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화. 혹한기 (3) >
제57화. 혹한기 (3)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늦은 시간에 병사들은 겨우 훈련 장소 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가 다 지치고 힘들었다.
졸음, 추위와의 싸움을 끊임없이 이어 간 끝에 겨우 승리를 쟁 취하게 된 병사들.
1분대에선 행군 열외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물집 환자도 고필중 말고는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물집이 잡히기라도 했다면, 앞으로 남은 혹한기 훈련 내내 물집에서 오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고필중이 딱 그런 신세가 되어 버렸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중대 왕고이지 않은가. 간부들을 제외하고 빠릿빠릿하게 안 움직 이냐면서 잔소리할 선임은 없었다.
"자! 텐트 치자! 빨리빨리 움직여! 무브, 무브!"
황지웅의 주도하에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 다.
병장급이 세 명이나 있다 보니 텐트를 설치하는 속도가 상당 히 빨랐다.
다른 분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빠른 진행력을 보였다.
여기에 겉으로는 상병이지만 속으로는 부사관급 경험을 지닌 이강진까지 합세하니, 더욱 속도가 붙었다.
결국 1분대가 가장 먼저 텐트를 설치했다.
"군장, 의류대 안으로 집어던져라! 일단 먼저 씻자!"
"예, 알겠습니다!"
우르르 몰려가는 1분대원들.
받아 놓은 물을 만진 순간, 병사들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
"으아아!"
"이거, 냉수 아닙니까?"
통신반장이 쓴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처음 받았을 때에는 온수였는데, 그세 식었더라. 찬물로 샤워한다고 안 죽으니까 그냥 씻어라. 사내자식들이 엄살은…… 와이!"
바가지를 든 통신반장이 발가벗은 1분대를 향해 물을 끼얹었 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통신반장의 말대로 냉수 샤워 한 번 한다고 안 죽는다. 찝찝 한 것보다 차라리 찬물로 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병사들은 바들바들 떠는 몸을 억지로 샤워장으로 밀어 넣었다.
쏴아아아아!
피부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텐트를 칠 때 못지않은 빠른 속도로 샤워를 마친 1분대원들.
텐트로 들어가자마자 내복, 깔깔이를 비롯한 옷들을 잔뜩 껴 입기 시작했다.
"어으, 추워!"
"누구, 핫팩 가지고 있는 사람!"
"일병 기운상! 몇 개 필요하십니까?"
"3개만 던져줘!"
"운상아, 나도 1개만!"
"예, 알겠습니다!"
핫팩을 찾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애타게 들렸던 적이 있을까.
이들이 냉수 샤워의 후유증에서 빠져오려고 노력할 때, 이강진은 다시 전투복을 입었다.
"행보관님한테 취침 보고 하고 오겠습니다."
텐트를 나서자마자 칼바람이 이강진을 덮쳤다.
CP텐트가 바로 옆이라서 그냥 대충 옷을 입고 나왔건만. 금세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CP텐트로 향한 이강진.
안쪽에서 느껴지는 난로의 따스한 기운에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충성!"
난로 앞에 앉아 있던 행보관이 이강진의 거수경례를 받아줬
"무슨 일이냐?"
"1 분대 취침 보고 하러 왔습니다."
"빠르군. 특이 사항은 없나?"
"예, 없습니다."
"그럼 가서 자라. 1부소대장은 여기서 교대로 당직 시다가 들어가서 잘 거니까 한 자리는 비워 두고."
"예, 알겠습니다. 충성!"
"그래, 충성."
이제 들어가서 자기만 하면 된다.
1분대 텐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이강진은 불길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어? 눈 오네."
"이 런, 썅! 눈이 왜 또 오고 지랄이야!"
"이놈의 눈은 지겹지도 않나? 계속 오네!"
하얀 불청객은 겨울만 되면 왜 이리도 자주 찾아오는지 병사 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피곤한 일정을 소화했던 터라 그런지 이강진은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라고 생각했건만.
"기상입니다! 기상!"
"10분까지 아침 점호 집합입 니다!"
불침번들의 목소리 가 이강진의 잠을 방해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보니 텐트 오른쪽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 했다.
'뭐지?'
위에 뭔가가 있다.
주먹으로 '툭!' 하고 치니, 가루 같은 것들이 바람에 날렸다.
'뭔가 했더 니, 눈이군.'
텐트 밖으로 나오니, 어제와 다른 풍경이 이강진을 반겼다.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충 사이즈가 보였다.
'이거, 무조건 제설 각이군.'
아니나 다를까.
이강진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중대장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점호는 생략하고 일단 눈부터 치운다. 실시!"
"실시!"
눈을 치워야 훈련을 받든 말든 하지 않겠나.
훈련 나와서까지 제설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군인들.
제설과 제초는 군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같은 관계다.
* * *
제설 작업은 점심까지도 이어졌다.
밥을 먹고 난 이후에도 이들은 야삽을 들고 눈을 치워야만 했다.
막사가 아니었기에 제설 도구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야삽으로 눈을 치우려고 하니,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다. 결국 행보관은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수송! 대대에 잠시 들를 테니까 와서 운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급하게 운전병을 찾았다.
장혁진 병장이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눈이 많이 온 탓에 도로가 미끄럽기 때문에 일, 이등병 급 운전병한테는 운전대를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장혁진 병장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제설 도구를 챙겨 오기 위해 행정분과도 행보관과 같이 이동 하기로 했다.
"줄발하겠습니다."
"잠깐만."
대기 명령을 내린 행보관이 통신반장을 찾았다.
