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분대장 이강진 (2)
가장 늦게 모습을 비준 김명찬은 이강진을 보면서 놀라움을 드러냈다.
"뭐야! 막내가 어느새 분대장까지 찼어!"
"며칠 전에 찼어요."
"이야-! 시간 진짜 빠르네. 나 있었을 때 막 자대에 전입 왔던 신병이 이제는 1분대 분대장이라니. 신기하네."
제법 선임티가 나는 이강진.
애초에 그는 이등병 시절 때부터도 묘하게 신병 느낌이 안 났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총명함을 보였던 이강진이 분대 장을 찬 모습을 보니, 안준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러면서 서일주에게 말했다.
"일주, 넌 좋겠다. 분대장 건너뛰어서."
"헤헤, 그렇지."
이강진과 서일주가 두 달…… 아니, 한 달이라도 차이가 났더 라면 서일주가 잠깐 분대장을 찼을지도 몰랐다.
서일주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분대장을 안 차도 되고, 게다가 똑똑한 후임이 알아서 분대를 잘 이끌어 줄 테니.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서일주는 나중에 중대 왕고가 되면,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있 다가 전역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이강진이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한편 전마등은 새로운 후임들의 얼굴을 쭉 훑었다.
"가만 이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성태강이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충성, 일병 성태강. 사회에 있을 때 KGE라는 그룹에서 가수 활동을 하다가 왔습니다."
"설마 KGE2I 태강?"
"예, 그렇습니다."
"와, 세상에! 명찬이 형, 우리 부대에 연예인이 있어! 야, 준렬 아! 봐 봐! 연예인이라고, 연예인!"
그러나 안준렬은 두 사람과 다르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마등이 형 전역하고 난 다음에 바로 들어온 후임이야. 나하 고도 알고 있어."
그런 안준렬도 막내 라인들은 알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최영고를 아는 전역자들은 당연히 아무 도 없었다.
서로 얼굴을 몰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같은 1분대원들이라는 사실뿐이다.
* * *
전마등이 안준렬, 김명찬과 함께 가져온 먹거리들을 올려놓았다.
"아, 치킨하고 피자 사왔는데. 행보관님, 이거 나중에 막사로 올려도 됩 니까?"
"나중에 올릴 필요 있나. 지금 가져가면 되잖아. 막사 구경 안 할 거냐?"
"엇, 해도 됩니까?"
"상관없다. 가서 애들하고 인사도 나누고. 이것들 가지고 생활관에서 먹어라."
"감사합니다!"
행보관 입장에선 죄고의 배려를 해 준 셈이었다.
관사에서 뒤늦게 나온 1부소대장과 함께 막사로 올라가는 이 들.
행보관이 있어서 그런지 복잡한 절차도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막사로 들어간 전역자 3인방.
이들은 다른 병사들이 머물고 있는 생활관을 찾았다.
"짜식들, 잘 있었냐! 형 왔다!
"헉, 마등이 형이잖아!"
"준렬이 형도 왔네! ……근데 옆에 있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대부분은 김명찬과 모르는 사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명찬이 아는 이들은 거의 다 전역했 으니 말이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생활관으로 올라온 오호만 병장이 예고 도 없이 방문한 김 명찬을 보고 외쳤다.
"혹시 김명찬 병장?"
"호만아!"
드디어 아는 얼굴을 만났다.
오호만 병장과 뜨거운 포옹을 주고받으려 던 찰나였다.
갑자기 김명찬의 행동이 멈췄다.
"……야, 짬내 왜 이렇게 심하냐?"
"심할 수밖에. 나, 쥐사병이잖아. 설마 전역했다고 그것도 잊어버린 거야?"
"아니, 잊은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짬내를 맡아서 그런 걸까.
몸이 알아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키득키득 웃던 오호만 병장이 자초지좋을 물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아, 마등이하고 준렬이하고 우리 애들 보려고 면회 왔는데, 행보관님이 기왕 온 거 막사도 구경하고 가라고 해서 올라온 거 야."
"아, 행보관님 계시는구나. 좀 있다가 말년 휴가 이야기 꺼내 봐야겠네."
"뭐야, 너도 곧 전역하냐?"
오호만 병장은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전역해야지. 나가서 할 일도 있고."
"그래, 전역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성 공한 거라고 하더라. 잘했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마등도 오랜만에 오호만 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 호만이, 언제 병장 달았냐?"
"한참 전에 달았지. 근데 마등이 형, 얼굴에 살이 좀 많이 붙 었네? 어째 말년 때보다 더 찐 거 같은데?"
"이게 사회인의 애환이라는 거다."
사회에서 스트레스만 받다가 이렇게 그리웠던 얼굴들과 다시 만나게 되니 전역자들은 한편으론 기뻤다.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 * *
1생활관에 옹기총기 모인 구 1분대원들과 현 1분대원들.
이들은 생활관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으면서 옛날 일들을 회 상하느라 바빴다.
김명찬의 이등병 시절 때의 일을 비롯해서 전마등과 안준렬 이 얼굴 붉히면서 말다툼을 했던 일 등등 잠시 잊고 있던 옛 추 억들을 꺼냈다.
물론 김명찬이 말년에 이강진, 백우호에게 이등병 놀이를 하 려고 했다가 행보관에게 털렸던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전역 때까지 명찬이 형은 행보관님의 노예가 되어버렸?지."
"야, 그건 말 꺼내지도 마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 도 벌떡 일어난다니까? 안 그래도 나, 오늘 오기 전에 재입대하 는 꿈꾸고 왔어. 얼마나 소름이 끼치 던지…… 웬만한 공포영화 저 리 가라는 수준이었다니까."
전역자들은 꼭 재입대를 하는 꿈을 꾼다.
