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화. 혹한기 (2) >
제57화. 혹한기 (2)
창고에 올라가 성태강과 함께 치장 물자들을 내리기 시작하 는 이강진.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 벌써부터 구슬땀이 맺 히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창고가 언덕 위에 위치한 탓에 오르락내리락하느라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강진은 악으로 깡으로 참아 냈다.
다른 후임들도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앞으로 분대장을 달 이강진이 엄살을 부리면 안 되지 않겠나.
그렇게 모든 치장 물자를 옮긴 뒤, 이강진은 막사 근처에 위치한 호에 들어섰다.
"휴우! 힘들다, 힘들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혔다.
함께 호흡을 맞줬던 성태강도 땀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번 그룹 멤버들과 함께 댄스 연습을 하면서 체력을 길러 온 성태강조차 힘에 겨울 정도였다.
혹한기 훈련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하나 아직 모든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태강아, 위장 크림 발라라."
"예, 알겠습니다!"
훈련에 위장 크림은 필수다.
손끝에 위장 크림을 덕지덕지 묻힌 이강진은 위에서부터 차 례대로 검은색, 갈색, 녹색 순으로 자신의 얼굴을 칠하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슬쩍 성태강을 바라봤다.
이강진은 무의식적으로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아이돌 줄신답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위장 크림을 너무 잘 발라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주된 일이었던 성태강. 스스로 간단한 메이크업 정도는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위장 크림 바르는 센스가 상 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태강아, 나도 칠해 줘라."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돌이 자신의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발라 준다.
이런 경험은 그 누구도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 끝났습니다."
"어디 보자."
위장 크림 뚜껑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로 얼굴을 확인해 보는 이강진.
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캬아! 역시 솜씨가 다르네!"
"하하, 그렇습니까?"
"너, 나중에 아이돌 관두면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거 하면 되 겠다."
"군인들을 대상으로 위장 크림을 전문으로 발라 주는 그런 아 티스트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말입니다."
"하긴 그러네."
이강진은 본인이 말하고도 웃긴 모양인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이 상대로 점심때까지 계속해서 경계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대대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성태강은 바짝 긴장했다.
"대대장님 오고 계십니다."
"어, 나도 방금 확인했어."
1중대장과 행보관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대대장을 맞이했다.
이후, 그들은 1중대가 훈련을 잘 받고 있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바짝 침을 삼키는 성태강.
"저희 쪽으로 오는 거 아닙니까?"
"아니, 안을 거야."
이강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살펴보면, 대대장은 막사 주변의 경계자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생활관을 잘 비웠 는지 확인하고 난 다음에 목진지를 점령 중인 병사들이 있는 쪽 으로 곧장 걸음을 옮길 것이다.
막사로 들어간 대대장 일행.
일단 여기까지는 이강진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태강아, 생활관에서 마지막으로 나왔던 사람이 누구지?"
"서일주 병장님입니다."
"그래? 그럼 문제없겠군."
서일주는 의외로 꼼꼼한 면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나오면 서 생활관에 있어선 안 될 물건들이 있는지 없는지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고 나왔을 터.
대대장 일행이 막사로 들어간 지 20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다시 그들이 나왔다.
성태강의 얼굴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혹시 몰라서 오늘의 암구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반면 이강진은 여유가 있었다.
이강진의 예상대로 대대장 일행은 목진지가 있는 산 쪽으로 향했다.
"대대장님 가셨다."
"대단하십니다, 이강진 상병님. 대대장님이 목진지 쪽으로 갈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게 짬이라는 거다."
괜히 경 력자가 신입보다 우대받는 게 아니다.
대대장도 갔으니.
이제 점심시간까지 이곳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면 된다.
* * *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병력은 짧은 휴식을 취했다. 이후에 완전군장을 매고 연병장으로 향했다.
혹한기 훈련의 첫 번째 시련.
행군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간부들이 돌아다니 면서 병사들을 줄 세웠다.
"우로 반보 이동한다!"
"앞 사람과 줄 맞춰!"
"곧 대대장님 오실 테니까 정신들 바짝 차려라!"
간부들의 외침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후에 대대장이 단상에 올랐다.
"고된 행군을 앞두고 있으니 훈시는 짧게 하겠다. 열외 없이 그리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행군을 끝낼 수 있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 다!"
"각 중대장이 인솔해서 출발하도록 해."
항상 그렇듯 출발은 본부중대가 먼저였다.
본부중대 다음은 1중대, 그다음은 2, 3중대가 순서에 맞춰 출발한다.
타 부대에서 파견을 나온 병사들이 혹한기 훈련이 끝날 동안 대신 1075대대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1075대대 병사들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혹한기가 얼마나 힘든 훈련인지, 군인이라면 누구든 잘 알 것 이다.
물론 재수 좋게 날씨가 따스한 날에 걸리면 혹한기가 혹한기 스럽지 않은 훈련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받는 훈 련은 아니었다.
심지어 눈까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1075대대는 제대로 된 혹한기 훈련을 치를 예정이었다.
* * *
줄발한 지 2시간이 지났다.
이강진은 앞서 걸어가는 막내, 최영고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 보면서 물었다.
"영고야, 할 만 해?"
"이병 최영고! 예!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힘들지만, 그래도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었자대에서 처음 받는 훈련이 혹한기라니, 최영고도 참 운이 지 지리도 없었다.
