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7화. 일탈 (3) >
제67화. 일탈 (3)
차를 끌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 이강진.
문득 작년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윤 씨가 청주로 왔었지.'
처음에는 정말로 한지윤이 청주로 내려올 줄은 몰랐었다. 반 신반의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그 상황이 꿈만 같았었다.
하나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대신 꿈보다도 더 꿈 같은 현실일 뿐.
이강진은 그걸 다시 체험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근처에 차를 주차시킨 이강진은 시외버스 터미 널 안쪽으로 들어 섰다.
'도착 예정 시간이 9시 40분이라고 했으니까………'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었다.
이강진은 스마트폰을 여러 차례 확인했다. 정신 놓고 있다가 혹여나 한지윤의 연락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40분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는커 녕 문자 한 통 없었다.
'이상하네.'
혹시 중간에 차가 막혀서 좀 늦는 걸까?
평일 오전에 차가 막힐 일은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이 강진이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 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이강진의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이강진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자,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이 이강진의 반응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강진 씨가 이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어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뒤에서 쿡 찌르면 놀라는 게 당연하다. 이강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지윤 씨한테 이런 장난기가 있는 줄 몰랐네.'
시간이 지날수록 한지윤에 대해 잘 몰랐던 것들을 하나하나 씩 발견해 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차 가져왔으니 제 꺼 타고 가시죠."
"강진 씨, 차 사셨어요?"
"출고된 지 일주일도 안 된 신상입니다. 보실래요?"
"네, 보고 싶어요!"
한지윤의 눈이 반짝거렸다.
터미널을 나와 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이강진의 차량을 드디 어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한지윤.
날렵하게 생긴 디자인에 짙은 청색. 딱 봐도 고가임을 알 수 있는 그런 차였다.
"이거, 엄청 비싼 차 아니에요?"
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한지윤도 비싼 물건이라는 건 바로 알 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 안 합니다. 자, 일단 타시죠."
"네!"
차에 탑승한 한지윤은 신기하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런 차에 타보는 게 난생 처음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차 내부를 구경하는 한지윤의 모습이 이강진의 눈에는 한없이 귀엽게 보였다.
바라 식당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이강진은 정확히 오전 10 시에 한지윤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직원들은 한지윤이 정말로 자신들이 일하는 가게에 방문할 줄 은 몰랐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강진은 우선 한지윤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데려갔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어머머머머! 지윤이 왔구나!"
입가에 짙은 미소를 새기면서 한지윤과 가볍게 포옹을 하는 이강진의 어머니.
근 1년 만에 보는 그녀는 한층 더 예뻐져 있었다.
다음으로 주방에 있는 황민수에게 인사를 할 차례다.
주방에는 오호만도 같이 있었다.
오호만이 모자를 벗고서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네? 저희, 만난 적 있었나요?"
"뭐야, 강진아, 이야기 안 했었어?"
이강진은 오호만에게 깜빡 잊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뒤에 오호만이 왜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한 지윤에게 설명했다.
"호만이 형도 1075대대 줄신이거든요. 취사병이어서 아마 거의 못 보셨을 거예요."
"어머, 그랬군요. 신기하네요. 같은 부대 선임이셨던 분이 여 기서 일하고 계시다니."
세상 참 좁다.
이강진의 어머니에 이어서 황민수, 오호만까지. 인사는 다 나 눴으니, 이제 배를 채울 시간이다.
황민수가 직접 음식을 대령했다.
버섯 닭볶음탕을 비롯해서 바라 식당의 대표 음식들을 한 상 크게 차려냈다.
한지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여기에 들어간 정성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터.
황민수는 괜찮다는 식으로 말했다.
"배부르면 남겨도 돼요. 지윤 씨가 음식 남겼다고 욕할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하하!"
"그게 아니라……."
이른 아침부터 이 많은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을 황민 수가 신경 쓰여서 그랬다.
그러나 황민수는 괜찮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부담과 감사함이 섞인 식사 자리.
그렇게 한지윤은 휴가날의 첫 끼를 이곳 바라 식당에서 무사히 해결하게 되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그녀와함께 근처에 위치한 카페 를 찾았다.
이강진이 휴가를 나올 때마다 자주 들리는 작은 카페였다.
"지윤 씨, 오늘부터 휴가라고 하셨죠?"
"네."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제가 바 래다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강진은 그녀의 중실한 운전기사가 되어 볼 생각 이었다.
한지윤은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저……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이 생겼는데. 여기서 좀 먼 곳인데도 괜찮나요?"
"물론이죠. 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차가 있으니까요."
휴가를 나왔을 때 최대한 많이 달려 둬야 한다. 어차피 복귀 하면 한동안 운전을 못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머니한테 차를 맡길 순 없었다. 애초에 운전면허 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
그녀는 수줍게 대답했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 * *
툭 까놓고 말해서 청주에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대청댐 같은 곳은 있지만, 그곳은 바다가 아니니 예외로 쳐야 했다.
그래도 바다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면 된다.
이강진은 한지윤과 함께 대천으로 떠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당일치기로 바다만 보고 오는 것도 가능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차가 밀리기 때문에 힘 들지도 모르지만 평일이라면 문제가 없을 터.
