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2) >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2)
설날 연휴 덕분에 병사들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장장 5일 이라는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설날에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군대에서 5일 동안 쉴 수 있는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 지 않는다.
행보관도 연휴 그리고 주말 동안은 병사들에게 별다른 작업을 시키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여기에 안심한 병사들은 설날 연휴 첫 날부터 마음 놓고 각자 만의 방식으로 휴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강진은 성태강과 곽분섭을 보낸 뒤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저예요, 엄마. 명절인데 뭐하고 지내세요?"
-아침에 행복이랑 같이 티비 보다가 슬슬 가게로 나갈 준비하고 있단다.
휴일에도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아니, 휴일이기에 오히려 더 바쁠 수밖에 없었다.
장사가 잘된다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강진은 어머니가 너무 무리하면서까지 일을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민수 아저씨한테 말해서 직원 좀 더 뽑으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인데…… 뽑아도, 뽑아도 모자 라더구나. 저번 달에만 하더라도 3명을 더 뽑았는데, 바쁜 건 여 전해.
갈수록 장사가 더 잘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가게가 워낙 잘되다 보니 황민수는 주식에 아예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이강진이 휴가를 나갔을 때, 오죽하면 황민수가 이런 말까지 했었다.
자기가 돈 줄 테니까 대신 좀 굴려 줄 수 없겠냐고.
이강진은 다른 사람의 돈을 굴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벌 면 좋겠지만, 잃으면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회귀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아는 동생의 돈을 대신 굴려 봤으나, 결국 원금도 찾지 못하고 전부 다 탕진해 버렸다. 그때 당시, 이강진에게 돈을 줬던 그 동생은 크게 신경 쓰지 말라면서 오히려 이강진을 위로했었다. 하지만 이강진의 마음은 영 편치 못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강진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돈까지 끌어들여 주식으로 돈을 굴리지 않겠다는 다 짐을 하게 되었다.
황민수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종목 추천은 해 줄 수 있다.
주식에 전혀 신경 스스지 못하게 된 황민수에게 이강진은 차라 리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했다.
물론 부동산에 관한 정보 또한 이강진이 제공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민수 아저씨한테 저, 3월에 휴가 나갈 테니까 그때 시 간 좀 내 달라고 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렇게 전해 두마.
"그리고 건강 꼭 챙기시고요. 새해 복도 제 몫까지 많이 받으 세요."
-호호, 고맙다. 아들도 새해 복 많이 받고. 하는 일 모두 잘 풀 리길 기원할게.
"고마워요, 엄마."
이미 잘 풀리고 있어서 사실 의미가 없는 기원이 될지도 몰랐 다.
그래도 뭐, 더 잘 풀리 면 좋지 않겠나.
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친 뒤에 이강진은 이 번엔 한지윤에게 전 화를 걸었다.
솔직히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일하고 있는 중에 괜히 방 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다행이도 이강진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했다.
"여보세요. 저, 이강진입니다."
-어머!
갑자기 민망함이 몰려온 모양인지 한지윤은 깜짝 놀라는 반 응을 취했다.
방송을 시작하고 나서부터일까. 한지윤의 리액션이 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그런 느낌이었다.
-미, 미안해요, 강진 씨. 아까 제 목소리…… 많이 이상했죠?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오늘, 기분 좋은 일 이라도 있었나 보군요."
-네, 들어 보세요, 강진 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다시 들뜬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영화 캐스팅 제안이 왔어요. 그것도 조연급으로요!
"그런가요? 혹시 영화 제목이 어떻게 되나요?"
"바람이 머무를'이라는 영화예요. 장르는……."
"사극이군요."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미리 말해 버린 이강진이었다.
'바람이 머무를'이라는 영화는 이강진이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였다. 곽정훈 감독이 총괄했으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인 무인 장원방의 일대기를 다룬 그런 영화다.
이강진뿐만 아니라 대충 역시 '바람이 머무를'이라는 영화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에 힘입어 영화는 천만 영화 반열에 오르 게 된다.
-장르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뒤늦게 후회를 해 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없다.
매번 하던 것처럼 대충 핑계를 대는 수밖에.
"제목을 듣는 순간, '아, 이건 무조건 사극이겠구나.' 하는 느낌 이 왔습니다."
-제목이 사극 티가 많이 나긴 하죠, 호호.
의심 없이 잘 넘겼다.
"무슨 배역으로 출연하시는 겁니까?"
-희미라는 역할로 캐스팅받았어요. 여장부 성격에 영화상 비 중도 높은 편이고.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이강진은 그 문제가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검술 연기가 필요하더라고요.
희미는 장원방의 호위 무사로 나오는 캐릭터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여검객인 만큼 액션을 많이 소화해야 한다.
한지윤의 액션 연기라.
지금이야 한지윤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어색하게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이강진은 생각이 달랐다.
한지윤의 연기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액션 연기에서도 뛰 어난 면모를 보였던 한지윤이라면, 검술 연기쯤은 금방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캐스팅 제의는 받아들이실 건가요?"