이강진도 회귀 전에 다시 군대로 끌려가는 꿈을 몇 차례 꾸곤 했었다.
재입대 꿈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잔뜩 맺힌 채 기상했었다.
지금은 실제로 재입대를 해 버렸지만 말이다.
안준렬은 1생활관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있던 자리는 지금 누가 쓰는 거야?"
"이 병 최영고!"
막내가 쓰는 중이었다.
안준렬은 최영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관등성명 붙일 필요 없어. 그냥 형이라고 불러. 우리가 뭐 군인도 아니고. 그냥 아저씨들인데, 너무 딱딱하게 안 굴어도 돼."
"아,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최영고 입장에선 쉽게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최영고한텐 대선배격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분대의 살아 있는 전설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사용했던 메트리스와 관물대를 살폈다.
김명찬이 관물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여기는 누가 쓰고 있어?"
"저요."
백우호가 김명찬의 자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형, 안에 취식물 짱박아 둔 거 있었지? 그거 때문에 안에 벌 레가 얼마나 꼬였는지 알아? 치우느라 혼났다고."
"내가 그랬었나? 하도 예전 일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안 나네."
"그래 봤자 1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 형, 뮤지컬 배우시라면 서. 대본은 대체 어떻게 외우는 거야?"
김명찬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열정으로."
전역자들과 1분대원들은 김명찬의 대답에 웃음을 터트렸다.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김명찬은 여전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 * *
막사 구경이 끝나고 다시 면회실로 돌아온 이들.
일, 이등병 들은 놔두고, 이강진과 백우호, 서일주 그리고 곧 전역자들의 뒤를 따르게 될 황지웅과 고필중. 이렇게 다섯 명만 전역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면회실로 내려왔다.
PX도 들러서 간식거리를 사 왔다.
막사에서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끝낸 뒤에 전역자 들은 슬슬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이제 가야겠다.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가야지. 차 엄청 막힐 테니까."
차는 위병소 바로 옆에 주차시켜 놨다.
위병소까지 배웅하기 위해 나서는 1분대원들.
전역자들은 후임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전역하면 다들 연락해라! 술이라도 사줄 테니까!"
"네, 꼭 연락할게요!"
"들어가, 형들!"
위병소를 통과한 전역자들은 전마등이 끌고 온 차에 탑승했 다.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돌리며 도로로 향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뒤로 한 채 이들은 다시 일상이라는 이름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전역자들을 보면서 이강진은 여러 가지 생각 이 들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얼굴들을 오늘 보게 되니, 기분이 뭔가 묘했다.
전역자들이 적어 준 개인 번호 쪽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강진.
그는 번호가 적힌 쪽지를 수첩 안쪽에 잘 넣어 뒀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 * *
다시 평일이 돌아왔다.
오늘은 황지웅과 고필중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바로 내일, 이들은 말년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부대로 복귀해서 이틀 동안 생활하다가 바로 전역하 게 된다.
즉, 군대에서 보내는 평범한 일과 시간은 오늘로서 마지막이 라는 것을 뜻했다.
아침 점호 시간.
국군도수체조까지 모두 마친 뒤에 2부소대장이 황지웅과 고 필증을 바라봤다.
"지웅아, 필중아."
"병장 황지웅!"
"병장 고필중!"
"오늘이 너희한테 마지막 평일이잖냐. 마지막인 만큼 빡세게 아침 구보, 어떠냐?"
의욕이 넘치는 부소대장과는 달리 당사자들은 그렇게까지 기 쁘지 않았다.
"부소대장님……."
"굳이 저희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헤헤헤."
대충 에둘러 말을 해 봤으나, 부소대장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
"전체 뛰어!"
"엇!"
"가!"
설마 마지막이라고 일부러 굴리는 건 아니겠지?
두 말년은 이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 *
오전 집합.
행보관은 작업에 맞춰서 병력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황지웅과 고필중에게 고정되었다.
"거기 말년 둘!"
"병장 황지웅!"
"병장 고필중!"
불길한 느낌이 이들을 엄습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일과 시간 가지는 건데, 이 행보관이랑 같이 작업이나 하러 가자."
두 말년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침 점호뿐만 아니라 오전 집합까지.
간부들은 '마지막'이라는 핑계를 대고서 어떻게든 두 말년을 굴리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말년들이 느끼기엔 그랬다.
결국 행보관과 함께 작업을 나서게 된 두 사람.
말년에 행보관의 노예로 일해야만 했던 김명찬의 기분이 이 랬을까.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게 우리 말년들인데. 행보관 님도 너무하시지."
"산 올라간다니까 옷 두껍게 입어."
"오냐. 아그들아, 그럼 우리 먼저 간다."
"고생하십시오. 충성!"
두 말년을 먼저 보낸 이강진과 1분대원들.
이들도 곧장 작업에 나서야 했다.
생활관에서 정글모와 목장갑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서일주가 달력을 바라봤다.
"다음 주가 설날이네?"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백우호가 관심을 보였다.
민족 대명절, 설날.
하나 이들은 군대에 계속 남아 있어야 했다.
서일주가 분대원들을 보면서 물었다.
"설날 때 휴가 나가는 사람 있어?"
"이병 곽분섭!"
"일병 성태강!"
단 둘뿐이었다.
서일주는 백우호와 이강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강진이야 저번에 휴가 갔다 오기도 했고, 쌓아 놓은 휴가도 많을 테니 상관없는데. 우호야, 넌 휴가 못 나간 지 좀 되지 않 았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설날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한 의욕을 드러내는 백우호.
포상 휴가에 굶주린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명절 때 포상 휴가를 걸고 전통 놀이 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제가 포상 휴가를 싹 쓸어 갈 겁니다, 후후후!"
과연 그게 뜻대로 될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 제58화. 분대장 이강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