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2화. 대민 지원 (1) >
제62화. 대민 지원 (1)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휴가 복귀 당일.
매번 부대로 돌아갈 때만 되면 이강진의 입에선 한숨이 줄줄이 새어 나오곤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려 니까 좆같네.'
군복을 입는 이강진의 어깨가 한층 무거웠다.
환복을 하자마자 행복이가 귀신같이 태도를 바꾸면서 이강진을 향해 짓기 시작했다.
이강진은 그런 행복이를 보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알아, 행복아. 이 군복, 참 몹쓸 물건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군인인 이상 어쩔 수 없다.
민방위가 시작되기 전까진 이 옷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전투화를 신고 큰 도로가 나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바라 식당이었다.
"아저씨, 엄마, 형! 저 들어가 볼게요."
이강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세 사람이 줄줄이 나왔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우리 아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해. 알았지?"
"들어가서 부대 사람들한테 안부 전해 줘라, 강진아."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라 식당을 나서는 이강진.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강진 말고도 부대로 복귀하려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들도 이강진과 같은 심정인지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버스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 가장 불쌍한 이들은 역시 이등병 계급을 가진 군인 들이었다.
'불쌍한 사람들.'
이강진은 웃음을 삼켰다.
그러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예들끼리 자신의 발목에 달린 족쇄가 더 좋은 거라고 서로 자랑하는 꼴밖에는 안 된다.
결국 같은 노예 신분인데 말이다.
'덧없네.'
또다시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 * *
시내에 도착한 이강진은 택시 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전화박스에 들렀다.
부대로 들어가기 전에 한지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기 때 문이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가끔 전화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지겨워지는 법 이 없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들려온 건 한지윤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여보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민정 씨. 저, 이강진입니다."
-아, 강진 씨였군요! 모르는 번호여서 누군가 했어요.
도민정. 한지윤보다 2살 연상으로, 매니저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한지윤이 방송 일 때문에 전화를 못 받을 때에는 이렇게 도민 정이 대신 연락을 받아 주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이강진은 도민정과도 어느새 친분을 쌓게 되었다.
"지윤 씨, 많이 바쁜가 보네요."
도민정이 전화를 받았다는 건, 지금 한지윤은 바쁘게 일하고 있는 중이란 뜻이었다.
-네, 영화 촬영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어요.
"첫 영화니까요. 그럴 만도 하죠."
여태껏 드라마에만 출연하다가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 었다. 신경이 많이 쓰일 터.
한지윤이 어떤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지 이강진은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한지윤과의 통화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바쁠 테니까 이만 끊도록 할게요."
-지윤이한테 강진 씨 전화 왔다고 전해 둘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세요."
-강진 씨도요.
전화를 끊은 뒤.
이강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한지윤이 이강진에게 선물로 준 바로 그 손목시계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시계보다도 값진 디지털 손목시 계.
그 시계는 현재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부대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이럴 때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서점이다.
'오늘은 스파링 안 사고 들어가도 되겠지.'
스파링 셔틀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졌다.
이제는 상병이지 않은가. 선임급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스파 링 셔틀을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마음 편히 책 구경만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슬쩍 스파링이 꽂혀 있는 잡지 코너를 확인해 보는 이강진.
'오늘은 그 사람 안 오나?'
이강진이 서점에 들르기만 하면 항상 서로 스파링을 산다고 경쟁이 붙었던 바로 그 병사가 떠올랐다.
'설마 전역한 건 아니겠지?'
그러면 왠지 섭섭할 것 같았다.
타 부대 병사를 그렇게나 많이 본 적은 없었다.
보일 때는 '또 너냐!' 했는데 막상 안 보이니 뭔가 아쉽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네.'
그렇게 30분 동안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낸 이강진은 슬슬 택시 정거장으로 향했다.
달콤한 휴가도 이것으로 끝. 이제 복귀의 시간이다.
막사로 돌아온 이강진은 오늘의 당직사관인 소대장에게 휴가 복귀 신고를 마쳤다.
소대장은 이강진을 보면서 물었다.
"휴가 중에 별일은 없었나?"
"예."
"문제 일으킨 건 없고?"
"예, 그렇습니다."
이렇게 상세하게 물어본다는 건…….
"혹시 타 부대에서 또 누가 휴가 나가서 사고라도 쳤습니까?"
묻자마자 소대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이랑 싸움 붙어서 경찰서까지 갔다 왔다고 하더라. 그 것 때문에 휴가자들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사단에서 지침 내려 왔어."
그전에 휴가를 나가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타 부대에서 휴가 도중에 트러블을 일으키면, 죄 없는 다른 부대까지 피해를 받게 된다.
타이밍이 좋았다.
"혹시 모르니까 1분대원들한테도 휴가 나갈 때 괜히 술 마시 고 민간인이랑 싸우지 말라고 교육시켜 둬라."
"예, 알겠습니다."
"싸울 거 같으면 그냥 도망치라고 해. 남자의 자존심이 니 뭐 니 그런 건 다 필요 없다고. 영창 가는 것보단 그냥 한 번 굽히 고 도망치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군 생활이 늘어나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은가.
1생활관으로 돌아간 이강진.