-네, 예전부터 곽정훈 감독님의 작품에 한 번이라도 출연해 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힘든 연기가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 전해 보려고요. 강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윤 씨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후후후, 강진 씨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더 용기가 나는 거 같아요.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꿈을 응원한다는 말을 들으면 늘 힘이 나는 법이다.
한지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밝아졌다.
어머니와 통화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박스를 나온 이강진은 잠시 하늘을 올려 다봤다.
지나칠 정도로 맑은 날씨.
"이 럴 때 휴가를 나갔어야 했는데."
괜히 1월 달에 휴가를 나간 걸까.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 * *
생활관에서 계속 누워서 티비만 보기도 지겨웠다.
뭔가 역동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강진에게 마 침 계기가 찾아왔다.
"이강진 상병님, 저 헬스장 갔다 오겠습니다."
손목 보호대를 착용한 기운상이 이강진에게 행적을 보고했다.
최근에 후임인 성태강에게 영향을 받은 모양인지 자주 헬스장을 드나들게 된 기운상.
연휴에도 변함없이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나도 같이 가자."
기왕 이렁게 된 거, 이강진도 기운상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동안 헬스를 너무 안 했다. 여태껏 운동해 온 게 아까워서 라도 계속 웨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래야 탄탄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기운상과 함께 헬스장을 찾게 되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몸을 가꾸는 두 사람.
그때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이 헬스장을 찾아왔다.
이강진의 동기, 백우호였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
"너도 헬스하러 왔냐?"
"아니."
백우호는 이강진의 말을 짧게 부정했다.
"이거 하러 왔지."
그의 손에 들린 건 바로…….
제기 였다.
"밖에서 제기차기 연습이나 할까 했었는데, 너무 줍더라. 그 래서 헬스장에서 하려고."
어떻게든 1등을 차지해서 포상 휴가를 얻겠다는 강력한 의지 가 느껴졌다.
한창 제기차기 연습에 몰입하던 백우호가 갑자기 이강진을 불 렀 다.
"강진아, 넌 제기 잘 차냐?"
"아니, 못 차."
그래서 이번 민속놀이 대회 우승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다.
하나 백우호는 끝까지 이강진을 의심했다.
포상 휴가 사냥꾼이라 불리는 이강진이었기에 견제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최고 기록이 몇인데?"
"열"
"그으래?"
백우호의 입가에 아주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 모습에 살짝 약이 오른 이강진은 반대로 백우호의 최고 기 록을 물었다.
"넌 몇 개나 차는데?"
"비 밀이다, 크큭!"
자신의 전력을 함부로 노줄시키지 않는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다.
헛웃음을 흘린 이강진.
"어떻게든 포상 휴가를 따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건 좋은데…… 제기차기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왜?"
"이 부대에는 제기차기의 왕이 존재하거든."
"왕이라고? 누군데?"
"나우형 병장."
나우형, 수송분과에 소속되어 있는 남자로, 별명이 '제기차기 의 왕'이다.
이 별명이 붙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작년 설날이다.
작년에도 이번 설날처럼 민속놀이 대회가 개최되었다. 종목도 제기차기, 윷놀이, 딱지치기, 이렇게 세 개로 동일했다.
제기차기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쥔 자가 바로 앞서 이강진이 언급한 나우형 병장이었다.
"그분, 제기 몇 개나 차는지 아냐?"
"잘은 모르는데."
이강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백우호한테 공유했다.
"아무리 못 쳐도 35개는 차신다."
"뭐어.…"
!"
백우호의 표정이 변했다.
"최소 35개를 찬다고?"
"그래, 비가 내려도, 바람이 몰아쳐도, 컨디션이 최악인 와중 에도 35개 이상은 무조건 차시는 분이야. 수송분과 사람들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거다. 나우형 병장의 전설적인 일화를."
설날 제기차기 대회 당일.
나우형 병장은 급성위장염에 걸린 상태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55개라는 신기록을 기록하면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괜히 제기차기의 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이강진에게 당시의 에피소드를 듣게 된 백우호는 무의식적으 로 욕을 내뱉었다.
"씨발, 그게 사람이냐. 제기 차는 기계지."
"듣고 보니 제기 기계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겠네."
"그럼 제기 말고 딱지치기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윷 놀이?"
"그것도 힘들 걸? 딱지치기 쪽은 8살 때부터 꾸준하게 딱지를 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딱지를 잃어 본 적이 없는 딱지치기 의 왕, 황경일 병장님이 있고, 윷놀이에는 던졌다 하면 윷 아니 면 모만 나오는 윷놀이계의 신, 박홍 병장님이 있으니까."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들 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그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승은 애초에 넘볼 수도 없다.
백우호는 말도 안 된다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아니, 여기가 무슨 민속놀이 특수부대도 아니고. 뭐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어?"
"그러 니까 말했잖아. 우승은 그냥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상 좋을 거라고."
넘어야 할 산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존재한다. 빠른 포기가 때로는 답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이강진처럼 말이다.
백우호에게도 포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이강진의 제안을 거 절했다.
"아니, 난 포기 안 할 거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무조건 내가 포상 휴가 따낼 거야. 반드시!"
의욕은 높게 사지만, 이강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의욕만으로 어떻게 해볼 상대들이 아니란 것을.
<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