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8화. 미묘한 관계 (4) >
제68화. 미묘한 관계 (4)
자대 전입 2일 차.
자대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은 조은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널널했다.
신교대 아침 점호가 유독 빡세게 돌아갔을 뿐, 자대의 아침은 신교대만큼 숨이 막힐 정도로 타이트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침 구보도 생략할 수 있었다.
"가서 씻고 밥 먹을 준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해산."
"해산!"
그날 당직사관의 기분에 따라 아침 점호 때 구보를 할지 말지 가 결정된다.
단 예외가 있다.
소대장은 비가 오거나 눈이 오지 않는 이상, 무조건 아침 구 보를 시킨다. 심지어 본인이 직접 병사들을 인솔한다.
소대장을 제외하고 다른 간부들은 아침 구보를 크게 강요하 지 않았다.
조은석에겐 이것 자체만으로도 컬쳐 쇼크였다.
"최영고 이병님, 아침 구보는 꼭 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교대에나 훈련소에서나 그렇지, 자대에선 필수는 아니야."
"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하나하나씩 자대 생활에 대해 알아 가면 된다. 생활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서일주는 최영고를 찾았다.
"영고야, 오늘 아침 메뉴 뭐냐?"
"이병 최영고! 금일 아침 메뉴는 배추김치, 콩나물국, 김, 밥, 가지 조림, 우유입 니다!"
"메뉴 한번 기가 막히네. 그냥 우유만 올려 줘라."
"예, 알겠습니다!"
이걸 본 조은석은 바로 눈치를 챘다.
'아침, 점심, 저녁 메뉴는 꼭 머릿속에 숙지해 두고 있어야겠군.'
언제, 어디서 선임이 식사 메뉴를 물어볼지 모른다.
특히 짬이 좀 된 병장들은 거의 꼭 물어보곤 한다.
원래 밥이 맛있든 맛이 없든 무조건 가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게 군대의 규칙이다. 그러나 병장들은 간부들 몰래 밥 먹는 걸 생략할 수 있다. 병장들만의 특권이었다.
신병 입장에서 따라했다간 큰일 나는 행동이다. 조은석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온 사람이다 보니 조은석은 다른 동기들에 비해 습득력이 상당히 빨랐다.
한 번 보여 주면 그것을 눈치껏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신병이 왔다고 해서 싫어했던 분대원 들도 조은석의 센스 있는 행동에 조금씩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태강은 여전히 조은석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태강의 맞은편에 앉은 조은석이 그에게 말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어…… 너도."
성태강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뒤로 그들은 침묵한 채 얌전히 식사만 이어 갔다.
연예인과 기자.
참으로 애매한 관계다.
* * *
조은석이 자대에 전입해 온지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그때까진 아무런 소동이 없었다.
성태강도, 그리고 추가로 특종감이 될지도 모르는 이강진도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조은석은 자신이 보고 들은 그대로를 전했다.
"특별히 기사로 쓸 만한 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 말에 서형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석아, 기자란 말이다. 특좋을 찾아다니는 게 일이긴 하지 만, 때로는 특좋을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존재야. 무슨 뜻인 지 알겠어?
"글쎄요. 잘……."
-기사로 내보낼 만한 화재를 만들어 보라, 이 뜻이야. 넌 태강 의 후임이잖아? 예를 들어서 태강을 일부러 자극해서 화를 내 게 만들어. 그러면 넌 태강에게 갈굼받았던 일화를 바탕으로 기 사를 쓰면 되는 거야. 제목은 '국민 아이돌 태강, 의외의 일면 이?'라는 식으로 내보내면 대중이 궁금해서라도 클릭하겠지. 어 떠냐?
"성태강 일병님…… 아니, 태강 씨, 생각보다 성격 좋고 착하던 데요."
-어휴, 이 답답아.
서형면의 입에서 또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태강이 착하고 나쁘고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라고. 중요한 건 관심이야, 관심. 연예인들만 관심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야.
우리 같은 기자들도 대중의 관심을 먹고 자라는 거라고. 기자들 이 괜히 자극적으로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니까?
관심을 위해서라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서형면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했다.
-은석아, 기자는 이기적이어야 해. 내 말 잘 기억해 둬라. 그 럼 바쁘니까 이만 끊는다.
그렇게 자신이 할 말만 하고서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
서형면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어그로를 많이 끌다보 니 회사 입장에선 좋아할 만한 기자였지만, 사람들에겐 그렇게 까지 평가가 좋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조은석.
아직까지 태강과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태강이 그에게 폐를 끼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은석이 태강을 특종 거리로 이용해도 되는 걸까?
사실과 날조.
진실과 거짓.
그 기로에 서게 된 조은석.
'기자란 대체 무엇일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조은석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분과별 간담회 시간에 이강진은 분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 주 금요일에 행군 일정이 잡 혀 있다."
거리는 총 42km. 야간 행군도 아니고 주간 행군이었기에 비 교적 쉬운 죽에 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행군은 행군이다.
"날씨가 슬슬 더워지고 있으니까 행군할 때 수통에 물 꼭 담아 두고. 알겠나."
"예!"
"그리고 은석이."
"이병 조은석!"