"나 없는 동안 애들 데리고 제설 작업 똑바로 하고 있어라. 언제 연대장님 오실지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혹한기 훈련 도중에 연대장이 한 번쯤은 얼굴을 비줄 거라는 정보가 있었다.
그전에 눈을 치워 둬야 한다.
그렇게 행보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 멀리서 다수의 포자들이 이곳 8790진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거?"
병사들의 관심이 입구로 집중되었다.
포차 뒤에 거대한 포가 매달려 있었다.
이강진은 포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155mm 인데?'
견인곡사포 부대가 1075대대가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이 동해 자리를 잡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부사관들이 외쳤다.
"바로 방열해!"
"뭐 하고 있어! 후딱 방열방위각 불러!"
"가신 벌린다!"
"발 조심!"
정신없이 움직이는 포병들.
보병 부대와는 다른 훈련 모습에 낯설음과 신기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강진은 이미 155mm 견인곡사포 훈련 장면을 본 적이 있었 다.
무박 3일 당시, 그곳에서 포병 부대가 실사격 훈련을 받았었 다.
실제로 포탄을 발사하는 것까지 구경했었다.
'이 인근에 있는 155mm 견인곡사포 부대는 하나밖에 없지 않았나?'
박스카 쪽을 바라보는 이강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전포대장 이도훈 소위, 그가 무전기를 들고 전포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땅이 얼어붙고 눈도 쌓여 있으니까 가신발톱 깊게 묻을 필요 없이 마른 방열만 실시하도록. 어차피 조금 있다가 다시 이동준 비 해야 하니까. 수신 양호한지."
-하나포 양호.
-둘포 양호.
-삼포 양호.
여섯 포까지 모두 수신을 확인한 뒤, 이도훈은 이번엔 박스카 쪽으로 향했다.
목이 타는 모양인지 안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이도훈 소위.
그제야 이강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강진은 제설 작업을 잠시 멈춘 뒤에 이도훈에게 거수경례 를 보였다.
"충성!"
"충성. 오랜만이네. 못 본 사이에 그세 상병까지 달고. 조기 진급한 거야?"
"상병 이강진. 아닙니다. 동기들과 같이 진급 시험 보고 제때 진급했습니다."
"그래? 나는 저번에 뉴스 보고 무조건 조기 진급할 거라고 예 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군."
이도훈도 버스 전복 사건을 뉴스로 봤다.
하기야 군 간부라면 그 사건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육군이라면 더더욱.
그것 때문에 육군참모총장까지 나서서 1075대대 병사 간부 들을 칭찬하지 않았던가.
이도훈은 이강진의 부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훈련 중인 거 같은데."
"예, 혹한기 훈련 중입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쌓여서 본의 아니게 제설 작업만 계속하고 있는 중입 니다."
"군인의 적은 풀하고 눈이니까. 우리도 방열만 후딱 끝내 놓고 제설 작업해야지. 아무튼 또 붙어서 훈련하게 되었네.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도훈의 부대는 대대 ATT훈련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여기서 이강진의 1075대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짧은 인사를 마친 후에 이강진은 다시 부대원들이 있는 쪽으 로 돌아왔다.
부대원들은 제설 작업을 하다 말고 155mm 견인곡사포 포병 들의 방열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다.
"확실히 155mm가 크긴 커."
"근데 땅 까는 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저 아저씨들도 고생이 많네."
"고생은 우리도 하고 있잖아."
제설 작업도 훈련 못지않게 빡세다.
그런데 1075대대는 혹한기 훈련을 나와서 제설 작업을 하고 있으니. 힘든 걸 두 개나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셈이었다.
최악의 혹한기 훈련이다.
* * *
1075대대로 향했던 행보관이 다시 진지로 복귀했다.
"제설 도구 가져왔으니까 하나씩 챙겨가라."
"예!"
드디어 제설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작은 야삽만으로 눈을 치우려니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래서 눈삽과 넉가래가 쥐어지니, 병사들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3시간이 걸리던 제설 작업도 1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대부분의 눈을 치울 수가 있었다.
병사들에겐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호출했다.
본부중대장을 비롯해서 1, 2, 3중대 중대장들이 모두 모였다.
"제설 작업하느라 고생했다. 눈도 어느 정도 치운 거 같으니까 슬슬 훈련을 다시 진행할까 하는데…… 화학 장교 어디 있나?"
"중위 오이향!"
오이향은 대대장이 찾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조금 있다가 화학전 상황 부여할 테니까 미리 준비해 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4일 차에는 대항군 상황 대처 훈련을 진행하겠네. 대항군 역할을 맡아 줄 사람은 연대장님이 따로 섭외했다고 하셨 으니까 그리 알고 있도록."
눈치가 빠른 1중대장은 이 부분에서 이미 눈치를 챘다.
"연대장님이 4일 차 때 방문하시는 겁니까?"
"맞아."
역시.
1중대장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대항군에게 털리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게. 아까 1 중대장이 말했듯이 연대 장님께서 직접 보러 오실 가능성이 아주 크니까."
"예!"
연대장이 보는 앞에선 무조건 완벽한 모습만 보여 줘야 한다. 설령 어려운 훈련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 슬슬 해산하도록 하지. 가서 곧바로 훈련 준비들 하게."
"예!"
각자 중대로 돌아가려고 하던 순간.
이들의 발목이 묶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하늘을 바라봤다.
"이 런……."
침음을 흘리는 중대장들.
대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눈살을 찌푸린 대대장이 하늘을 향해 원망을 토해 내고 싶었다.
눈 좀 그만 오라고!
이렇게.
< 제57화. 혹한기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