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1화. 연결고리 (1) >
제61화. 연결고리 (1)
19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앞으로 이곳에서 밤을 보낼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또다시 회귀 트럭에 치여서 재재입대를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만약 그러면 정말로 자살해야지.'
두 번은 참았지만, 세 번의 입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인생을 다시 살 기회고 뭐고 만약 그렇게 되면 그냥 자살할 생각이다.
눕자마자 이강진은 구식 관물대 바로 위에 위치한 창가를 바라봤다.
사실 이강진이 이 자리를 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밤에 잠을 청할 때, 달이 아주 훤하게 보인다.
'운치 있고 좋네.'
1075대대에서도 자주 느껴보지 못했던 낭만을 이곳에서 만끽 해 보는 이강진.
분대장 교육대에선 외곽 근무가 없다. 불침 번 근무만 있을 뿐.
이강진과 김철은 어제 불침번 근무를 섰기 때문에 오늘은 근무가 없었다.
마음 편히 잠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
'내일이구나.'
내일이면 다시 1075대대로 돌아간다.
갈 때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않은가.
'뭔가를 하나라도 가져가야지.'
예를 들자면
'포상 휴가증이라든지.'
내일의 결과가 기대된다.
* * *
점호를 마친 후에 신병 교육대에서 가지는 마지막 아침 식사 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한 교육생들.
식당에서 다시 구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강진은 탄약반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동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순 없었다.
대신 탄약반장은 엄지를 추켜올렸다.
이강진이 알려 준 종목이 예상대로 떡상했다는 것을 나타내 는 제스처였다.
탄약반장이 이강진에게 상점을 몰아주게 한 만큼, 이강진도 그에게 주식으로 돈 좀 만질 수 있도록 아주 약간 도움을 줬다.
어제 저녁 이강진은 분대원들에게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는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 만 그건 병사들 사이에서 만 통용되는 이야기 가 아니 었다. 이처럼 병사와 간부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가 있다.
구막사에 도착하자마자 이강진은 김철과 함께 퇴소 준비를 서 둘렀다.
짐을 꾸린 뒤 군장과 장구류를 한쪽 구석에 나란히 모아 뒀 다.
퇴소식은 입소식이 거행되었 던 장소와 동일한 곳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퇴소식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최우수, 우수 분대장 발표라 할 수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교관을 바라봤다.
교관은 건네받은 종이를 보면서 먼저 우수 분대장을 수상한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김철 상병, 홍도훈 병장, 성주일 상병. 앞으로 나오도록."
"상병 김철!"
"병장 홍도훈!"
"상병 성주일!"
놀랍게도 우수 분대장으로 선정된 3명의 인원 중 2명이 이강 진과 같은 2분대 소속이었다.
벌써 우수 분대장만 두 명을 배줄해 낸 2분대.
사실 다른 교육생들은 이런 결과를 이미 예즉하고 있었다.
2분대의 활약상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뭐만 하면 무조건 1등이었다. 사실 2분대에서 우수 분대장이 3명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이들에겐 우수 분대장 상장과 함께 2박 3일 포상 휴가증이 수여되었다.
"다음 최우수 분대장을 발표하겠다."
가장 긴장되어야 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분위기는 전 혀 그렇지 않았다.
긴장과 동떨어진 분위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강진 상병. 앞으로."
"상병 이강진!"
역시나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2분대 중에서도 이강진이 단연 압도적인 활약을 보였다. 그뿐 만 아니라 개인 평가에서도 이강진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 를 받으면서 교육생들을 놀라게 했다.
최우수 분대장 상장과 더불어 3박 4일 포상 휴가증을 받게 된 이강진.
그는 다시 한번 19사단 신병 교육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중대에서 레토나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강진은 3박 4 일 포상 휴가증을 고이 주머니 속에 챙겼다.
김철도 마찬가지였다.
"고맙다, 강진아. 난 한 것도 없는데 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포상 휴가증도 다 얻고."
"뭐 이런 거 가지고. 너도 나한테 평소에 도움 많이 줬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땡큐,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울 테니까."
행정분과 분대장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을 하니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이강진은 지금 당장 김철의 보은을 받아 보기로 했다.
"다음 주에 바로 휴가 나갈까 생각 중인데. 혹시 가능할까?"
"다음 주?"
"어, 부탁 좀 할게."
이번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오호만 때문이었다.
오호만이 바로 다음 주에 전역한다. 그는 전역하자마자 바로 바라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서 찾아가게 할 순 없었기에 이강진은 오호만이 바라 식당을 찾아가는 시기에 맞춰 서 휴가를 나가 황민수와 오호만이 만나게끔 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오호만은 차후에 황민수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줄지도 모 르는 인재다. 그의 요리 실력은 이강진이 보장한다. 성격 그리 고 요리에 대한 열정 모두 합격이다. 그가 곁에 붙어 있다면 황 민수의 식당 일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바라 식당은 이강진에게 있어서 중요한 곳이다. 메인 투자처 이기에 바라 식당을 무럭무럭 키워 가야 한다.
'이 런 일에 내가 빠질 수 없으니까.'
하나 예정에 없던 휴가를, 그것도 바로 다음 주에 나가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행정분과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휴가 일정을 조율하는 게 이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김철은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만, 다음 주에 휴가 나가는 사람이 누구누구였는지 머릿속 으로 떠올려 보고……."
