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0화. 마지막 유격 (1) >
제70화 마지막 유격 (1)
이번 진지 공사 주간은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행보관이 특별히 지급한 산삼차 덕분이었다.
행정반에 대량의 산삼차를 끓여 둔 행보관은 병사들이 행정 반을 방문할 때마다 한 잔씩 마시고 가라고 권유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행보관이 만든 산삼차를 맛볼 수 있었다.
산삼차의 위력일까. 고된 제초 작업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힘 들다는 느낌이 크게 들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불끈불끈 샘솟는 그런 기분이었다.
대신 부작용도 있었다.
-아이, 씨! 스파링 누가 가져갔어!
-이번 달 거 내놔, 이번 달 거!
-하, 밤에 잠도 안 오네.
산삼차의 약발을 너무 잘 받은 병사들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산삼 덕분에 힘들 거라 예상되었던 진지 공사는 아주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하나 진지 공사가 끝났다고 군 생활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이다음 진지 공사와 제초 작업보다 더 어마어마한 녀석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보관이 집합한 분대장들 앞에서 거의 사형 선고와 비슷할 만큼 위력적인 발언을 꺼냈다.
"다음 달 둘째 주에 유격 훈련 일정이 잡혔다."
유격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병사들은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
이제 막 입대한 이등병부터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까지. 모두 가 다 공평하게 싫어하는 유격 훈련이 드디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트 군인으로 평가받는 이강진조차도 유격은 극도로 혐오 스러웠다.
"유격 훈련 전까지 일과 시간 끝나고 체력 단련할 시간이 따 로 주어질 테니까. 그때 분대원들이 미리 체력 길러 둘 수 있게 교육시켜 둬라. 대대장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고 있겠 지?"
분대장들은 곧장 입을 모아 정답을 이야기했다.
"열외 입니다."
"잘 아는군."
행군 때에도 '열외 없이 완주!'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강조했 다.
이번에도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유격 체조 같은 것도 미리 후임들에게 알려 주고. 너희가 싫 어하는 동작 있잖냐."
"8번 온몸비틀기입니다."
14개의 PT 체조 중에서 병사들이 가장 기피하고 싶은 동작이 바로 8번 은몸비틀기다.
여기서 병사들 대부분이 포기 선언을 하고 만다.
"그것도 미리 후임들에게 잘 알려 줘라. 그리고… … 아, 이걸 잊 고 있었군."
중요한 안건이 남았다.
"유격 조교를 선 발해야 하는데. 희망자 받아서 내일까지 나에게 명단 적어서 제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작년에는 이강진이 유격 조교로 추천을 받은 바 있었다.
그때는 유격왕을 노리는 게 더 많은 포상 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그 기회를 포기했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사실 고민도 하기 전에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난 지원 못 하지.'
분대장이 조교한다고 분대원들을 놔두고 유격 조교로 지원하기엔 좀 그랬다.
남아서 분대원들을 통솔해야 하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이번에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야겠군.'
그래도 아쉽진 않았다.
작년처럼 이번에도 유격왕을 노리면 되니까.
* * *
분과별 간담회 시간에 이강진은 분대원들에게 유격 조교 희 망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전했다.
설명이 끝난 뒤에 백우호가 물었다.
"강진이, 넌 이번에 조교 안 갈 거야? 저번에도 제안 들어왔는 데 안 간다고 했었잖아."
"난 분대장이니까. 분대원들만 놔두고 가 버리면 좀 그렇지."
유격만큼 멘탈이 갈리는 훈련도 드물다.
이강진은 남아서 분대원들의 멘탈을 책임지는 역할을 자처할 셈이었다.
서일주가 그 역할을 해 주진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만 하더 라도 '말년에 유격이라니!'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 대 고 있는데, 그에게 무슨 기대감을 가지랴.
그렇다고 백우호 혼자에게 모든 걸 맡기기에는 짐이 너무 컸 다. 그래서 이강진은 이번에도 유격 조교를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지원 안 해도 상관없다.
"이번에도 유격왕을 노릴 거니까."
"오, 2회 연속 유격왕 가는 거냐?"
"그렇게 된다면 좋긴 하겠지."
전무후무한 기록이 완성될 것이다.
하나 유격왕을 노리는 이는 또 있었다.
성태강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 강진 상병 님, 이 번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나한테 도전하는 거냐? 유격도 안 뛰어봤으면서?"
작년 챔피언 이강진에게 출사표를 던지는 도전자, 성태강. 이강진은 여유로운 태도로 성태강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좋지. 상대해 줄 테니까 마음껏 덤벼 봐라."
경쟁은 의욕에 불을 지펴 주는 역할을 한다.
성태강이 적극적으로 나오니 이강진도 절로 불타오르기 시작 했다.
사실 이강진에겐 원조 라이벌이 있었다.
백우호. 그도 이강진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않을까 예상했으 나.
그는 이번엔 다른 노선을 타기로 했다.
"강진아, 유격 조교, 내가 지원할게."
의외였다.
백우호가 유격 조교를?
이강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유격 조교가 마냥 편한 건 아니야. 작년에 너도 봐서 알지?
유격 훈련 1주 전에 먼저 가서 일반 병사들보다 더 고강도의 훈련을 받아야 해."
"모를 리가 있겠냐. 다 알고서 지원하는 거야."
유격 조교를 지원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선임을 유격 훈련 때 한 번 제대로 굴려 보 려고 하거나 아니면, 호기심 때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슬슬 말년을 대비해서 포상 휴가 좀 쟁여 두려고."
이발병 포상 휴가가 있긴 하지만, 백우호는 그것만으론 부족 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유격 훈련 때 조교 로 일하면서 휴가를 미리 챙겨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강진은 미리 백우호에게 경고했다.
