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8화. 분대장 이강진 (1) >
제58화. 분대장 이강진 (1)
오랜만에 듣는 전마등의 목소리에 이강진은 반가운 기색을 드 러 냈다.
"형이 웬일이야?"
-짜식, 웬일이긴.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필증이하고 통화하면서 들었다. 이 번 주, 혹한기 훈련이었 다며?
"뭐…… 그렇지."
-아까 전화하니까 다들 자고 있다고 하더라.
"철이가 받았었지?"
-응? 어떻게 알았냐?
"아까 화장실에서 나한테 전화 왔었다고 이야기해 준 게 철이 거든."
한지윤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조금 아쉽긴 했다.
그래도 전마등의 목소리를 오래간만에 들으니까 기뻤다.
-여하튼 혹한기 훈련받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말이다. 나하고 전역자 몇 명이랑 해서 부대 면회 갈까 하는데. 괜찮 지?
"면히? 누구누구 오는데?"
"일단 나하고 준렬이는 확정이고, 인혁이는 못 올 거야. 명찬 이 형은 잘 모르겠네. 요즘 그 형, 무대 준비한다고 정신없거든."
김명찬과 외곽 근무를 섰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정말 뜬금없게도 김명찬은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고 했었다.
지금은 자신만의 꿈을 아주 착실하게 잘 이루어 가고 있는 듯 했다.
-아, 맞다 그리고 그…… 오종한이라고 했나? 1 분대에 새로 전 입 왔다던 그 아저씨.
"어, 오종한 형, 맞아."
-그 사람도 같이 데려갈까 했는데, 대회 준비 때문에 바쁘다 고 안 되겠다고 하더라.
다시 프로 게이머로 복귀하게 된 오종한.
지금쯤 숙소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전마등과의 전화를 통해서 짧게나마 전역자들의 소식을 접하 게 된 이강진은 감회가 새로웠다.
다들 그래도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안 되면 나하고 준렬이, 둘만이라도 갈 거니까 다음 주에 면회 잡아 둬라. 네가 분대장이지?
"아직 아니야."
-어? 그래? 난 또. 지금쯤 네가 분대장 달고 있을 줄 알고 일 부러 너 바꿔 달라고 한 거였는데.
"그래도 하는 일만 보면 거의 분대장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면회는 일단 신청해 둘게. 그리고 올 때 맛있는 거 꼭 사 오고."
-알았다, 알았어. 짜식, 상병 달았다고 이제 이런 멘트도 치네. 걱정 마라, 이 형들만 믿어.
토요일 오전 10시. 그렇게 면회 일정을 잡아 두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통신반장이 이강진에게 물었다.
"마등이가 뭐라고 했어?"
"다음 주 토요일에 면회 온다고 했습니다."
"면회? 전역하고 부대 방향으로 오줌도 안 쌀 거라고 하던 녀 석이 면회라니, 거참."
군대는 싫어하지만, 군대에서 만난 친구, 동생 들은 싫어할 수 가 없다.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 온 전우들 아니겠 나.
얼굴이 보고 싶어 어쩔 수밖에 없다.
'다음 주는 재미있는 주말이 되겠군.'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혹한기 훈련이 끝난 뒤에 1분대에겐 커다란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분대장 교체식이다.
자신의 전투복 상의를 바라보던 황지웅은 초록색 견장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이 지긋지긋한 초록 견장, 드디어 떼는 구나."
"황지웅 병장님, 처음에 분대장 달고 싶어 하셨던 거 아닙니 까?"
백우호가 그를 놀리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옛 기억이 떠오른 황지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내가 미쳐서 그랬던 거고. 안 그래도 내 군 생활 역사상 최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으니까 말하지 마라."
"하하,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초록 견장에 눈이 팔려서 분대장을 달고 싶었던 황 지 웅.
그러나 막상 분대장을 달고 나니 초록색 안개가 걷히고 현실 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되는 분대장 회의.
무슨 일이 있다 싶으면 '분대장 집합!'이라 외치는 중대장.
이 지옥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행정반에 있던 김철이 1분대를 찾았다.
"곧 분대장 교체식 가진다니까 다들 집합하시랍니다."
"오냐! 강진아, 다 외웠지?"
"예."
분대장 신고식 때 필요한 대사를 전부 머릿속에 입력해 뒀다.
군종병 마크 하나 달려 있던 이강진의 전투복 상의에 마침내 초록 견장이 씌워질 예정이었다.
이강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망할.'
분대장을 안 다는 게 더 좋긴 하다. 하지만 이강진이 분대장을 안 달게 되면 백우호가 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대 운 영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백우호는 리더십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카리스마도 부족하 다. 이것이 선임들의 평가였다.
반면 이강진은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대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다.
안준렬이 강조했던 희생정신까지 무장하고 있는 이강진이 결국 차기 분대장으로 지정된 것이다.
병력의 집합이 끝났을 때.
이강진은 황지웅과 함께 중대장 앞에 섰다.
"중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황지웅의 구호에 맞춰서 두 사람이 나란히 중대장에게 거수 경례를 선보였다.
이후, 황지웅의 차례가 계속 이어졌다.
"신고합니다! 선임 분대장 병장 황지웅은 2014년 1 월 22일부 로 후임 분대장 상병 이강진에게 분대장에 대한 권한을 인계하 였습니다!"
"후임 분대장 상병 이강진은 2014년 1월 22일부로 선임 분대 장 병장 황지웅으로부터 분대장에 대한 권한을 인계받았습니 다! 이에 신고합니다!"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이강진.
이제는 이강진이 주도할 차례다.
"중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중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 황지웅의 어깨에 붙어 있는 초록 견장을 직접 떼 준 후에 이강진의 전투복 상의에 붙여 줬다.