행정분과 분대장이라면 병기계든 뭐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 반적으로 행정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 하고 있어야 한다.
"다음 주에 휴가 나가는 사람이……. 내가 기억하기론 7명이었 던 걸로 아는데. 일단 조율을 좀 해 봐야 할 거 같아. 좀 힘들겠 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해 볼게."
"고맙다, 철아."
"내가 더 고맙지. 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포상 휴가를 따냈으니까, 후후."
주고받는 도움 속에 싹트는 전우애.
이래서 동기가 좋은 것이다.
휴가에 대한 상담을 이어갈 무렵.
한 대의 레토나가 19사단 신병 교육대 위병소를 통과했다.
1075대대 1중대의 레토나였다.
선탑자 자리에서 내린 1부소대장이 둘을 불렀다.
"4박 5일 동안 고생 많았다. 짐 싣고 바로 떠날 테니까 준비해 라."
"예, 알겠습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 * *
이강진과 김철이 각각 최우수, 우수 분대장을 수상하고 왔다 는 소식에 중대장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환대했다.
"저번에 분대장 교육대에 파견 간 애들은 상을 하나도 못 타왔는데, 이번에는 두 명 다 수상을 하다니. 잘했다!"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내심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진 않으려나 기대해 봤지만, 그딴 건 없었다.
그냥 칭찬 한 번이 끝이었다.
1075대대로 돌아오자마자 김철은 곧바로 휴가 조정에 들어갔
"제철아! 다음 주 휴가자 명단 좀 확인해 줘."
"예, 알겠습니다."
이후에 김철은 자기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테니 이강진에겐 가서 편히 쉬라는 말을 들려줬다.
짐을 풀기 위해서라도 1생활관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강진 이었기에 얌전히 김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일과 시간이었기에 생활관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이강진의 착각이었다.
"오! 분대장 왔네!"
"충성!"
백우호와 성태강, 곽분섭이 이강진을 맞이했다.
"뭐야?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왜 너희들만 여기서 농땡이 피우고 있어?"
"어허! 농땡이라니, 듣는 사람 섭섭하게. 여태껏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가 이제 겨우 쉬고 있는 거야."
"무슨 작업인데?"
"선풍기, 에어컨 청소 작업."
"아하."
3월이 지나고4월이 지나고. 그렇게 달이 계속 흐르다 보면 다 시 무더위의 계절이 찾아온다.
그것을 대비해 미리미리 선풍기와 에어컨을 청소해 둬야 한다.
이것들을 청소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천장에 달려 있는 4개의 선풍기를 청소하려면, 우선 앞 보호 대를 제거한 뒤에 날개에 묻은 먼지들을 일일이 닦아 내야 한다.
에어컨은 필터 청소까지 다 끝내야 작업이 마무리된다.
그것을 단 세 명이서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희가 고생이 많다."
"군대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생인데, 뭐. 그보다 소식들었다."
"뭘?"
"최우수 분대장 됐다며?"
벌써 부대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다 보니 내부 소식은 참 기가 막히게 빨리 돈다. 이것이 군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이강진은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어, 그렇게 됐다."
"설마 포상 휴가도 줬냐?"
"어, 3박 4일."
"캬! 역시 포상 휴가 사냥꾼! 이번에는 무슨 꼼수를 부린 거냐?"
"꼼수라니. 정직한 방법으로 얻어낸 거라고."
사실 거짓말이다.
인맥이라는 이름의 꼼수를 부려서 얻어 낸 것이다. 만약 그곳 에서 탄약반장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이강진의 손에 3박 4일 포상 휴가증이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닌가.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분대장 수첩을 다시 건넸다.
"자, 이거."
"그거,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
"왜?"
"나, 주말 끝나고 다음 주에 바로 휴가 나갈 거거든."
"하아…… 부럽다, 녀석아."
임시 분대장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백우호는 이번 일을 통 해서 여실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강진에게 휴가를 나가지 말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견장 찰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는데. 줄까?"
"농담이야, 이 자식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몸을 부르르 떠는 백우호. 그만큼 분대장을 달기가 죽도록 싫 었다.
"슬슬 다시 작업 시작하러 가야겠다. 강진아, 쉬고 있어라."
"그래, 너도 고생하고."
백우호가 성태강과 곽분섭을 데리고 다른 생활관으로 향했을 때.
이강진은 짐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짐을 다 푼 후에 이강진은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를 찾았다.
그때 아직도 샛노란 깔깔이를 걸쳐 입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락없는 말년 병장의 모습이었다.
"충성!"
이강진의 거수경례 구호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남자, 오호만 병장.
"강진이구나.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 같다?"
"저, 분대장 교육대 파견 갔다 왔었습니다."
"아, 그래? 몰랐네. 미안하다. 취사병이 원래 부대 소식에 좀 둔한 거, 알잖아? 네가 이해 좀 해 줘라."
"하하,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이제 취사반으로 안 내려가시는 겁니까?"
오호만 병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틀 전부터 취사병 관뒀어. 이제 느긋하게 부대에서 시 간 보내다가 다음 주 월요일에 전역해야지."
전역하는 건 좋지만, 이제부터는 사회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 이 궁리를 해야 한다.
전역한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 제61화. 연결고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