대천까지 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지윤은 나중에 자기가 따로 보고 오겠다고 하면서 거절을 했었다.
그러나 이강진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에게 직접 바다를 보여 주고 싶었다.
결국 대천행을 결정지은 두 사람.
더 늦기 전에 빨리 출발하기로 했다.
차 뽑은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고속도로를 타게 될 줄이야. 이 강진은 솔직히 예상 못 했다.
그래도 한지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대천 해수욕장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강진은 대천 해수욕장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수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바다만 보고 오면 되는 거 아닌 가.
마침 이강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알고 있었다.
인적도 거의 없고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약 2시간이 걸려 도착한 이강진의 비 밀 장소.
한지윤이 마스크를 벗고 다녀도 될 만큼 사람이 없었다.
"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휴가를 만끽하는 한지윤.
바람의 일렁임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 역시 줄렁였다.
잠시 그렇게 바다를 눈에 담는 시간을 가진 후.
이들은 근처 카페로 향했다.
바다 전경이 그대로 다 보이는 곳이었다.
콜드 브루를 마시 면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
기나긴 침묵을 먼저 깬 건 이강진 쪽이었다.
"갑자기 왜 바다가 보고 싶어지셨나요?"
이강진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한지윤은 싱긋 웃었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까 도시에서 벗어나 일탈을 맛보고 싶 었어요. 그러기엔 바다가 딱이잖아요?"
"일탈……."
상당히 와닿는 단어였다.
군대에서 일탈은 탈영밖에 없다. 즉, 군인인 이상 일탈은 꿈도 못 꾸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휴가를 나오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한지윤은 계속 말을 이었다.
"매번 똑같은 일상, 똑같은 풍경만을 보면 지겨워지게 되더라 고요. 그래서 다른 풍경과 마주하고 싶었어요."
군대도 똑같다.
막사 대대 식당, 탄약고 초소, PX, 위병소, 연병장 등등 거기 서 거기다.
여름, 겨울이 오면 풍경이 바뀌긴 한다.
대신 제초와 제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벗어나고 싶다. 군인이라면 이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자의로 입대한 것도 아니고, 국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청준 들 아닌가.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입대 전날로 회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크나큰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군대는 여전히 개 같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한지윤과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더불어 연락이 끊겼던 옛 전우들과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 고.
이렇게 보면 재입대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대신 단점이 장점을 찍어 누를 정도로 많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다시 청주로 돌아올 때까지 이강진과 한지윤은 많은 이야기 를 나눴다.
여태껏 만났던 것 중에서 오늘이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날이었다.
이강진에겐 참으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터미널까지 그녀를 바래다줬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한지윤 은 이강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휴가 나올 때 꼭 연락 주세요. 시간 맞으면 다음에는 바다 말 고 다른 곳도 같이 가 봐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강진.
이로서 행복했던 시간은 끝이 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복이가 '왈왈!' 소 리를 내면서 짖어 댔다.
"아, 그렇지. 참."
한지윤에게도 행복이를 소개시켜 줄 걸.
뒤늦게 행복이의 존재가 떠올랐다.
* * *
자주 휴가를 나가면 그만큼 감흥이 떨어진다.
하지만 변치 않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복귀날 느끼는 짜증이 었다.
-좆같은 기분이 드는 건 여전하네.'
이거 하나는 평생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위병소를 통과했다.
그런 뒤에 조장실로 가서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오케이, 통과. 막사로 올라가 봐라."
"예, 충성!"
조장실을 나온 이강진은 쓴웃음을 삼켰다.
'소지품 검사, 또 대충하기 시작하네.'
저 러다가 또 털 릴라.
조장 근무자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 이강진은 그렇게 믿으면 서 막사로 향했다.
막사 근처에서 작업하던 병사들이 이강진에게 거수경례를 하 면서 복귀를 환영했다.
"충성!"
"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 아주 잘 갔다 왔다."
이번 휴가는 이강진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휴가가 되었다.
한지윤과의 데이트 덕분이었다.
아직도 그 추억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다음 휴가 때가지 이걸로 충분히 버틸 수 있겠군.'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휴가가 되었다.
행정반으로 가서 간부에게 휴가 복귀 신고를 하고서 1생활관 으로 향했다.
문을 연 순간, 낯선 이 한 명이 잔뜩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다.
백우호가 이강진을 반겼다.
"왔냐?"
"어, 근데 새로운 얼굴이 보이네."
"신병 왔어. 인사해라. 우리 분대장님 오셨다."
신병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취했다.
"추, 충성! 이 병 조은석!"
이제 막 자대로 전입한 모양인지 조은석의 보급품들이 사방 에 널려 있었다.
일, 이병 들은 조은석의 개인 보급품에 주기를 해 주느라 바빠 보였다.
조은석. 이강진은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백우호가 아까 이야기하려다가 만 질문을 반복했다.
"사회에서 뭐 하다 왔다고 했지?"
조은석은 성태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기자 하다 왔습니다!"
성태강의 어깨가 아주 크게 움찔거렸다.
< 제67화. 일탈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