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3화 군인이란 (1) >
제73화. 군인이란 (1)
이용진과 통화를 끝낸 이강진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 었다.
'받을까 모르겠네.'
최영고의 넷째 누나, 최영혜였다.
생각보다 금방 전화를 받았다.
-네, 최영혜입니다.
"안녕하세요, 영혜 씨. 저, 이강진입니다."
-어머머머, 강진 씨!
이강진이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건 적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 이었다.
최영혜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녀가 이강진에게 이성적으로 호 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강진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나 연애 감정 때문에 최영혜에게 전화를 건 게 아니다. 게 다가 이강진에게는 한지윤이 있지 않은가.
외식 사업을 벌일 때, 그녀를 마케팅 쪽으로 고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이번 휴가 때 해 볼 예정이다. 그래 서 전화를 건 것이다.
"제가 다음 주에 휴가를 나가는데, 혹시 화요일 이후에 시간 되는 날 있나요?"
같은 청주에 사니까 이용진하고 약속을 잡는 것보다는 수월 할 것이다.
최영혜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들려줬다.
스케줄을 확인한 뒤, 여유가 있는 날짜가 언제인지 이강진에게 알려 줬다.
-화요일 저녁하고 수요일 저녁, 이렇게 가능할 거 같아요. 점심도 가능하긴 한데…… 회사 점심시간이어서 멀리는 못 나갈 거 같아요.
"그럼 제가 화요일 점심 때 회사 근처로 가겠습니다. 주소만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최영혜와도 약속을 잡아 뒀다.
이강진에게 허락된 시간은 6박 7일.
슬슬 기초공사를 시작할 타이밍이다.
유격이 끝난 주말은 대부분 장구류를 손질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쉬어도 쉬는 거 같지 않았다.
당직사관이 하필이면 행보관이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었 다.
방독면을 세척하고, CS복은 단체로 세탁한 다음에 말리고.
일광건조는 덤이었다.
그렇게 다른 병사들이 장구류 손질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 강진과 기운상은 각각 A급 전투복과 전투화를 손질하느라 바빴월요일에 바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진 상병님, 구두약 좀 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상관없어. 많이 있으니까 써라."
"감사합니다!"
라이터로 구두약에 불을 붙였다. 그것을 전투화에 잔뜩 묻힌 후 계속해서 천으로 닦고 또 닦았다.
휴가 때에만 꺼내서 신는 A급 전투화. 이것을 볼 때마다 병사 들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열대에는 이강진과 기운상 말고도 몇몇 병사들이 나와서 이 들처럼 자리를 잡고 전투화에 광을 내고 있었다.
전부 다 월요일에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이었다.
'내일 휴가 많이 나가네.'
한 7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유격 때문에 그동안 휴가가 많이 밀렸다. 휴가 대기자들이 많 았던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월요일날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 중에 가장 선임은 수송분과 소속인 조형욱 병장이었다.
조형욱은 전투화를 대충 손질했다.
같이 전투화를 닦으러 나온 수송분과 병사가 나온지 5분도 안 돼서 막사로 돌아가려는 조형욱에게 물었다.
"조형욱 병장님, 벌써 끝나셨습니까?"
"아니, 그냥 평소처럼 했어."
"광 안 내셔도 됩니까?"
"광은 무슨. 전투화에 불광을 내든 물광을 내든 우유광을 내 든, 일반인들이 알아주기를 하냐. 그냥 군인들끼리나 서로 알아 보는 거지, 뭐. 이 럴 시간에 그냥 들어가서 잠이나 잘란다."
말년쯤 되다 보니 굳이 전투화에 광을 내야 할까 하는 현자 타임이 몰려온 듯했다.
어찌 보면 조형욱의 말이 맞다.
광을 열심히 낸다고 포상 휴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전역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현실적으로 변해 간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비해야 한다.
전투화를 내려다보던 이강진.
그러나 이내 다시 천 조각을 들었다.
'하던 건 해야지.'
* * *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 휴가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총 8명.
행보관은 나란히 행정반으로 들어와 줄을 선 휴가자들을 보 면서 감탄을 흘렸다.
"많기도 하다, 많기도 해. 휴가 나가는 놈들이 왜 이리도 많아."
그렇다고 휴가 나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격 때 다들 고생 많이 했다는 건 행보관도 잘 안다. 오늘 나 가는 휴가만 보고 열심히 유격을 뛰었을 텐데, 그들에게 희망을 앗아가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게다가 행보관이 그렇게 잔혹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나가서 전화, 하루에 한 통화씩 꼭 해라. 그리고 술 마시고 사고 치지 말고. 저번에 휴가 나가서 꽐라 된 병사가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서 대대적으로 뉴스에 나온 거,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예!"
"우리 부대에서 그런 일 벌어지면…… 복귀하고 나서 어떻게 될지 각오해라."
"예, 알겠습니다!"
사고 치지 마라. 행보관이 이들에게 하는 유일한 조언이었다. 신고를 마치고 위병소를 통과한 휴가자들.
위병소 앞에서 다수의 콜택시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중대뿐만 아니라 다른 중대들 역시 오늘 휴가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부른 택시들이 한꺼번에 위병소로 집합하다 보니 때 아 닌 혼란이 빗어졌다.
콜택시 차량 번호를 미리 확인해 둔 이강진 덕분에 1중대원 들은 다른 중대원들보다 빠르게 자신들이 탈 택시를 찾아냈다.
"아저씨, 시내로 가 주세요!"
빠른 속도로 부대와 멀어지는 병사들.
