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3화. 잊지 않겠습니다. (1) >
제63화. 잊지 않겠습니다. (1)
한창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병력.
그들에게 거친 호흡이 기본 패시브로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현장을 떠나고 싶었으나.
'아직 작업 끝나려면 2시간이나 남았네.'
이강진은 몰래 한숨을 삼켰다.
행보관과 부소대장은 동네 사람들이 불러서 잠시 이장 집으 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이강진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10분만 쉬었다가 하자."
"예!"
병사들은 이강진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자리에 주 저앉았다. 팔뿐만 아니라 다리까지 후들거릴 정도였다.
이들이 얼마나 빡세게 일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부대였으면 대충 눈치 보면서 설렁설렁 일을 했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이곳은 외지다. 지켜보는 민간인들의 시선이 너무나 도 신경 쓰였다. 그러다 보니 일을 대충 할 수가 없었다.
혹여나 '군인들이 일도 안 하고 길가에 퍼질러서 쉬고 있어 요'라는 민원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내가 무슨 공무원도 아니고 민원 같은 거에 신경을 써야 하 다니.'
이강진은 지금의 신세에 헛웃음이 나을 뻔했다.
차라리 진짜 공무원이었더라면 그래도 덜 억울했을 텐데 말이다.
잠시 쉬는 동안 백우호가 이강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야, 강진아. 저쪽 파란 지붕 집 보이지?"
"어, 보여. 저기가 왜?"
"저곳이 아까 그 호통 할아버지가 사는 집인 거 같더라. 아까 우리 작업할 때 저쪽 집으로 들어가시더라고."
"아, 그래?"
요주 인물인 만큼 저쪽은 가급적이 면 안 지나가는 게 좋아 보 였다.
괜히 지나가다가 시비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이강진이 우려하는 민원이라도 들어오는 날에는 중대 전체가 …… 아니, 대대 전체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걸 조심해야 한다.
"잠깐 주목."
병력을 주목시키는 이강진.
백우호가 알려 준 정보를 이들에게도 공유해 주기 위해서였
"저쪽 파란 지붕 집 근처는 웬만하면 서성이지 마라. 아까 그 호통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곳이라고 하니까."
"예,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누가 억지로 가 보라고 명령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저쪽에는 접근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괜히 사서 욕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 순간 근처에서 행보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잡것들이! 작업 안 하고 농땡이 피우고 있냐!"
"아, 아닙니다! 잠깐 쉬고 이제 다시 작업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황급하게 작업 도구를 드는 병사들. 그러나 행보관은 이내 표 정을 바꾸고선 너 털웃음을 흘렸다.
"됐다. 어르신들이 새참 주셨으니까 와서 이것부터 먹어라."
행보관과 부소대장이 가져온 쟁반에는 각종 전과 김치 그리 고 과일과 떡이 가득했다.
하나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막걸리잖아!'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다른 먹거리보다도 막걸리가 가장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목이 타 죽을 지경이었는데,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 부소대장은 일찌감치 이들에게 선을 그어 뒀다.
"너희는 안 된다. 근무 중에 술 마시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무 슨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도 잘 알잖아. 안 그러냐?"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자꾸 눈이 가는 걸 어찌하랴.
행보관은 병사들이 빠르게 눈을 굴리는 모습을 보고선 또다 시 웃음을 흘렸다.
"딱 한 잔씩 만 주마."
"해, 행보관님!"
부소대장이 기겁을 했지만, 행보관은 괜찮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한 잔 가지고 취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술 못 마시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거 봐라."
이럴 때에는 행보관이 참 좋다.
융통성이 넘쳐흐르는 행보관. 그가 병사들에게 잔을 돌렸다.
막걸리를 마실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1인당 한 잔으로 제한을 뒀다. 그 이상 마시면 행보관의 쓴소리를 1시간 이상 들을 각 오를 해야 한다.
막걸리는 놋쇠 그릇에 받아서 마시는 게 제 맛이다.
황금빛을 띄는 놋쇠 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채운 이강진.
그는 그것을 꿀꺽꿀꺽 삼켰다.
시원한 막걸리의 감촉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달아올라 있던 이강진의 전신을 차갑게 식혔다.
"크으……."
"캬!"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백우호는 한 잔이 아까워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조금씩 나눠 마셨다.
좋은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강진은 어차피 한 잔밖에 못 마시는 거, 최선의 한 모금으로 이 순간을 꾸미고 싶었다.
처음에는 대민 지원을 나온 게 사뭇 후회가 되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막걸리 한 잔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 정도면 대민 지원 나올 만하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대민 지원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이미 시간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차하자마자 이강진은 부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에게 외쳤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내려갈 테니까 대충 손만 씻고 나와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사열대에서 전투화를 닦고 있던 김철이 이강진에게 심 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어. 대민 지원, 많이 빡세지?"
"음? 어…… 그렇지, 뭐."
빡센 건 맞지만 막걸리 한 잔에 피로가 싹 달아나 버렸다.