"많이 빡셀 텐데."
"괜찮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어."
강한 자신감을 내뿜는 백우호였다.
백우호가 체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지도 좋은 편이다.
그리고 래퍼 생활을 하다 와서 그런지 끼도 많고 대인 관계도 나쁘지 않아서 유격 조교로 가도 크게 힘들어 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래, 그럼 희망자 명단에 네 이름 적어 둘게."
"땡 큐."
"우호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백우호 말고 지원자는 더 이상 없었다.
기운상이 미리 백우호에게 떡밥을 깔아 뒀다.
"백우호 상병님, 일부러 저희만 막 굴리시고 그러시면 안 됩 니다?"
"그거야 내 마음대로지."
씨익 웃는 백우호. 그의 미소에 병사들은 의미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유격 조교로 떠나게 될 최종 인원이 발표되었다. 총 7명. 그중에 백우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격 조교로 뽑히게 된 병사들은 유격 훈련 1주 전에 미리 유 격장으로 훈련을 받으러 떠난다.
짐을 챙긴 백우호는 분대원들과 짧은 이별 인사를 주고받았
"유격장에서 보자!"
"조심해서 가라, 우호야."
"오냐!"
이강진의 배웅을 뒤로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뗐다.
솔직히 이강진은 백우호가 유격 조교로 지원할 줄은 몰랐다.
'무슨 변심인지 모르겠네.'
마지막 유격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변화를 족구한 것일지도 몰 랐다.
생각해 보면 유격 조교를 해 볼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다.
재입대를 하지 않는 이상, 언제 빨간 모자를 써 볼까.
이강진은 딱히 거기에 미련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백우호는 은근히 써 보고 싶었나 보다.
"하여튼 우호, 저 녀석도 별종이야."
특이한 사람들만 모이는 1분대다웠다.
* * *
백우호가 조교 훈련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병사들은 유격 훈련을 대비해 열심히 체력 단련 훈련을 실시 하고 있었다.
체력 단련이라고 해 봤자 진짜 훈련처럼 체계적이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그냥 죽구나 농구, 족구 같은 구기 종목으로 체력 단련을 하 거나 아니면 헬스장, 연병장 뛰기 등 각자만의 방식으로 체력을 기르는 시간을 가졌다.
이강진은 주로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성태강도 마찬가지 였다.
날씨가 더운지 성태강은 상의를 탈의한 채 웨이트 운동을 펼 쳤다.
다부진 상체가 드러났다.
한때 유행했던 '짐승돌'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성태강.
이강진은 성태강의 몸을 힐끗 훔쳐봤다.
"짜식, 몸 좋다?"
"군대 와서 하는 거라곤 운동밖에 없다 보니 아이돌로 활동할 때보다 몸이 더 좋아진 거 같습니다, 하하하!"
군대에 와서 얻게 된 긍정적인 결과물이었다.
연예인은 외형이 생명이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는 더 그렇다.
남자 아이돌 중에서도 태강은 몸매가 준수한 편이었다. 그가 상의 탈의를 한 번 할 때마다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 모습을 조은석이 봤다면, 그리고 그의 손에 사진기와 노트 북이 손에 들려 있었다면, 분명 지금 성태강의 모습을 어떻게든 기사로 써서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불끈거리는 성태강의 잔근육들.
그는 유격왕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꾸준히 운동하고 또 운동 했다.
물론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태강아."
"일병 성태강."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 주마."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이강진은 그에게 충고를 했다.
"몸이 좋다고 무조건 유격왕이 되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바로 '의지'다."
유격왕이 되겠다는 의지.
이 의지만 있으면 된다.
비록 이강진이 축구 선수 출신이긴 하지만, 이강진보다 더 날 렵하고 빠르고 힘센 사람들은 대대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격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강한 의지였다.
물론 3년에 가까운 군 생활에서 얻은 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성태강은 이강진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의지라…… 명심하겠습니다."
"서로 재미있게 경쟁해 보자."
"예, 알겠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짬을 지닌 이강진과 패기의 성태강.
이 승부의 결과는 이강진조차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 * *
유격 훈련을 하루 앞두고 병사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추진 상태였다.
"오렌지 주스가 없다고?"
서일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추진 담당이었던 곽분섭은 서일주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어떻게든 사수해 보려고 했는데, 이미 다른 중대 아저씨들이 다 쓸어 갔습니다."
"오렌지 주스 없이 어떻게 4박 5일을 버티냐, 하……."
탄산보다 오렌지 주스를 더 좋아하는 서일주에겐 상당히 절 망적 이었다.
그래도 없는 걸 만들어 올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얌전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렌지 주스 말고 다른 것들은 다 챙겼다. 맛다시라든 지, 과자라든지, 참치라든지. 음료도 거의 종류별로 다 챙겼다. 오렌지 주스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강진은 추진해 온 것들을 하나하나씩 다 살폈다.
"좋아, 이거 없으면 큰일이 니까 잊지 않도록 미리 의류대에 넣 어 둬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밤에 잘 때 생각보다 많이 추울 테니까 야상 아니면 깔깔이, 둘 중 하나는 꼭 챙겨 가. 괜히 가서 감기 걸리지 말고. 선임급들이 후임들 한 명씩 맡아서 짐 잘 챙겼나 일일이 다 확 인해라. 부족한 거 있으면 지금 당장 말하고."
"예!"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입대 전에 최대한 다양하게, 많은 음식들을 먹어 둬야 그나마 덜 후회한다는 마음가짐처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4박 5일을 무사히 버텨 낼 수 있다.
< 제70화. 마지막 유격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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