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3) >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3)
첫날 근무는 이강진 입장에서 보면 꿀이었다.
12시간 근무를 선 다음에 김철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지만, 파견 첫날에 이들이 근무 인수인계를 받은 시 간이 오후 2시였다. 그러다 보니 이강진은 4시간만 당직 근무를 서다가 김철에게 당직 완장을 물려주게 되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3시 50분.
거의 4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앞으로 2시간 정도만 버티면 되겠군.'
7849대대 2중대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파견 온 1075대대 인력들밖에 없었다.
행보관은 아침부터 근무 지원 파견을 준비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인지 행보관실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행정반에는 졸지에 이강진 혼자만 남게 되었다.
컴퓨터를 만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충성, 일병 구동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근무 교대?"
"예, 그렇습니다."
"선임 근무자는 누군데?"
"추만홍 상병입니다."
마침 추만홍도 구동완의 뒤를 따라 행정반에 들어섰다.
"충성!"
"후딱 근무 준비해라. 아까 보고 왔는데 탄약고 초소까지 올 라가는 길이 엄청 험난하더라. 거리도 길고, 경사도 높아. 각오 하는 게 좋을 거다."
외곽 근무자들은 평소 근무 시간과 다르게 1시간이 아닌 2시간씩 근무를 서다가 들어와야 한다.
상당히 귀찮은 근무가 될 터.
가는 길도 험난하다고 하니, 이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게 보였다.
방탄모와 총기를 챙겨 든 이강진은 두 사람에게 준비 다 마쳤 으면 곧장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추만홍이 그런 이강진에게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행보관님은 안 계십니까?"
"행보관실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너희도 행보관님이 그냥 저 대로 계속 주무시는 게 더 좋잖아. 안 그래?"
"하긴 그렇습니다."
괜히 깨웠다가 탄약고 초소까지 순찰을 나오면 곤란해진다.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간부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소대장처럼 엉덩이가 가벼운 간부는 병사들에게 원망받기 딱 좋다.
"가자."
"예!"
이강진이 이들을 인솔했다.
1075대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지겹도록 같은 풍경만 봐 왔 던 이들 앞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신 기하기도 했다.
추만홍이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분리수거장인 거 같습니다."
"분리수거장 위치는 우리 부대하고 거의 비슷하네."
"하하, 그러게 말입 니다."
1075대대와 7849대대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다니는 재미 도 쏠쏠했다.
이강진이 경고했던 대로 탄약고 초소까지 올라가는 길이 생 각보다 굉장히 험준했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병사들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헉, 헉…… 이, 이강진 병장님, 여기는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초 소를 둔 겁니까?"
"낸들 아냐."
"이 러다가 3박 4일 동안 살 쭉 빼고 갈 거 같습니다."
"내가 더 많이 빠질걸? 너희는 6시간에 한 번 꼴로 올라가면 되지만, 나는 세 번을 올라가야 한다고."
당직은 근무 교대가 있을 때마다 인솔자 역할을 소화하기 위 해 이런 식으로 같이 산에 올라야 한다.
이 정도면 거의 훈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비 없는 비탈길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초소가 보이기 시작 했다.
정상에 오른 이강진은 후번 근무자들에게 손짓했다.
"가서 근무 교대해라."
"예, 알겠습니다."
FM이고 뭐고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에라도 주저앉아서 쉬고 싶은 마당에 그런 걸 언제 따지랴.
전번 근무자인 장태식 병장이 이강진의 등을 토닥여 줬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다, 강진아."
"병장 이강진. 감사합니다. 하지만 2시간 뒤에 여기 또 올라와 야 합니다."
정말 지옥 같은 근무다.
* * *
이강진과 1075대대 인원들이 낯선 환경에서 근무를 서느라 고통받고 있을 무렵.
7849대대 병사들은 임시 진지로 이동해 한창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대항군 포획 작전에 들어간 7849대 대.
그러나 상대는 그 유명한 귀신, 한중훈 중사였다.
그가 대항군 역할을 맡아서일까. 7849대대는 한중훈 중사가 이끄는 대항군 부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탈탈 털리기만 했다.
결국 상황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결과는 대항군의 승리였다.
진지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상당히 무겁다.
홍수훈 병장은 걱정이 앞섰다.
"라원아, 부대로 돌아가면 중대장님이 너희들 대체 뭐냐면서 또 한 소리 하겠지?"
"가만히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 중대장님이 아닐 겁니다."
"하긴
병사들의 자그마한 실수에도 금세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바로 7849대대 2중대 중대장이다.
이 번 대대 ATT 때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중대장이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나름의 사 정이 있었다.
홍수훈 병장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놈의 진급이 뭔지, 쯧쯧쯧."
진급 시즌이다 보니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간부가 병사들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 못 하는 것처럼, 병사 입장에서 진급을 앞둔 간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 한 일이다.
병사와 간부, 간부와 병사 그렇게 서로 비슷한 듯하지만 전 혀 다르다.
대항군을 단 한 명도 못 잡고, 오히려 탈탈 털리기까지 했으 니 분명 중대장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터.
원라원은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임시 진지 쪽으로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앞서 걸어가던 후임이 주변을 계속 살폈다.