막걸리만 아니었더라면 이강진은 행보관에게 대민 지원 때려 치고 싶다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막걸리 한 잔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건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직도 입맛을 다시면서 그때 먹었던 막걸리와 새참 의 맛을 떠올렸다.
순간 김철이 갑자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내 코가 이상한가. 강진이, 너한테서 술 냄새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에이, 그럴 리가! 철아, 네가 요즘 업무에 너무 치인 나머지 피곤해서 그런 거야. 술은 무슨 술이야."
"하긴 그렇지. 미친 듯이 일하고 온 사람에게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그럼 나 먼저 가 볼게!"
여기에 더 있다간 김철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이강진은 거의 빛의 속도로 빠르게 자리를 벗어 났다.
* * *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대민 지원을 나가야 했다.
어제의 막걸리 덕분일까 두돈반 차량에 오르는 병사들의 얼굴은 대체적으로 밝았다.
부소대장은 그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녀석들…… 표정 관리 좀 해라. 그러다가 들킬라."
"네, 알겠습니다!"
"다 탑승했지? 그럼 출발한다."
오늘도 거지같은 승차감을 선보이며 신형 마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군용 차량.
신형 마을에 도착한 뒤, 병사들은 도구를 가지고 논두렁길로 향했다.
2일 차라 그런지 이제는 이곳 지리에 대충 익숙해졌다.
하나 작업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팅!
삽 끝에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돌덩어리 녀석, 겁나 안 빠지네!"
백우호가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뭔 일인가 싶어 이강진도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래?"
"아니, 여기 박혀 있는 돌 녀석이 더럽게 안 빠져서."
"비켜 보너. 곡괭이로 해 보게."
돌이 박혀 있는 끄트머리 부분을 노렸다. 곡괭이 끝을 박아서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돌을 밖으로 끄 집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팅!
곡괭이가 튕겨 나왔다.
"여기가 경계가 아닌가......?"
흘러내린 논두렁길의 잔해 때문에 돌의 윤곽을 제대로 파악 할 수가 없었다.
몇 차례 더 도전을 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다시 한번 곡괭이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였다.
"계속 해 봤자 곡괭이 날만 나갈 거다."
한 노인이 이강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호통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노인, 이만복이 었다.
"줘 봐."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괜히 이거 하다가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잔말 말고 내놓으라니까?"
하필이 면 지금 행보관, 부소대장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강진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곡괭이를 건넸다.
사실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 주자니 뭐라고 또 주저리주저리 한 소리를 늘어놓을 거 같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곡괭이를 건네주긴 했으나, 내심 이만복이 다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만복은 돌을 발로 꾹꾹 눌러봤다.
그게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저 할아버지, 혹시 돌을 집어넣어야 하는 걸로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니야?"
"그러진 않을 거야."
그제야 이강진은 이만복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돌을 일부러 들썩이게 만든다. 그러면 돌의 움직임 때문에 돌과 흙이 맞닿는 부분에서 틈이 조금씩 벌어진다.
그게 곧 경계선이다.
곡괭이를 든 이만복은 그것을 그대로 경계선에 꽂아 버렸다.
정확하고 힘 있는 곡괭이질.
역시 농사짓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받아라."
다시 이강진에게 곡괭이를 돌려주는 이만복.
"감사합니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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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준 건 좋으나.
퉁명스러운 태도는 여전했다.
* * *
이만복이 큰 난관 하나를 해결해 준 덕분에 병사들은 다시 빠른 속도로 작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곡괭이질을 하면서 이강진은 아까 도와준 이만복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한테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만 빼면 좋으신 분 같긴 한데.'
작업을 잠시 멈추고 허리를 폈다.
우드득!
허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더럽게 아프네."
손으로 본인의 등을 토닥였다.
다른 병사들도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쳐 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쯤에 그것이 와야 사기가 충전될 텐데.
그거의 정체는 뻔했다.
바로 막걸리다.
백우호가 입맛을 다셨다.
"슬슬 새참 주실 때 되지 않았나?"
"아까 행보관님이 이장님 댁에 가신 거 같던데."
"정말? 그러면 어제처럼 새참하고 막걸리 들고 오시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시원한 막걸리 생각이 간절해졌다.
차라리 어제 막걸리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갈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맛본 순간,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 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시중에서 파는 일반 막걸리도 아니고, 이곳 마을 사람 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막걸리였다. 그러다 보니 더 맛있게 느껴 졌다.
막걸리의 마수에 빠져 버린 것이다.
때마침 행보관과 부소대장이 헐레벌떡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뛰어오는 중이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전원 작업 중지한다!"
행보관의 작업 중지 선언.
대체 왜?
병사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강진이 대표로 정신없이 뛰어온 행보관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쭸다.
"무슨 일이십니까, 행보관님?"
행보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이만복 어르신이…… 안 보이신다고 한다. 지금부터 작업 중 단하고 이만복 어르신 수색 작전을 개시한다! 발견하는 즉시 내 게 보고해! 알았나!"
"아, 알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이만복 어르신이 사라져?
갑자기 벌어진 상황 때문에 이강진도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 제63화. 잊지 않겠습니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