분대원들 중에서 조은석이 가장 큰 형이었지만, 그래도 군대 에서 형이라 부를 순 없었기에 이름으로만 그를 불렀다.
"너도 주간 행군에 참가할 거야. 기억해 둬."
"예, 알겠습니다!"
하필이면 행군 이틀 전에 대기 기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타 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후임들에게 행군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던 이강진은 특히 서일주에게 주의를 줬다.
"서일주 병장님, 가라 군장 싸면 안 됩 니다."
"엥? 왜?"
"대대장님이 직접 병사들 아무나 붙잡아서 군장 검사 실시할 수도 있다고 중대장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귀찮더라도 완전군 장을 매셔야 합니다."
말년에 영창 가기 싫으면 완전군장을 꾸려야 한다.
서일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행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맞선임들이 후임들 잘 챙기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하도록 해라."
"예!"
"좋아, 그럼 점호 준비해라. 오늘 당직사관, 소대장님이라는거 잊지 말고."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병사들.
조은석도 이제는 내무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알아서 매 트리스선 정리나 관물대 정돈 같은 걸 척척 해냈다.
이강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은석이 형만 놓고 보면 참 착한 사람인데.'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 사람들이다.
예전에 이 강진은 조은석 이 서형 면과 통화하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은석은 심하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선배라는 작자들이 자꾸 조은석을 안 좋은 길로 이끌려고 한다. 이게 문제였다.
계기가 필요하다.
조은석을 거짓과 날조가 아닌, 사실과 진실의 길로 이끌 계기 가.
행군의 아침이 밝았다.
주간 행군이기 때문에 병사들은 빠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9시까지 바로 연병장에 집합해야만 했다.
대대장이 단독 군장 차림으로 이들 앞에 섰다.
"행군 간에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한다. 알겠 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본부중대부터 출발!"
병사들은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본부중대를 따라 1중대도 행군길에 올랐다.
행군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채 안 됐건만 조은석의 호흡은 벌 써부터 거칠어졌다.
신병 교육대에서도 주간 행군, 야간 행군 때문에 거의 지옥 문 턱까지 갔다 왔던 조은석.
자대 행군은 신교대에 비해 더 빡셌다.
신교대에서 했던 건 그저 튜토리얼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행 군은 이제부터다.
'미친…… 이걸 전역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행군이 시작되고 8시간이 지났다.
천금 같은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마자 조은석은 그 자리에 그 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허억, 헉……."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발바닥에는 감각이 없었다.
쉬는 와중에 이강진이 조은석을 찾았다.
"물집 잡힐 수 있으니까 전투화 벗고 발 말려."
"예, 알겠습니다……!"
조은석이 전투화를 벗자마자 이강진은 헛숨을 삼켰다.
물집투성이었다.
심지어 피도 섞여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네."
발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다. 게다가 체력적인 한계도 있을 터.
"앰뷸런스에 자리 남아 있을 테니까 그거 타고 가."
그전에 조은석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이강진 상병님! 몇 시간만 더 걸으면 행군이 끝납니까?"
이강진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해줬다.
"1 시간 정도. 저기 다리 보이지? 저쪽을 넘어서면 우리 부대 위병소가 보일 거다."
"그렇다면…… 좀 더 걸어 보겠습니다."
"괜찮겠어?"
"예,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다 왔다. 여태까지 한 게 있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 포 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그리고 자대 첫 행군이지 않은가.
게다가 조은석은 이중에서 가장 큰 형이다.
신병 교육대에 있었을 때에도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 았지만, 자신이 큰형이라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이대로 허무 하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오기가 샘솟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도 해냈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추하지 않겠나.
하지만 아무리 1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완전군장을 짊어 지고서 행군하는 건 부담이 크다.
조금이라도 조은석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선 완전군장을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게 좋아 보였다.
이강진이 조은석의 완전군장을 가로채려고 할 때였다.
"이강진 상병님."
성태강이 먼저 손을 뻗었다.
"은석이 완전군장은 제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네가?"
"예, 전 아직 할 만합니다. 군장 하나 더 들고 간다고 문제되 지 않습니다."
조은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성태강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 는 미묘했으니까.
성태강은 조은석의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먼저 입을 열었다.
"사회에 있을 땐 어떨지 몰라도, 지금 년 내 전우니까. 못 본 척할 순 없지."
그룹 생활을 오래 하다 와서 그런 걸까. 다른 분대원들에 비 해 성태강은 유독 동료애가 강했다.
그 동료애가 조은석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강진은 그렇게 하라며 성태강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대신에 힘들면 바로 말해라. 서로 번갈아 가면서 들면 되니 까."
"예, 알겠습니다!"
성태강이 먼저 손을 뻗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연예인과 기자 사이지만, 군대에선 서로 전우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이것보다 정확 한 답은 없을 것이다.
행군이 끝난 이후에 조은석은 또다시 서형면과 통화를 주고 받게 되었다.
-행군 도중에 특이 사항은 없었어?
기사로 쓸 만한 게 있는지 묻는 거였다.
없으면 특좋을 만들어서라도 알려 달라고 조은석을 압박했던 서형면.
조은석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분간은 없을 거 같아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선임들이 부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야야! 조은석! 너…….
통화를 끊어 버린 조은석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근심과 걱정에서 막 벗어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제68화. 미묘한 관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