간다고 하니까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됐네.'
오늘 아침 이강진은 결론을 내렸다.
그가 주운 가스 조절기는 1중대의 것이 아니다. 파견 나온 병사들의 총기를 죄다 살폈지만, 전부 가스 조절기가 제대로 꽂혀 있었다.
근무를 나갔던 병사들의 것까지 오늘 아침에 다 확인했다.
7849대대 2중대원 중 한 명이 흘린 가스 조절기라는 걸 밝혀 낸 것까진 좋다.
하지만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가스 조절기를 어떻게 간부들 몰래 병사들에게 전달해 주느 냐……. 이게 문제군.'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 이 마음가짐은 가스 조절기가 타 부대의 것으로 결론이 났어도 여전했다.
'아무한테다 몰래 가져다주면 되겠지.'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이강진이 할 일은 딱 여기까지다. 이 정도 해줬어도 많이 해 준 편이다.
나머지는 7849대대의 몫이다.
'오후 2시라고 했지?'
현재 시간을 확인하는 이강진.
'슬슬 준비해야겠군.'
이번 기회를 놓치면…….
7849대대에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 * *
병사들이 탄 차량이 위병소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차량 들어오고 있습니다.
"수신 양호."
무전기를 든 이강진은 막사 안에서 바깥 상황을 예의 주시했 2중대원들이 트럭 뒤에서 뛰어내렸다.
"어서 움직여라! 무브, 무브, 무브!"
"목진지부터 점령해서 보고해!"
"이번엔 중대장님 심기 건드리지 마라! 오늘은 편하게 가자, 편하게!"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저 중에 이강진이 아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이강진의 라이벌, 원라원.
그는 사열대 옆에 마련되어 있는 호에 자리를 잡았다.
'잘됐다. 저 아저씨한테 주면 되겠네.'
마침 거리도 가깝다. 하지만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가 스 조절기를 넘길 순 없다. 그러면 그 즉시 작전은 실패한다.
간부들이 없는 때를 노려야 한다.
마침 중대장과 소대장이 잠시 다른 목진지를 확인하러 간다 며 자리를 비웠다.
'지금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강진의 걸음이 빨라졌다.
행정반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어디 가는 길이냐?"
운도 없게 행보관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강진의 뇌세포들이 바삐 움직였다.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 함이었다.
"화, 화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큰 거냐?"
"예, 그렇습니다!"
갔다 오라고 말하면서 이강진을 보내주는 행보관. 심장이 덜 컥 내려앉을 뻔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원라원과 후임이 맡고 있는 호를 찾았다.
"아저씨!"
이강진이 원라원을 불렀다. 그제야 이강진의 기척을 알아차린 원라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입을 열기도 전에 이강진이 먼저 행동했다.
"이거 받아요!"
뭔가를 던졌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받은 원라원. 그의 손에 작지만 무게감 이 있는 촉감이 느껴졌다.
이강진이 준 게 무엇인지 손을 펼쳐 확인했다.
원라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어제 하루 종일 찾아 헤맸던 바로 그 가스 조절기다!
"이, 이걸 어떻게……."
"화장실 안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여기 부대 사람 거 같은데, 그거 떨군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 가 알아서 잘 전 달해 주세요."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원라원에게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전해줬다.
원라원은 그런 이강진의 행동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라이 벌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이런 크나큰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강진 덕분에 살았다.
"감사합니다. 나가서 만날 때, 제가 맛있는 거라도 대접할게요."
"30일 맞죠?"
"네."
"그럼 그때 사주세요."
더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간부들에게 들키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곧장 행정반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 아 올렸다. 마침 행보관이 그 모습을 보고선 말을 붙였다.
"쾌변이라도 했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예,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묵혔던 고민거리가 시원하게 해결되었으니, 쾌변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 * *
파견 마지막 날이 밝았다.
새벽 6시에 김철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은 이강진은 일정표를 재차 확인했다.
오후 1시에 본대가 복귀한다. 그리고 오후 2시에 7849대대에 인수인계를 마친 뒤 1075대대 병력은 다시 부대로 복귀하면 된 다.
7849대대를 대신해서 각각 2교대, 3교대로 근무를 서 온 1075 대대 병사들은 피곤함에 짓눌린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강진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 해선 그나마 나았다. 이강진 혼자만 생체 리듬이 무너지는 일정을 소화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행보관이 이강진을 불렀다.
"밥 먹으러 가기 전에 짐 미리 꾸리고 행보관실에 넣어 둬라. 병력한테도 그렇게 전파해."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쉬고 있는 1, 2생활관을 찾은 이강진은 행보관이 한 말을 그대로 이들에게 전달했다.
자고 있던 병사들은 억지로 눈을 뜨고서 이강진이 시키는 대 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강진도 이들과 함께 개인 짐을 꾸렸다. 그 후에 7849대대에 서 맞이하는 마지막 식사를 끝마쳤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7849대대 병사들이 탄 차량이 다시 이곳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슬슬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7849대대 병사들이 군장과 의류대를 옮기는 동안, 이강진은 행정반에서 1075대대의 잔재들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충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싶을 때.
"당직 근무 섰던 분 맞죠?"
이강진에게 당직 근무를 인수인계받기 위해 병사 두 명이 행 정반을 먼저 찾았다.
"예, 맞습니다."
"특이 사항은 있나요?"
3일 전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해결이 된 문제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여기 초소 올라갈 때 많이 힘드셨죠?"
"네, 근데 익숙해지 니까 괜찮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근무 지원 때문에 파견 온 아저씨들이 맨날 이 부대 초소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면서 막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사실 여기 초소가 악명이 높긴 해요, 하하하!"
활짝 웃는 병사는 과연 가스 조절기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 까?
순간 이강진은 입이 근질거렸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 하며 참아냈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지.'
지금은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4) > 끝 ⓒ 에바트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