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2화. 큰 산을 넘다 (2) >
제72화. 큰 산을 넘다 (2)
1분대에서 짬순으로 정렬을 한다면 단연 서일주가 먼저다. 병사들 앞에 선 서일주.
그는 안두목이 행보관에게 휴가 좀 달라고 솔직하게 말을 했 던 모습을 머릿속에 다시금 떠올렸다.
'혹시 나도?' 하는 생각도 같이 든 것이다.
"병장 서일주! 행보관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중대장이 옆에 앉은 행보관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허허, 행보관님, 인기가 많으십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군요, 흐음
아직까지 행보관에게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뿜어댄 병사는 없었으니, 적어도 나쁜 건 아닌 듯했다.
서일주의 얼굴에 기대감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도 휴가 주시 면 안 되겠습니까!"
행보관은 칼같이 대답했다.
"응, 안 된다."
"……잘못 들었습니다?"
너무 빨리 끝나 버 린 탓에 서일주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안두목 병장은 줬는데. 왜 본인은 안 된다는 건가?
어이가 없는 건 오히려 행보관이었다.
"야, 이 녀석아. 너한테도 휴가 주면, 그다음에 나올 녀석들도 똑같이 '저도 휴가 주십시오!'라고 말할 게 뻔하잖냐."
"그, 그러면 딱 저까지만……."
"원래 이런 건 복불복이다. 첫 타를 끊은 사람이 유리한 거야.
넌 국물도 없으니까 할 말 없으면 그냥 들어가라."
안두목을 따라 용기를 내 본 서일주였지만, 행보관에겐 어림 도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서일주를 보면서 안두목은 키득키득 웃었다.
* * *
드디어 이강진의 차례가 왔다.
이강진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간부들한테도, 병사들한테도 불만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할 말 없다고 그냥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다. 기왕 재 미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김에, 이강진은 이 분위기를 한층 더 업시켜 보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 유격 끝나고 휴가 나갈 거다. 부럽지?"
노골적인 도발 앞에 병사들은 분노했다.
특히 서일주처럼 말년 휴가가 짧은 병장들의 리액션이 가장 컸다.
"저 빌어먹을 녀석!"
"휴가 많다고 자랑하는 거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말년 병장들의 추임새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 왔다.
비축해 둔 휴가로 따지면 이강진을 넘어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이강진은 일부러 이런 장난스러운 도발을 한 것 이다.
이강진의 뒤를 이어 후임들도 하나하나씩 발표를 하기 시작 했다.
일병 라인을 지나서 이등병들의 차례가 도래했다.
최영고가 병사들 앞에 섰다.
그의 걸음에 힘이 실려 있었다. 입이 벌써부터 씰룩거리는 것 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보였다.
"선임분들에게 고하겠습니다! 아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짝 긴장한 선임급들.
간부가 보고 있는 자리다. 아무리 웃자고 하는 소리라도 내무 부조리에 연관된 말이 나올 경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걸 알고 있기에 선임들은 간부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최영고는 내무 부조리보다 더 심한 고민을 앓고 있었다.
"저희 누나들 소개시켜 달라는 말 좀 그만 해 주시면 안 됩니 까아아!"
한이 맺힌 소리였다.
이것 때문에 최영고는 미칠 노릇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누나 소개시켜 달라고 하고, 물 마시는데 누나 소개시켜 달라고 하고. 가장 괴로운 경우는 역시 근무를 나설 때였다.
1 시간 가까이 누나에 대한 질문만 들어오는데, 최영고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주의를 줬다.
"영고가 힘들어 하잖냐. 후임 가족들한테 그만 눈독 들여라.
알겠나."
이쯤 되니 미안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긴 영고를 너무 많이 괴롭히긴 했다.
나중에 최영고가 마음의 편지로 긁어 버리기 전에 선임들은 이 이상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1분대의 막내 조은석의 차례가 돌아왔다.
조은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위치로 향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이강진과 성태강은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기자 줄신이다 보니 견제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조은석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갑자기 중대장 쪽을 바라봤
"중대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
행보관은 몰라도, 중대장을 대상으로 마음의 소리를 들려준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좀처럼 없는 중대장 픽(Pick)에 당사자조 차 당황했다.
"중대장님!"
조은석은 자신의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냥 올린 게 아니었다.
팔로 하트 모양을 형상화하며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합니다!"
뜬금없이 이게 뭔 말인가.
순간 이강진은 왜 조은석이 중대장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 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사단장한테 사탕발림한 거 그대로 따라하려나 보네.'
장교에게 서비스 멘트들을 계속 날리면, 기분이 좋아져서 포상 휴가를 줄 것이다. 이강진의 작전을 그대로 따라해 보기로 한기
조은석이었으나
"어, 그래. 고맙다."
이게 끝이었다.
이강진이 포상 휴가를 따낼 때와는 경우의 수가 너무 달랐다.
이강진은 카메라 앞에서 사단장을 추켜세웠다. 스케일 자체 가 달랐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 조은석.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조은석은 '뭐가 부족했지?'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혼자 고민과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조은석을 보면서 이강진은 혀를 찼다.
'쯧쯧, 아직 멀었네, 멀었어.'
짬을 먹다 보면 알아서 포상 휴가로 향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
지금의 조은석에게는 시기상조였다.
유격 5일 차.
드디어 유격장에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아침 구보를 뛰는 병사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오늘따라 세상이 참아름다워 보였다.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안도감 때 문이었다.
