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9화. 돌아온 제초의 계절 (1) >
제69화 돌아온 제초의 계절 (1)
분대장은 주기적으로 분대원들과 개인 면담을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특이 사항이 있다면 바로 중대장이나 행보관에게 보 고해야 한다.
서 일주나 백우호, 아니 면 이제 짬 좀 된 기운상이나 성태강의 경우는 그렇게까지 집중적으로 개인 면담을 진행하진 않았다.
주로 후임급들의 개인 면담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곽분섭부터 개인 면담을 진행하기로 한 이강진.
한때는 관심 병사 리스트에 올릴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곽분섭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밝 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이강진 상병님, 나중에 전역하실 때 되면 군종병을 누구한테 물려주실 생각이십니까?"
"군종병? 뜬금없이 그건 왜?"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한테 물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강진은 어이가 없었다.
기독교에 관심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군종병을?
그가 욕심을 내는 이유가 뭔지 이강진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성가대 아가씨들 때문이냐?"
"헤헤헤, 그렇습니다."
솔직한 대답이 었다.
한지윤이 교회 일을 못 돕다 보니 요즘에는 주말마다 성가대 사람들이 목사를 돕기 위해 종교 행사에 출근 도장을 꾸준히 찍 고 있었다.
성가대원들 중에서 곽분섭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이 있었다.
요즘 곽분섭은 주말마다 그녀를 보는 낙으로 군 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여자 때문에 군종병을 달라니.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에이, 이강진 상병님, 원래 사랑의 힘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전 신께 충성을 다 바칠 자신이 있 습니다!"
곽분섭은 거수경례 자세를 취하면서 충성 구호 대신 '아멘!'을 외쳤다.
그 모습에 이강진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도중에 관두고 말았다.
'아니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구나.'
생각해 보니 이강진도 같은 경우였다.
한지윤에게 반해서 교회를 나가게 되지 않았나. 게다가 그녀 를 더 자주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예정에 없던 군종병까지 차게 되었다.
이강진이 곽분섭을 욕할 입장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곽분섭에게 공감이 가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 금 당장 군종병을 물려줄 순 없었다.
"아직 나 전역하려면 멀었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마."
그리고 그사이 곽분섭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목사를 생각한다면, 책임감 있게 종교 행사를 도와줄 후임에게 군종병을 물려줘야 한다.
만약 한지윤과 좋은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그리고 그 이상 의 단계까지 나아가게 된다면, 앞으로 더 목사의 얼굴을 자주 보 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상한 후임에게 군종병을 떠넘기고 전역했다는 쓴소 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이강진처럼 열심히 일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곽분섭은 글쎄.
아직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된다.
?k -k -k
최영고와의 면담 시간을 끝내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조은석을 상담실로 불렀다.
"행군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어. 발바닥은 좀 어때?"
"많이 아물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거 같아서 괜찮습니다."
"그래? 뭘 얻었는데?"
"그건……."
망설이던 조은석은 쑥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말을 안 해 줘도 딱히 상관은 없었 다.
조은석은 지난 번, 이강진이 했던 말을 언급했다.
"이강진 상병님, 저한테 내부 이야기를 외부에 퍼트리고 다니 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네가 기자여서 그렇게 말했던 거고."
물론 조은석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강진의 불안감을 직접 해소시켜 주기로 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강진 상병님. 성태강 일병하고 이강진 상병님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지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강 진 상병님을 방심시키려고 이런 말을하는 거, 절대로 아닙니다. 믿으셔도 종습니다."
행군 당시, 성태강이 조은석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게 아무 래도 큰 효과를 불러온 듯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알았다. 그럼 믿어 볼게."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강진 상병님."
이것으로 막내 같지 않은 막내, 조은석의 개인 면담까지 모두 마쳤다.
분대원들과의 개별 면담을 전부 가져 본 소감은 비교적 간단 했다.
'문제없군.'
이 상태 그대로 쭉 이강진의 전역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 이다.
* * *
분대장 회의 때 행보관은 이들에게 지난번에 내 준 숙제 현황을 물었다.
"분대원들 개별 면담 다 한 번씩 했나?"
"예!"
"특이 사항 있는 분대는 나중에 나한테 따로 와서 말하고. 오 늘은 다음 주에 있을 진지 공사에 관해서 미 리 말해 두마."
행보관이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바로 진지 공사.
부대 관리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행보관으로선 진지 공사만 큼 마음 편한 주간이 없다.
다른 거 일절 상관 않고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 것이 행보관이 진지 공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번 진지 공사 콘셉트는 딱 하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라."
행보관의 목소리에 강한 의지가 실렸다.
"제초."
올 것이 왔다.
여름만 되면 초록빛의 전장이 펼쳐진다.
풀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
병사들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풀이 막 자라나기 시작했다. 분리수거 장 주변만 봐도 알 거다. 작년에 비해서 풀이 엄청 무성하게 자 라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는 제초 작업을 좀 앞당기기 로 했다."
제초기는 이번 주부터 돌리기 시작했다.