"일훈아, 왜 그러냐?"
"이, 일병 마일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홍수훈이 마일운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힐긋 보면서 물었다.
"왜? 오다가 보급품이라도 잃어버렸냐?"
"아, 아닙니다!"
탄띠, 방탄모, 엑스반도, 수통 그리고 방독면 주머 니까지.
잃어버린 건 없었다.
개인화기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음? 가만……."
홍수훈이 마일운의 좋을 유심히 바라봤다.
"왠지 있어야 할 게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미묘하네."
"그, 그러니까 그게……."아무래도 홍수훈이 정확히 지적한 것 같았다.
원라원도 마일운의 좋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뭔가가 이상하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건지 단번에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이건 대충 눈치챘는데…….
원라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일운, 너 가스 조절기 어떻게 했냐?"
원라원의 말을 듣자마자 홍수훈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래! 가스 조절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없네! 어쩐지 이상하 다 싶었다."
한편 마일운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잃어버린 거 같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경악을 금치 못하는 분대원들.
일 났다.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될 물건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원라원은 분대원들에게 외쳤다.
"왔던 길 다시 돌아간다! 바닥에 가스 조절기 떨어져 있을지 도 모르니까 샅샅이 찾도록 해!"
대항군 못 잡은 것보다 더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닥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불행하게도 가스 조절기는 보이지 않았다.
홍수훈이 난색을 표했다.
"큰일이네. 이놈의 가스 조절기는 어디로 튄 거야. 일운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정말 기억 안 나냐?"
"일병 마일운! ……대항군 훈련 끝나고 복귀하려고 할 때 알아 차린지라…….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거의 죽을죄를 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치는 마일운이었다.
이미 원라원과 선임들한테 잔소리를 들을 만큼 들었다. 더 이 상 마일운에게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그리고 지금은 마일운을 갈구는 일보다 가스 조절기를 어떻 게 찾아내야 할지 이게 더 중요한 일이다.
후임병이 원라원에게 조용히 물었다.
"원라원 병장님, 다시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됐다."
마음 같아선 원라원도 더 찾고 싶었지만, 이들에게 그런 시간 적 여유는 없었다.
"복귀가 늦어지면 안 되니까. 일단 부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일 운."
"일병 마일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답하는 마일운을 보면서 원라원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스 조절기 잃어버린 거, 간부들한테 최대한 숨겨라. 어쩌면 텐트 근처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찾아보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다.
그래도 못 찾겠다 싶으면… ….
'그땐 털릴 각오해야지.'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 * *
가스 조절기 사건 때문에 원라원과 분대원들이 한창 난리를 피울 때.
7849대대는 조용했다.
병사들이 없다 보니 너무 조용해졌다. 이 넓은 대대에, 이 넓 은 막사에 소수의 병사들만 있으니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
야간 근무를 맡게 된 김철은 하품을 하면서 부소대장과 함께 행보관실에 마련되어 있는 티비에 집중했다.
오후 9시. 아직 취침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미 꿈나라로 향한 지 오래다.
외곽 근무는 3교대로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근무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가급적 짬이 날 때마다 최대한 잠을 자 두려고 노력했 다.
한편 생활관에서 나온 이강진은 곧장 행정반을 찾았다.
"부소대장님, 저도 티비 같이 봐도 됩니까?"
"어, 그래. 라면도 같이 먹을래? 안 그래도 철이가 라면 취식 하자고 하던데."
"함께하겠습니다!"
마침 출줄한데 잘됐다.
김철과 함께 미리 추진해 온 컵라면 3개를 꺼냈다.
팔팔 끓는 정수기 물을 담고 뚜껑을 덮어 뒀다. 4분쯤 되었을 때, 각자 하나씩 라면을 들고 다시 티비 앞으로 모였다.
"후르릅!"
뜨거운 면발과 국물이 이강진의 속을 달랬다.
티비를 보면서 먹는 컵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부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오로지 파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이다.
부소대장이 이강진을 보고서 물었다.
"강진아, 넌 안 자도 되냐?"
"이것만 먹고 다시 자려고 합니다."
다른 근무자들과 다르게 이강진은 저녁 10시부터 새벽 6시까 지 풀(Full) 잠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였다.
라면 하나를 다 해치운 뒤 9시 40분쯤 되었을 때 이강진은 행 정반을 벗어났다.
'슬슬 자러 가 볼까.'
그전에 화장실부터 먼저 들리기로 했다.
'라면 먹었으니까 배 좀 비우고 자야지.'
2사로 칸을 이용하기로 했다.
문을 열자 갑자기 밑에서 '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이강진의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뭐야."
처음에는 문 경첩에 뭔가가 부딪친 줄 알았다.
하나 자세히 들어 보니 그건 아니었다.
바닥에 쇳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사 같은 게 굴러다니네."
그런데 나사 치고는 크기가 제법 컸다.
뭔지나 확인해 보자는 심산으로 굴러다니는 무언가를 집어 든 이강진.
그것을 본 순간.
이강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01, 이거, 설마……!"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틀림없이 '그것'이다.
"가스 조절기잖아!"
부대가 뒤집어질 만한 발견을 하고 말았다.
< 제75화. 라이벌과의 만남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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