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1) >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1)
행보관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빡세게 작업에 임했던 두 말년들.
개인 정비 시간이 되자 미친 듯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은 버리기보다는 후임들에게 넘기곤 했다.
즉, 짬 처리다.
"자! 너희들이 원하는 A급 깔깔이다! 가질 사람, 손!"
"일병 기운상!"
"이병 곽분섭!"
"이 병 최영고!"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다.
깔깔이는 군 보급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물품이다. 오죽하 면 전역자들이 가장 많이 챙겨 가는 물건 중 하나가 깔깔이라고 알려져 있을까.
겨울의 필수 아이템이자 보관 상태마저 A급인 깔깔이의 소유 권은 최영고에게 넘어 갔다.
"우리 막내가 여기서 가장 오랫동안 군 생활해야 하니까 네가 써야지. 그거 입을 때마다 형 생각해라."
"이 병 최영고! 예, 알겠습니다!"
"자, 다음 물건 경매 들어간다!"
전역자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이런 짬 처리 현장을 볼 수 있 다.
이강진은 딱히 받을 만한 물건이 없었기에 제3자가 되어 구 경만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나가면 자리가 많이 비겠네.'
슬슬 신병이 들어와야 할 때가 되었다.
'그 다음 신병이…… 어디 보자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하는 이강진.
누가 들어올지 머릿속으로 미리 예상을 해 보려고 했다.
그때 황지웅이 이강진을 찾았다.
"강진아, 이거 받아라."
흰색 봉투였다.
내용물을 눈으로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족감으로 봤을 때에 는 분명 돈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분과 운영비 남은 거. 너한테 준다는 걸 여태 깜빡하고 있었네."
간혹 분과 운영비를 몰래 떼어 먹는 선임도 있다.
내무 부조리로 인해 전출당한 최칠완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황지웅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안준렬도, 전마등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분과 운영비를 횡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선임들도 그랬듯이 너도 분과 운영비, 깨끗하게 관리해.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1 분대가 유독 분과 운영비를 투명하게 사용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마등이 분대장을 달기 전, 선임 분대장이 분과 운영비를 몰 래 횡령하다 행보관에게 딱 걸린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1분대는 행보관에게 제대로 탈탈 털리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분과 운영비는 무조건 투명하게 사용하자는 규 율이 암묵적으로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
이강진도 딱히 이거를 몰래 빼돌릴 생각은 없었다.
이미 젊은 나이에 주식으로 수십억 원의 자산을 확보했는데, 고작 이런 푼돈에 욕심을 왜 내겠나.
'이거 가지고 나중에 두 말년들 전역 파티 때 보태면 되겠군.'
두 명의 전역 파티를 동시에 해 줘야 하다 보니 비용도 더 많 이 든다.
'안 되면 내 사비로 보태면 되는 거고.'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강진은 돈이 아쉽지 않은 분대장이니까.
* * *
황지웅과 고필중이 말년 휴가를 나가자, 1생활관 한쪽이 텅 빈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존재감이 워낙 강했던 둘이어서 그런지 특히나 휑한 느낌이 더 심하게 체감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전역하면 다음은 서일주의 차례다.
서일주는 매트리스에 그대로 누웠다.
"이제 내가 분대 왕고군, 후후."
얼굴에 스킨로션을 바르던 백우호가그런 서일주를 재촉했다.
"서일주 병장님이 어서 전역하셔야 다음에 강진이하고 제 차 례가 오지 않겠습니까."
"나도 빨리 나가고 싶어. 근데 국방부에서 안 보내 주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아, 무장공비라도 잡아야 하나."
"잡으실 자신 있으십니까?"
"……아니."
여태껏 실제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병사들.
그런데 만약 진짜로 전쟁이 터지면, 솔직히 훈련받은 그대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선 다들 소심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냥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그리고 얌전히 전역하는 게 최 고다.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무리해서 군대를 빼는 것보단 그냥 얌전히 입대했다 가 깔끔하게 전역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베레모를 쓴 이강진이 분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식사 집합하기 전에 침상 정리 깔끔하게 하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일주 병장님, 아침 드실 겁니까?"
"메뉴 뭔데?"
"제 기억으로는 아마…… 비엔나소시지 볶음, 콩나물국, 배추김치, 김, 우유. 이렇게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가야지."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소시지 하나만으로도 내려갈 만한 가 치가 충분했다.
1분대 전원이 사열대 앞에 집합했다.
현재 인원, 일곱 명.
많이 줄어들었다.
하나 줄어든 만큼 다시 새로운 병사들이 충원된다.
설날이 끝난 이후, 한동안 신병들이 계속 들어올 터.
1, 2월 군번이 대체로 많은 만큼, 이들이 훈련소를 수료하는 기간인 2, 3월에 신병들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지는 이강진이었다.
* * *
설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전까지 병사들은 정신없이 작업에 임했다.
행보관이 설날이 되면 병사들 작업 못 시킨다고 미리미리 빡 세게 굴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병사들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오자마자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이강진은 이젠 익숙해진 생활관 천장을 바라보면서 무념무상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을 부려 봤으나.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 니다. 각 분과 분대장들은 지금 즉시 행보관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군말 없이 몸을 일으킨 이강진은 관물대 안에 짱박아 둔 분대 장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 망할 놈의 분대장.'
