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5화. 새해 첫 시련 (2) >
제55화 새해 첫 시련 (2)
사단장의 순찰 소식에 병사들은 절망했다.
1월 1일부터 죄악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지금부터 사단장님이 오실 때까지 막사를 청소하고, 또 청소 한다. 먼지 한 톨 나오지 않게 최대한 신경 써서 해!"
"예, 알겠습니다!"
회귀 후 이강진이 이곳 1075대대에서 근무를 하면서 사단장 이 온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공식 방문은 아니었다. 근처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 밥 먹을 겸, 그리고 1075대대 부대 운영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눈으로 슬쩍 확인해 볼 겸해서 잠깐 들렀던 것뿐이었다. 하나 이 번에는 다르다.
매번 신년이 되면 벌어지는 사단장의 부대 순찰.
이것은 거의 연례행사라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강진도 조만간 사단장이 이곳으로 다시 방문할 거라는 예 상 정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내일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황지웅은 분대원들을 닦달했다.
"생활관 청소부터 해! 행보관님 말씀하신대로 먼지 한 톨 안 나오게 해라! 나오는 순간, 내 군 생활이 꽈배기처럼 꼬여 버릴 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임해!"
"알겠습니다!"
부대 순찰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거라면, 무조건 막사고 들를 것이다.
오래간만에 생활관 물청소에 돌입한 1분대원들.
백우호가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가져왔다.
"물 뿌린다!"
"오냐!"
이강진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백우호는 양동이를 기울였다. 촤아악!
"으 앗!"
순간 이강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미친 얼음물이라도 퍼 왔냐? 왜 이 렇게 차가워!"
"미안, 미지근한 물 받아 올 시간이 없었다."
너무 차가워서 발이 찢기는 줄 알았던 이강진.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밀대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밀대를 많이 움직일 것도 없이 정확히 딱 세 번만으로 바닥에 있는 모든 먼지들을 물과 함께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그동안 다른 병사들은 치약과 칫솔을 들고 이곳저곳을 닦기 시작했다.
청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저녁 식사 집합을 할 때까지 병사들은 먼지와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 * *
신년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병사들은 모포와 침낭을 접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대충 접었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단장이 온다는 소식 때문인지 병사들은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좋았어.'
이강진은 각이 진 모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손을 갖다 대면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식사를 마치고 오전 집합을 위해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중대장의 얼굴에 비장미가 넘쳐흘렀다.
"금일 오후 일과 시간에 사단장님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신다 고 하셨다. 도중에 사단장님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거든, 무조건 목소리 크게 거수경례 하도록 한다. 알겠나!"
"예!"
"목소리가 이것밖에 안 나오나! 더 크게!"
"예!"
군인은 첫째도 목소리, 둘째도 목소리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례 구호는 크게 내질러야 한다. 특히 사 단장 앞에선 더더욱!
재차 목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중대장은 다음 것을 확인하기로 했다.
"청소 상태는 양호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완벽합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이들.
중대장은 뒤에 있는 행보관을 슬쩍 바라봤다.
부대 관리의 화신인 행보관이 인정을 해야 통과할 수 있다.
행보관은 미세한 침음을 흘렸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단장님께서 태클을 걸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오케이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단장님이 갑자기 너희한테 말을 걸어도 절대로 당황하지 말도록 해라! 특히 일과 시간에 탄약고 초소 근무 서는 병사들 은 더더욱 주의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자신의 근무 시간표를 떠올렸다.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과연 그때 사단장이 올까?
언제, 어느 시간대에 올지 모르는 사단장.
오후 근무자들은 러시안 룰렛에 참가한 기분이었다.
위병소에서 사단장이 탄 차량이 통과했다는 소식이 지휘통제 실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대대장은 참모들과 함께 지휘통제실 밖으로 향했다.
사단장의 레토나가 그 앞에 정차했다.
"부대 차렷! 사단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 성!"
장교들을 순식간에 이등병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을 지닌 남 자.
그가 바로 사단장이다.
이번에는 사복이 아닌 제대로 된 군복을 갖춰 입고 이들 앞에 다시금 등장했다.
"오랜만이야, 대대장."
"중령 오승진! 오랜만입니다, 사단장님!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네도 새해 복 많이 받게. 어디 보자. 일단 지휘통제실부터 좀 볼까?"
"예!"
본부 중대장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본부 중대 관할 지역인 만큼 중대장이 직접 안내를 해야 했해가 넘어감과 동시에 보안 철저, 작전 수행 현황 등을 브리 핑하는 본부 중대장.
대대장은 그런 본부 중대장에게 몰래 엄지를 세웠다.
잘했다는 뜻이었다.
사단장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75대대가 준비를 많이 했군. 이전 부대는 너무 엉망이어서 도중에 됐다고 하고 그냥 나왔는데 말이지."
그 부대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1075대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어디一 그럼 근무자들이 근무 잘 서고 있나 한번 보도록 할 까?"