하나 아직 이들의 위치는 산 언저리에 불과하다.
아직 복귀 행군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에 이들은 연병장으로 향했다.
10분간의 짧은 퇴소식 예행연습을 마쳤다. 이후에 본격적인 퇴소식이 거행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재창 등 기본 식순이 끝났다.
대대장이 마이크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드디어 대망의 유격왕이 누군지 발표되었다.
"성태강 일병, 앞으로."
"일병 성태강!"
모두의 예상대로 성태강이 유격왕을 차지하게 되었다.
상장과 함께 4박 5일 포상 휴가를 받게 된 성태강. 아쉽게 유 격왕을 놓치긴 했지만, 이강진은 크게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이강진은 포상 휴가 때문에 유격왕을 노렸던 것이다.
그가 바랐던 포상 휴가는 이미 손에 들어왔으니, 성태강이 유격 왕을 차지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물론 이강진이 유격왕까지 차지했더라면 4박 5일 포상 휴가 를 자그마치 두 개나 손에 거머쥐게 되었을 것이다.
'그건 너무 욕심이지.'
하나면 된다. 휴가만 무식하게 많이 쌓아 두면, 나중에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하고 전역하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
다음은 대대장의 차례다.
"대대장님 훈시."
단상에 선 대대장은 보다 늠름해진 병사들의 얼굴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야 군인다운 얼굴이 되었군. 다들 고생했다는 의미로 박 수!"
짝짝짝짝짝!
우렁찬 박수갈채가 한 차례 끝난 뒤, 대대장은 이번엔 조교들 과 교관을 가리켰다.
"수고해 준 조교들과 교관에게도 고맙다는 뜻으로 박수 한 번 보내 주도록 하지!"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조교들은 괜히 머쓱한 듯 볼을 긁적이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 로 던지거나 했다.
대대장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교관이 다시 한번 단상에 올 라섰다.
"4박 5일 동안 정말 다들 고생 많았다. 이 번 유격 훈련이 단순 히 힘들고 괴로웠던 훈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상!"
실제로 교관을 맡았던 2중대 소대장은 유격 훈련을 통해 자 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나약했던 자신을 버리고 군인다운 자신을 찾게 된 것이다. 어쩌면 소대장이 병사들보다 얻어가는 게 더 많을지도 몰랐다.
* * *
텐트로 돌아온 병사들은 빠르게 오침 준비를 서둘렀다.
오후 6시에 맞춰서 복귀 행군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미리 잠을 자 둬야 한다.
하나둘씩 자리에 눕는 병사들. 그때 익숙한 얼굴이 텐트를 찾 았다.
"애들아, 나 왔다!"
백우호.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
"충성!"
"고생하셨습니다, 백우호 상병님!"
"그래, 니들도 고생했다. 강진이, 너도 수고 많았어. 조교들 사이에서 너, 엄청 유명해졌더라."
"내가? 왜?"
자신의 이름이 왜 조교들 사이에서 계속 언급되었는지 궁금했다.
"모르는 척하긴. 촬영 팀 앞에서 사단장님 열심히 똥꼬 빨아서 4박 5일 포상 휴가를 거저 따냈는데, 안 유명해지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하하, 그것 때문이었냐?"
"하여튼 넌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유격 때마다 꼭 포상 휴가 하나씩은 챙겨 가는구나."
안 그래도 빡센 훈련 받으러 왔는데, 휴가 없이 그냥 빈손으 로 막사로 복귀하면 억울하지 않겠나.
심지어 이강진은 재입대로 다시 군대에 오게 된 남자다. 그 억 을함이 배가 될지도 몰랐기에 이강진은 어떻게든 휴가를 따내 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결과가 좋게 나와서 다행이었다.
수다는 이것으로 끝. 이제 슬슬 잠을 청할 때다.
천막은 이미 걷어 낸 지 오래다. 밑에는 갑바 천만 깔아 둔 상 태였기에 하늘이 훤히 보였다.
'참 맑네.'
하늘을 지붕 삼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사르르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 * *
오후 5시에 눈을 뜬 병사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4박 5일 동안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했다.
의류대는 전부 트럭 뒤에 실었다.
행보관이 먼저 부상자들과 함께 차를 타고 막사로 떠났다.
중대장은 병력을 데리고 연병장으로 향했다.
본부중대부터 3중대까지.
1075대대 전원이 모였다.
대대장이 본부중대 중대장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지레 겁을 먹은 조은석이 이강진에게 물었다.
"저기 이강진 상병님, 혹시 입소 행군 때 올라왔던 길 그대로 내려가야 하는 겁니까?"
"아니, 다른 쪽이 있어. 거긴 멀쩡한 길이니까 내리막길에 미 끄러질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조은석은 이 런 질문을 꺼낼 뻔했다.
멀쩡한 길이 있는데 입소 행군 때 왜 굳이 험난한 오르막길을 올라서 온 건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훈련이니까.
어찌 보면 만능 대답이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훈 련이 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웬만한 건 퉁칠 수 있다.
물론 이건 군대에서만 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사회에 나가서 이런 말을 했다간 뭔 개소리냐며 쌍욕을 먹을 수 있다.
복귀 행군길에 오른 병사들.
사방에서 파이팅을 외쳤다.
기합을 넣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 뎠다.
특히 이강진은 걸음이 유독 힘찼다.
이번 복귀 행군만 끝내면…….
'내 인생에 더 이상 유격은 없다!'
< 제72화. 큰 산을 넘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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