지금 당장 어깨에 달려 있는 초록 견장을 뜯어 버리고 싶었 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내면서 행보관실 로 향한 이강진.
1분대부터 수송까지. 모든 분과들이 전부 다 집합했다.
행보관은 이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구먼. 근래에 분대장이 교체된 분대가 어디어디였더라?"
"1 분대 입니다."
"3분대도 교체되었습니다."
"행정분과도 바뀌었습니다."
행정은 김철이 분대장을 달게 되었다.
이강진과 김철이 현재 분대장 라인 중에서 가장 막내들이었 다.
행보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분대장 차게 된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임해라. 그리고 후임 관리 철저하게 하고. 설날 끝나면 신병들 대거 들어오는 거, 다들 알고 있겠지?"
"예!"
"한 분과당 최소 2명 이상의 신병들이 배치될 테니까 미리미 리 준비해 둬라. 분대장 수첩도 잘 정리해 두고."
"예, 알겠습니다."
신병 이야기는 겸사겸사 한 거다.
원래는 이걸로 분대장들을 부른 게 아니었다.
"내일부터 명절 시작되는 거, 다들 알고 있겠지?"
"예!"
"명절 때는 그냥 생활관에서 쉬거나, 아니면 휴게실에서 놀거 나, 헬스장에서 운동하거나.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면 된다. 그 리고 대대장님 특별 지시 사항으로 각 중대별로 민속놀이 대회 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민속놀이 대회.
하나 체육대회만큼 거창한 건 아니었다.
"종목은 제기 차기, 윷놀이, 딱지치기. 이렇게 세 종목으로 진행할 거다. 모든 중대원들이 참가할 필요는 없고. 참가를 희망 하는 사람들만 받을 거다. 참고로 1등 상품은 2박 3일 포상 휴가증이다."
포상 휴가가 걸려 있으니, 굳이 참여를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 서 다들 참가하려고 할 것이다.
"분대장들은 회의 끝나자마자 각 종목별로 참가 희망자 조사 해서 나한테 제줄해라. 중복 출전도 허용되니까 가급적이면 많이 참가하라고 독려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특별히 뭐 시키거나 하진 않을 거다. 작업도 안 시킬 거고. 대신 대대장님이 중간에 우리 부대를 방문할 수도 있 으니 너무 퍼질러 지내진 마라. 쉴 때에도 너희가 군인이라는 걸 항상 염두하고 쉬도록. 잘 기억해라."
"예!"
"좋아. 특이 사항 있는 사람?"
분대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동시에 입을 모았다.
"없습니다!"
"그럼 해산."
생활관으로 향한 이강진은 1분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행보관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분대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부분은 역시 민속놀이였다.
이강진은 분대장 수첩 한 장을 찢었다.
"여기 종이에 종목들을 적어서 문 앞에 붙여 둘 테니까,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종목 아래에 자신의 관등성명을 적어 둬 라. 태강이하고 분섭이는 내일부터 휴가니까 너희는 제외하고."
지금 당장 이름을 적을 기세로 펜을 꺼낸 백우호.
"난 무조건 다 참가할 거다. 강진이, 너도 세 개 다 참가하지?"
"하긴 해야지."
그러나 이강진은 휴가를 따낼 자신이 없었다.
제기차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딱지치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윷놀이는 운적 요소가 너무 강하다.
회귀하기 이전에도 이강진은 명절날 시행되는 민속놀이 대회 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자지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적어 넣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목 숨 걸고 반드시 1등을 따내서 포상 휴가를 쟁취하겠다는 생각 은 없었다.
어차피 쌓여 있는 휴가는 많다.
분대장 휴가에다가 군종병 휴가, 정기 휴가, 여기에 사단장한 테 받은 포상 휴가와 혹한기 훈련 때 한중훈 중사를 잡고 얻은 포상 휴가까지.
휴가가 너무 많아서 전역 전까지 다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돈뿐만이 아니라 휴가까지 부자인 이강진.
'이번에는 그냥 즐긴다는 심정으로 참가해야겠군.'
부담 없이 임하기로 했다.
* * *
설날 연휴 첫 날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성태강과 곽분섭은 휴가를 나가기 위한 준비 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곽분섭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성태강에게 재차 고마움을 표했다.
"성태강 일병님 덕분에 시내까지 공짜로 차 타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강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설마 태강이 매니저 분 차 타고 가기로 했냐?"
"예, 그렇습니다만……."
이강진은 곽분섭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위로의 뜻이었다.
"고생해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위병소로 내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지난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성태강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수많 은팬들을.
이번에는 곽분섭이 두 번째 희생양으로 찍히게 되었다.
행정반에 신고를 한 뒤에 막사를 벗어나는 성태강과 곽분섭.
두 사람은 마중 나온 이강진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휴가 잘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전화 꼬박꼬박 하는 거,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기왕 사열대로 나온 김에 이강진은 전화 부스로 향했다.
명절인데 부모님에게 전화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가게 바빠지기 전에 미리 연락해야지.'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지윤에게도 전화를 하기로 했다.
비록 명절 때 휴가는 못 나가게 되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목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강진은 만족한다.
< 제59화. 군대에서 보내는 설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