막사 청결 상태는 어차피 안 봐도 그만이었다. 사단장이 온다 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밤낮으로 청소를 해댔을 게 뻔했기 때문 이었다.
사단장이 이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근무 상태는 항상 확인을 해야 한다.
"1 중대 근무 지역이 어디지?"
"탄약고 초소입니다."
"그럼 거기부터 시작하지."
"예!"
사단장과 함께 간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지휘통제실을 나선 시간은…….
오후 3시 20분이었다.
* * *
키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통신보안, 일병 성태강입니다."
이강진과 함께 초소 근무자로 투입된 성태강은 키를 받자마 자 삽시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예, 알겠습니다. 예, 선임 근무자한테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충성!"
키를 내려놓은 성태강.
"이강진 상병님,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사단장님께서 지금 올라오신다는 소식이지?"
"예, 그렇습니다."
이강진은 근무에 투입되기 전에 사단장이 1075대대에 왔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다.
그때가 2시 30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이강진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아차 렸다.
'운도 없지.'
아니,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 모른다.
이강진은 늘 위기를 포상 휴가의 기회로 만들어 온 남자다.
연대장이 왔을 때에도, 대대장이 왔을 때에도. 이강진은 당황 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해 냈다.
설령 상대가 사단장이라도 관계없다.
육군잠모총장과도 만났었던 이강진 아닌가, 이제는 별들을 직 접 눈앞에서 보는 일에 내성이 생겼다.
성태강도 마찬가지였다.
"잘해 보자, 태강아."
"예! 이강진 상병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하하, 그래."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단장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성태강.
"아까 행정반에서 연락 왔을 때에는 막 사단장님 올라가셨다 고 했었는데, 너무 늦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뭔가 이상했다.
막사에서 탄약고 초소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분이 안 걸 린다.
그런데 지금은 한 2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온다 하더라도 지금쯤이 면 아래쪽에 모습 이 보여야 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이강진은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태강아, 초소로 올라오는 길, 계속 지켜보고 있어라. 뒤늦게 라도 사단장님이 올라오실지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동안 이강진은 다른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탄약고 초소로 올라오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수풀 속을 통해 몰래 탄약고 초소 근처까지 접 근할 수 있다.
'설마.'
아무리 사단장이라도 그런 귀찮은 일을 할까.
아주 가끔 부소대장들이나 소대장이 초소 근무자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길이 난 곳이 아닌 다른 경로로 오긴 한다.
그게 문득 떠올랐다.
그때 주로 이용되는 경로가 있었다.
선임 근무자가 서 있는 쪽에서 1시 방향.
시선을 돌리는 순간.
바스락!
기척이 느껴졌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이강진의 외침에 두 손을 들고 모습을 보이는 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두 개의 은색 별이었다.
사단장, 그가 아쉬움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다가갔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이 사단장을 위해 서 일부러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른 척해 준 건가?"
"상병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아주 당연하게도 거짓말을 하는 이강진이었다.
사실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보기 전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 다.
사단장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아마 이강진과 성 태강은 그대로 털렸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다.
사단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막판에 들키긴 했지만, 그래도 근무 잘 서고 있다는 건 확인 했으니 안심이군. 이렇게 몰래 접근하면 대부분 못 알아차리던 데. 자네들이 처음이야."
이 흐름.
이 분위기.
낯설지 않다.
"대대장, 여기 두 사람한테 포상 휴가 하나씩 챙겨 줘."
"중령 오승진. 예, 알겠습니다."
어쩐지 익숙하다 싶더니 포상 휴가가 떨어지는 그런 흐름이 었다.
"감사합니다! 사단장님! 사랑합니다!"
신년 초부터 깔끔하게 포상 휴가 하나를 챙기게 된 이강진. 올해는 출발이 아주 좋다.
* * *
이후에 사단장은 식당으로 가서 저번에 맛봤던 오호만표 버 섯 닭볶음탕을 다시 맛봤다.
이른 저녁을 마친 사단장은 못내 아쉬운 듯 대대장에게 넌지 시 물었다.
"여기 부대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말이야. 괜찮다면 내가 여기서 하룻밤 머물다 가도 되나?"
대대장은 순간 너무 크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쓰러질 뻔했다.
부대를 방문한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여기서 자고 가겠 다니.
대대장뿐만 아니라 간부들도 바짝 긴장했다.
자고 가는 것만큼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런가? 혹시 내가 자고 가는 게 싫어서 그러나?"
"그, 그게 아니라……."
그때였다.
1중대장이 재치를 발휘했다.
"갑자기 주무시고 가시면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외박하려면 와이프의 허락을 받아라.
그런 뜻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긴 사단장은 스마트폰을 꺼내 곧장 그의 아내와 통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온 사단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아쉽지만 그만 가 보겠네."
1중대장의 센스가 돋보인 순간이었다.
대대장은 사단장 몰래 1중대장의 등을 강하게 토닥였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유능한 부하가 있어서 대대장은 참으로 행복했다.
< 제55화. 새해 첫 시련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