그를 보자마자 백우호가 격렬하게 이강진을 반겼다.
"강진아!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 거다!"
"또 왜?"
이강진이 좋아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분대장들 집합하라고 하니까 진짜 미칠 노릇 이었다고! 어제는 샤워하다가 불려 갔어!"
"그래? 별거 아니네."
이강진도 자주 그랬다.
그것이 분대장의 숙명이거늘, 어찌하겠나.
뒤늦게 생활관으로 복귀한 후임병들이 이강진을 보자마자 거 수경례로 그의 복귀를 반겼다.
"충성!"
"충성. 다들 잘 지 냈지?"
"예, 그렇습니 다!"
말과 다르게 1분대원들의 얼굴은 피로가 가득 쌓여 있었다.
행보관의 작업 때문이었다.
서일주도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강진이 왔냐?"
"충성. 고생하셨습니다, 서일주 병장님."
"고생…… 정말 많이 했지. 돌아 버릴 거 같다."
털썩.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는 서일주.
지금 당장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하나 잠시 후에 저녁 식사 집합을 해야 한다.
그전에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분대장 수첩을 넘겼다.
"이거 받아라. 어여 가져가. 내 관물대에 이게 들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소름끼치 니까."
"그 정도로 싫었냐."
"저주받은 아이템 같다니까."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건네받은 분대장 수첩을 빠르게 훑었다.
"특이 사항은?"
"없…… 아니다, 오늘 하나 있었네."
"뭔데?"
"마지막 페이지 봐 봐."
분대장 결산 회의를 진행할 때에는 분대장 수첩에 그날 무슨 주제로 회의를 했는지, 어떤 말이 나왔는지 적어 두는 것이 편 하다. 괜히 나중에 까먹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이강진이 백우호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이 바로 받아 적기였다.
성실하게 이강진의 지시 사항을 이행한 백우호. 덕분에 이강 진은 그간 어떤 회의들이 있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백우호가 강조한 마지막 페이지를 살폈다.
"대민 지원?"
"어, 부대 근처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대민 지원 나갈 거라 고 하더라. 할아버지, 할머니 들 지나가는 작은 논두렁길이 갑 자기 비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고 해서 그거 보수 작업하러 간 대."
기간은 다음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2박 3일이다.
이 기간 동안 밖에서 숙식을 해결하진 않을 터. 부대에서 마 을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대민 지원은 우리 1중대가 다 나가는 거야?"
"아니, 인원 몇 명 선정해서 나간다고 하더라. 지원을 따로 받을 거래."
"흠, 그래?"
지원자가 많진 않을 것이다.
대민 지원을 주도할 사람이 행보관이라는데, 누가 행보관과 같이 작업하고 싶어 하겠나.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게 포상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
남들이 피하고자 하는 일을 자처하라. 이것이 포상 휴가 사냥 꾼. 이강진의 노하우였다.
백우호는 이강진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바라봤다.
"너 지원할 거지?"
"어떻게 알았냐?"
"얼굴에 다 쓰여 있어."
같이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이제는 딱 보면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단계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네가 지원한다면, 나도 지원한다."
"힘들 텐데?"
"힘들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지원하려고 하는 이유 가 뭔지 궁금하거든.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그것이 포상 휴가와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가지 고 있었다.
이강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
단 백우호가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 다.
이것은 도박이라고.
* * *
분대장들을 불러 모은 행보관.
이제 내일이면 대민 지원을 나가야 한다.
"그동안 대민 지원 나갈 병력 모아 보라고 했는데 지원자는 좀 있었나?"
"2분대는 없었습니다."
"3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송은 장호숙 일병 한 명이 전부입니다."
예상대로 본인의 의사로 대민 지원을 나가겠다고 신청하는 병사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에서 독보적인 참가율을 보이는 분과가 있었다.
이강진이 1분대 지원 현황을 보고했다.
"1 분대는…… 총 여섯 명이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분대장들은 경악했다.
"여, 여섯?"
"진짜냐? 대민 지원을 여섯 명이나 나가겠다고?"
"헐, 1분대…… 대체 정체가 뭐냐."
행보관도 내심 놀랐다.
이렇게까지 참여율이 높은 분과는 여태껏 없었다.
참가 지 원을 하게 된 사람은 분대장인 이 강진을 포함해서 백우호, 서일주, 기운상, 성태강, 최영고까지.
오대기인 곽분섭을 제외하고 전원이 다 지원한 셈이었다. 만 약 곽분섭이 오대기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도 지원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높은 지원율을 보이게 된 데에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이강진을 따라 가다 보면 포상 휴가를 얻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행보관은 이걸 기뻐해야 좋을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 했다.
1개 분대를 통째로 빼는 건 좀 그렇다.
"다 보내는 건 안 되고. 셋만 있으면 된다. 일주하고 운상이, 영고는 부대에 남기고 너하고 우호, 태강이. 이렇게 셋만 데리 고 갈 테니까 그리 알아 둬라."
"예, 알겠습니다."
도박도 그 판에 앉을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이강진은 다행스럽게도 그 자격을 거머쥐었다.
< 제62화. 대민 지원 (1) > 끝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