창밖을 통해 점점 사라지는 부대를 보면서 휴가자들은 속이 시원함을 느꼈다.
어서 빨리 이 산골짜기를 벗어나고 싶다! 이런 마음뿐이었다.
* * *
택시에서 모두 내린 1중대원들은 일단 한 자리에 모였다.
조형욱은 자신을 포함해서 휴가자들이 8명이나 한꺼번에 모 인 장면을 군 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목격했다.
"이야, 유격 훈련 끝난 다음에 나오는 첫 휴가가 이 런 거였구 나. 누가 보면 분과 외박 나온 줄 알겠네."
분과 외박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강진과 기운상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이들은 분과 외박에 대해서 위험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오종한의 결승전 무대를 보기 위해 서울까지 점프했었던 기 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형욱이 병사들에게 물었다.
"모처럼 다 같이 휴가 나왔는데, 아점 한 끼 하고 들어갈까?
술 땅기는 사람 있으면 낮술도 괜찮고."
"좋습니다!"
"형욱이 형이 사는 거야?"
"오, 진짜입니까?"
"조형욱! 조형욱! 조형욱!"
흐름이 자연스럽게 조형욱이 한턱 쏘는 걸로 흘러가기 시작 했다. 이런 일은 예상 못했지만,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낸 데다가 가장 선임이기도 했기에 조형욱은 마지못해 외쳤다.
"그래, 내가 쏜다! 근처에 맛집 있으면 추천해 봐라."
"상병 이강진, 제가 잘 아는 가게가 있습니다."
이 일대에 들리는 것만 벌써 4년 차다. 맛집이란 맛집은 웬만 하면 다 섭렵하고 있는 이강진이 앞장서기로 했다.
뒤에서 조형욱이 이강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안 비싼 곳으로 부탁하마.'라고 말한 건 덤이었다.
군인의 지갑 사정을 이강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설령 너무 많 이 나온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부족한 만큼 이강진이 보탤 생각 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진이 이들을 안내한 곳은 파전으로 유명한 가게였다. 막걸리와 파전, 국민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식사나 술을 하기에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가게는 꽤 한산 했다.
자리를 잡는 동안, 이강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원래 이 가게, 소문난 전국구 맛 집이어서 평소에는 30분 정도 줄 섰다가 겨우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정도야?"
"예, 한 번 맛보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아실 겁니다."
파는 음식이 파전하고 순대국밥, 꽁치찌개밖에 없었기 때문 에 메뉴를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강진이 강력 추천한 메뉴는 역시 막걸리와 파전이었다.
"이모! 여기 주문 좀 받아 주세요."
"네, 가요!"
테이블에 음식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메인 메뉴인 파전이 나오자 병사들은 잔에 막걸리를 채우고 동시에 건배를 했다.
'짠!' 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렸던 적이 있을까.
유격 훈련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 마시는 술과 안주라 그런 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크으! 좋다!"
이제 더 이상 휴가를 나올 일이 없는 조형욱은 술과 분위기에 벌써부터 취할 것 같았다.
"이 렇게 맛있는 곳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미리 알았더라면 진 작 자주 왔을 텐데."
아쉬워하는 조형욱에게 이강진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저만 알고 있는 맛집이 더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정리해서 알려 드릴 테니, 전역하고 나면 이곳으로 맛집 투어하 러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미쳤냐? 난 전역하고 나면 부대 있는 방향은 당분간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조형욱의 선언을 듣고 병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대부분의 예비 전역자들이 조형욱과 같은 말을 했다.
아마 이강진도 나중에 누군가가 다시 부대로 놀러오라고 하 면, 지금의 조형욱과 같은 말을 흘릴지도 모른다.
* * *
기분 좋은 술자리를 마친 뒤, 차 시간이 애매한 병사들끼리 남 아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기로 했다.
이강진과 기운상, 조형욱을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의 병사들이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파전 가게와 다르게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때 기운상이 창가 쪽을 가리켰다.
"이강진 상병님, 저기 자리 하나 남습니다."
"오, 나이스."
최소 인원이 다섯 명 이상이 되어야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었다. 마침 정원 조건을 딱 채우는 인원수였다. 이들은 주문을 마치고 곧장 테이블을 차지했다.
민간인들 사이에서 군인 무리가 섞여 있으니 왠지 모를 어색 함이 느껴졌다.
조형욱은 자신이 입은 군복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놈의 군복, 빨리 벗어 버리고 싶다."
이강진이 그의 말을 받아 줬다.
"전역일이 정확히 언제십니까?"
"말년 휴가 갔다 오고 바로 다음 날이 전역일이니까……. 10일 뒤?"
"얼마 안 남았지 말입니다."
정말로 며칠 안 남았다. 그러나 말년 병장 입장에선 10일도 한 참 뒤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남은 10일 중 9일을 휴가로 보내게 되어서 다행이지, 이 10일 전부를 부대 내에서 보냈다면 조형욱은 아마 멘탈이 나 갔을지도 모른다.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 테이블에 올려 뒀던 진동 벨이 울렸다.
기운상과 후임급 병사 한 명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가 받아 오겠습니다."
"땡큐."
커피 한 잔 마시고, 이강진은 바로 서울로 직행해서 이용진을 만나러 가면 된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다시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대학생 무리로 보이는 자들이 이강진 일행에게 말을 걸어왔
"네, 무슨 일이십니까?"
이강진이 대표로 답했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대학생이 그들에게 난데없이 이런 부탁을 해 왔다.
"죄송한데, 혹시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왜?
< 제73화. 군인이란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