이강진은 주로 이등병들을 챙겼다. 선임들은 어차피 알아서 잘할 테고. 백우호는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행군의 왕이 라 불리는 녀석을 걱정해 봤자 자기 손해일 뿐이다.
기운상과 성태강은 이제 제 몫 정도는 해내는 어엿한 일병이 다 되었다.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서 근처 공터로 모이는 병사들.
완전군장을 내려놓자마자 병사들의 탄식 소리가 사방에서 들 려 왔다.
그 와중에 이강진은 일, 이병 급들부터 먼저 챙겼다.
"전투화 벗어서 발 말려라. 그리고 발에 물집 잡힌 사람 거수 하도록."
분명 후임급들에게 물었는데, 생뚱맞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병장 고필중!"
"고필중 병장님, 물집 잡히셨습니까?"
"어, 발바닥에 한…… 500원 크기만 한 물집 잡힌 거 같……. 아이고! 아파 죽겠다, 강진아. 행군 도저히 못할 거 같아."
누구 마음대로.
이강진이 고필중에게 다가갔다.
"제가 잠시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고필중의 발바닥을 직접 확인한 이강진.
"이 정도면 500원은커녕 50원도 안 됩니다. 반창고 붙이시면 문제없을 겁니다."
"이 악마 같은 녀석……."
후임에게 자비를 바랐던 고필중이 바보였다.
황지웅은 그런 고길중을 보면서 엄살 좀 그만 부리라고 쓴소 리를 늘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이강진은 최영고의 발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발만 잘 말리면 되겠네. 쉴 때마다 전투화 벗어서 발 말리는 거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아직까진 다들 할 만해 보였다.
하기야. 행군이 시작된 지 이제 2시간밖에 안 지 났다. 벌써부 터 환자가 속출하면 곤란하다.
행군이 끝난다고 훈련이 끝나는 건 아니다. 혹한기 훈련은 이 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끝났다.
다시 일어선 후에 행군을 이어 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이강진의 왼쪽 볼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으로 볼에 묻은 무언가를 닦았다.
"이건……."
물이었다.
위를 올려다본 순간.
이강진은 무의식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씨 발!"
지긋지긋한 눈이 또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 * *
눈과 함께 행군을 이어 가는 1075대대 병사들.
그래도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야, 강진아."
백우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가 훈련 나가 있는 동안에 눈 오면, 부대에 쌓인 눈은 누 가 치우는 거야?"
"파견 나온 아저씨들이 치우겠지."
"오, 완전 개꿀인데?"
적어도 제설 작업에 동원될 일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 다.
저 녁 6시쯤 되 니 눈은 그쳤다.
그사이에 잠시 다른 부대에 들르게 된 1075대대.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갈 예정이었다.
메뉴는 전투 식량.
어설프게 맛없는 짬밥보다 차라리 전투 식량이 나았다.
치이이익
밥이 익어 가는 동안, 이강진은 스트레칭으로 어깨에 뭉친 근 육을 풀었다.
'그나마 평상시에 체력을 길러 놔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내 가 먼저 쓰러졌을지도 몰랐겠네.'
곧 분대장을 달 남자인데, 후임들보다 일찍 쓰러지면 꼴사납 지 않겠나.
운동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빠르게 먹고 난 뒤에 연병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
갑자기 기운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군장에 서리 내렸습니다."
"진짜네."
군장을 털어 내는 동안, 소대장이 1중대원들에게 전파했다.
"15분 뒤에 출발할 거니까 그전에 다들 모여 있어라. 그리고 분대장들은 잠시 앞으로 집합하도록."
이강진은 뒤에서 군장과 혼연일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황지웅에게 말했다.
"황지웅 병장님, 제가 대신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 좀 하마."
"예, 알겠습니다."
분대장들에게 집합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행보관이 었다.
"1 분대 왔냐."
"상병 이강진. 예, 왔습니다."
"지웅이는 어디 가고 네가 왔냐?"
"황지웅 병장, 지금 화장실 가 있어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센스 있는 이강진의 대답이었다.
모든 분대가 다 왔음을 확인한 행보관은 이후의 일정에 대해 알려 줬다.
"8790진지 도착하자마자 바로 텐트부터 칠 거다. 저녁 점호는 생략할 테니까 텐트 다 친 분대부터 먼저 씻도록 한다. 그다음 에 병력 취침 준비 마치면, 분대장들이 나한테 와서 취침 보고 하고 바로 자면 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눈 온 것 때문에 행군하는데 바닥이 많이 미끄 러울 거다. 분대원들한테 발밑 조심하라고 이야기해 둬라. 그럼 이만. 해산!"
이강진과 각 분과의 분대장들은 행보관이 알려 준 일정을 그 대로 전달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황지웅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러면 텐트 빨리 치는 분과가 가장 먼저 씻고, 쉴 수 있다는 뜻 아니야?"
"예, 그렇습니다."
반대로 텐트를 늦게 치면 가장 꼴찌로 씻을 테고, 가장 늦게 잔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경쟁이다.
갑자기 황지웅이 분대원들에게 외쳤다.
"우리 1분대가 무조건 먼저 끝낸다! 빨리 해야 빨리 쉬지! 가자마자 바로 텐트 칠거니까 부지런히 움직여라!"
"예!"
1분대원들의 사기가 갑자기 샘솟았다.
< 제57화. 혹한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