행보관이 말한 대로 작년에 비하면 빠른 시기에 제초 작업에 들어간 셈이었다.
"진지 공사 때에는 제초 작업에만 집중할 거다. 그리고 추가 로 진지 공사 끝난 다음에 배수로 작업 들어갈 생각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날씨 더우니까 먹는 거 조심하고. 특히 생활관에 취식물 짱박아 두지 마라. 걸리는 즉시 예외 없이 경고 카드 줄 거다."
"예!"
분대원 개별 면담을 시작으로 해서 여름과의 전쟁 선포로 회 의를 마무리 지었다.
분대장 회의를 마치고 행정반으로 나오자, 김철이 의미심장 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이번이 군대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이구나."
이 여름만 잘 넘기면 된다.
김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여름이라는 뜻은, 이런 의미도 된다.
"유격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네."
"……아."
이강진의 말을 듣자마자 김철의 얼굴에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진지 공사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이강진은 오전에 군종병 일을 하기 위해 교회로 이동했다.
오늘도 성가대 아가씨들이 환한 미소로 이강진을 반겼다.
평소와 같은 멤버들이었다.
곽분섭이 좋아하는 여성도 있었다.
그때 성가대 인원들 말고도 또 한 명의 동행자가 이강진을 찾 았다.
"강진 씨! 교회에서 보는 거, 엄청 오랜만이네요!"
한지윤이었다.
영화 촬영이 종료된 뒤, 한지윤은 당분간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그녀가 1075대대 교회에 얼굴을 비줄 수 있게 된 것도 다 이 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강진은 한지윤이 오늘 종교 행사에 참가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갑작스런 만남에 이강진은 당혹감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다.
"군복 입고 있는 강진 씨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요. 강진 씨는 군복도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이강진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한지윤이 군복 입은 이강진의 모습이 어울린다고 칭 찬해도 말뚝 박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군인이 되고 싶어서 회귀 트럭에 몸을 던진 건 아니었으니까.
"행복이는 군복 입은 제 모습만 보면 막 짖어 대던데요."
"행복이? 아, 강진 씨 반려견 이름이죠? 그러고 보니 청주 갔을 때 한 번 봤어야 했는데,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네요."
"다음에 또 보면 되죠."
자연스럽게 추가 데이트 떡밥을 던져뒀다.
그녀와 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종교 행사 준비를 등한시할 수는 없었기에 대화는 짧게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성가대 사람들에 더해서 한지윤까지 합세를 하니까 일은 금세 끝났다.
기독교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병사들이 하나둘씩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중대원들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교회로 들어선 순간, 조은석의 표정에 놀라움이 가득 스며들 었다.
한지윤 때문이었다.
"과, 곽분섭 일병님! 저, 저 사람, 여배우 한지윤 아닙니까?"
"어, 맞아. 몰랐어?"
"예, 전 처음 봤습니다!"
1075대대로 전입해서 기독교 행사에 처음 참가한 병사들은 대부분 조은석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대한민국 연예계에 떠오르는 샛별, 한지윤.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성태강, 이강진과 같은 생활관을 쓰게 된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었다.
곽분섭은 왜 한지윤이 여기에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 다.
목사의 딸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 었다.
'이거, 완전 기삿거리잖………'
'특종이다!'라고 기뻐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조은석의 어깨 위에 강하게 손을 올렸다.
상대를 보자마자 조은석은 관등성명을 외쳤다.
"이, 이병 조은석!"
이강진, 그가 여러 가지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를 띠면서 그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석아, 나하고 개별 면담할 때 네가 했던 말, 잘 떠올려라."
"하… … 하하하…."
성태강과 이강진, 본인에 대한 기사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지윤에게 혹여나 민폐 끼치는 기사를 내보내는 즉시, 조은석의 군 생활은 지옥길로 변하게 될 것이다.
눈치가 빠른 조은석은 이강진의 이런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지윤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자!
조은석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행보관이 가장 좋아하는 진지 공사 시즌이 도래했다.
월요일 오전부터 행보관은 병사들에게 코팅이 되어 있는 목 장갑을 하나씩 분배했다.
"풀이란 풀은 모조리 다 뽑아 버 려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여름 한정으로 북한군보다, 간부들보다 더 증오스러운 존재 가 바로 잡초들이다.
이강진과 1분대원들은 제초 작업을 위해 탄약고 초소를 오르 기 시작했다.
산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이강진은 초소로 올라가는 입구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 풀 정리하면서 올라간다. 우호야, 넌 운상이하고 분섭이 데리고 왼쪽 길 작업해. 나는 나머지 애들 데리고 오른 쪽 작업할 테니까. 서일주 병장님은 우호하고 같이 가시 면 됩 니다."
"그래그래, 알았다. 해야지, 해야 하고 말고."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감정을 풍기는 서 일주였으나, 그래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때에는 괜찮더라도, 진지 공사만큼은 절대로 행보관 몰 래 짱박히면 안 된다.
그러면 김명찬 병장처럼 전역 때까지 평생 행보관이 노예로 부려 먹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제69화. 돌아온 제초의 계절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