"지웅이, 그동안 분대장 맡느라 고생 많았다."
"병장 황지웅! 감사합니다!"
"그리고 강진이는 지금까지 보여 줬던 모습처럼 1분대를 잘 이끌어 가도록 해라. 이 중대장이 너한테 거는 기대가 매우 크 다. 알겠나."
"상병 이강진! 예, 알겠습니다!"
이렁게 1분대는 또다시 세대 교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분대장이 된 이강진.
생활관으로 복귀하자마자 황지웅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자유다, 자유! 아아아아아!"
포효까지 내지를 정도였다.
그동안 초록 견장이 얼마나 그의 어깨를 심하게 짓누르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제 황지웅에게 남은 건, 고필중과 같이 말년 휴가를 떠날 준비만 하면 된다.
물론 그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 번 주 주말에 마등이 형하고 준렬이 형 오는 거, 알고 계시 지 말입니다?"
"아, 그랬었지."
이강진은 이미 행보관에게 허가도 받아 뒀다.
1분대 단체 면회가 될 것이다. 황지웅과 고필중도 참석해야 한다.
"인혁이 형은 못 온다고 했었지?"
"예, 종한이 형도 못 온다고 들었습니다. 명찬이 형은 어떻게 될지 당일에 가 봐야 알 거 같다고 했습니다."
"하여간 그 양반들. 전역했는데 굳이 여길 또 올 생각을 왜 하 는지 모르겠네."
아직 현역이어서 그런지 황지웅은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 형들이 올 때 피자하고 치킨 사 오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치킨과 피자 덕분에 그냥 아는 형들에서 귀한 손님으로 신분 이 상승했다.
역시 먹을 게 답이다.
토요일 새벽.
전마등은 안준렬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차를 끌고 나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차도 쪽에 서 있는 안준렬의 모습이 보였
"야, 준렬아!"
"오랜만이야, 형."
"그러게, 진짜 오랜만에 본다. 인혁이는 걔 전역하기 전에 한 번 봐서 그러려니 하는데, 너는 엄청 오래간만에 보는 거 같은 데. 나 전역 이후에 처음 보는 건가?"
"아니, 중간에 내가 휴가 나왔을 때 한 번 봤던 적 있잖아."
"아…… 그런가? 미안, 내가 자주 깜빡깜빡해."
보조석에 앉은 안준렬은 전마등의 모습을 쭉 훑었다.
"형, 살 좀 찐 거 같은데?"
"쪘어. 한 7킬로 늘었을걸."
"어쩌다가 그렇게 쪘어?"
운전대를 돌리던 전마등은 말을 시작하기 전에 깊은 한숨으 로 스타트를 끊었다.
"말도 마라. 우리 부장님이 회식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기 분이 좋다고 회식, 업무가 잘 풀린다고 회식, 옆집 고양이가 새 끼를 낳았다고 회식. 미칠 노릇이다, 진짜로."
"아니, 옆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든 말든 그게 회사 회식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냥 아무 이유나 붙이는 거지, 뭐. 너는 어떻게 지내냐?' 안준렬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공부하면서 시간 보내고 있어."
"공부라, 너하고 잘 어울리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준렬의 농담에 전마등은 슬쩍 웃고 말았다.
가기 전에 안준렬은 오늘의 멤버를 확인하려고 했다.
"형하고 나하고 둘만 가는 거지?"
"아니, 한 명이 추가됐어. 어제까진 안 된다고 했었는데, 갑자 기 연락오더니 자기도 픽업해 달라고 하더라."
"누군데?"
전마등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전마등의 장난기는 전역 이후에도 여전했다.
* * *
토요일 오전 시간이 되었다.
이강진을 포함한 병사들은 전원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면회실로 내려갈 예정인데, 단체로 활동복을 입고 내려가기 에는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고필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그 양반들 만나러 가는데 굳이 A급 전투복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나?"
그의 불만은 이강진이 받아 줬다.
"그래도 먼 길 오느라 고생한 형들인데, 깔끔한 모습으로 만 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
맞는 말이어서 더 한숨이 나왔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전마등 일행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던 와중이었다.
사복을 입은 행보관이 1생활관을 찾았다.
"마등이 왔댄다. 내려가자."
"설마 행보관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왜? 나는 내려가면 안 되냐?"
"아, 아닙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결국 행보관과 함께 면회실로 내려가기로 한 1분대원들.
내려가면서 행보관은 1부소대장의 행방에 대해 말해줬다.
"아까 전화해 봤는데, 여태껏 자고 있더라. 씻고 바로 면회실 로 온다고 하니까 그리 알고 있으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하여튼 녀석들……. 전역했으면서 부대에 뭔 일이 있다고 먼 길을 다 오고 그런대."
투덜거리는 행보관이었으나, 얼굴에는 반가움과 기대감이 섞 여 있었다.
행보관도 전역자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기야 오랫동안 자신의 밑에서 구르고 또 구른 사람들 아닌 가. 전역하고 난 다음에 밥은 잘 먹고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강진도 그랬다.
면회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충성!"
전마등이 장난스럽게 행보관에게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안준렬도 덩달아 따라했다.
피식 웃는 행보관은 뒤이어 바로 잔소리를 날렸다.
"충성은 무슨, 민간인이 충성을 왜 하냐? 그보다 너희들만 왔 냐?"
"한 명 더 왔습니다. 잠시 화장실 갔어요. 슬슬을 때가 되었 는데……."
면회실 문이 열렸다.
전마등, 안준렬과 함께 이곳에 오게 된 남자, 김명찬.
그가 행보관을 보더 니 경례 자세를 취했다.
"충! 성!"
행보관을 보고서 전역자 셋이 다 같은 반응을 보이니,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누가 보면 세 명이서 짠 줄 알겠다.
< 제58화. 분대장 이강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