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한 해를 보내며 (1)
2013년 마지막 한 주가 시작되었다.
마지막이라고 해도 특별할 건 없었다.
행보관의 지시에 따라 작업하는 것. 이게 다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 게 있었다.
"1 월 말에 혹한기 훈련 일정 잡혔다. 오늘부터 미리 훈련물자 정비할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혹한기.
여름에는 유격이 있다면, 겨울에는 혹한기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추위의 극한을 맛볼 수 있는 훈련의 정점이 바로 혹한기다.
고필중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씨발, 1월 말이면 무조건 훈련 뛰어야 하잖아!"
황지웅과 고필중의 전역은 2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만 약 일정대로 1월 말에 혹한기가 진행된다면, 방금 고필중이 말 한 대로 예외 없이 훈련을 뛰어야 한다.
하나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필중아, 너무 속단하지 마라. 훈련이 뒤로 밀렸던 적도 있었 잖아? 그렇게 되면, 잘하면 혹한기 안 뛸 수도 있다."
혹한기가 2월로 미뤄질 수도 있다.
황지웅은 여기에 걸어 보기로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느낀 모양인지 고필중도 황 지웅과 같이 훈련이 밀리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기로 했다.
말년들의 사활이 걸린 혹한기.
하나 이강진은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희망을 미리 깨 버리는 건 재미없지.'
이강진의 입가에 번지는 의미심장한 미소.
이 미소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두 말년은 깨닫지 못했다.
* * *
12월 30일. 마지막 평일까지도 병사들은 삽과 곡괭이 그리고 톱을 들고 산을 누벼야만 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병사들은 식사 집합하기 전 에 온수 샤워로 몸을 씻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사열대 앞에 모인 1분대원들.
서일주가 이강진, 백우호에게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내일 신병 면회 있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애들 데리고 면회 준비 확실히해 둬. 많이 해 봤을 테 니까 믿고 맡기마."
"예, 알겠습니다."
이미 기운상을 시작으로 성태강, 곽분섭까지. 총 3명의 신병들을 겪어 본 이강진과 백우호다. 이제는 어떻게 신병 면회를 준비해야 할지 도가 텄다.
대대 식당으로 내려간 이들.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이강진 은 백우호와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전투화는 저번 주에 광 한 번 냈으니까 오늘 깔끔하게 한 번 닦아 주기만 하면 될 테고. 신병 A급 전투복 한 번 확인해 봐야 겠네."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 볼게. 상태가 영 별로다 싶으면 세탁 하고 다림질까지 해야지, 뭐."
"아니, 그건 내가 할게. 넌 신병 이발부터 먼저 시켜 줘."
"아, 맞다. 이발도 있었지. 오케이, 알았어. 가서 바리깡 미리 출전시켜 둬야겠네."
자대 전입하고 난 이후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만나는 자리다. 최대한 깔끔하게 해서 가족들 앞에 세워야 우리 아들이 그래도 괜찮은 곳에 배정되었구나 하고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래야 당사자인 최영고의 마음도 편해질 테고 말이다.
'운상이 때는 완전히 달랐지만.'
가족 간의 불화가 심한 탓에 이런저런 고생을 한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하나 이 번에는 다른 경우로 문제였다.
"우호야."
고필중이 백우호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나도 오늘이발좀 부탁하마."
뒤이어 기운상도 은근슬쩍 같이 말을 꺼냈다.
"저도 같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우호 상병님."
"아니, 고필중 병장님도 그렇고, 운상이도 그렇고. 저번 주에 머리 자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왜 또 자릅니까?"
"어허! 이유를 몰라서 그러 냐?"
"아시지 않습니까, 백우호 상병님."
알다마다.
최영고의 누나들과 만날 수도 있어서 그렇다.
그녀들에게 최대한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이발을 부탁해 오는 것이었다.
남자의 본능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막사로 올라온 이강진은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최영고의 A급 전투복을 체크해 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최영고는 오래간만에 훈련소에서 지급받았던 A급 전투복을 입어 봤다.
기장이 너무 길고 소매가 지나칠 정도로 컸다.
이강진은 죄 영고의 전투복을 보자마자 혹시 나 하는 마음에 물 었다.
"너, 한 치수 더 크게 받은 거지?"
"예, 그렇습니다. 인터넷 보니까 전투복받을 때 자기가 입던 옷 사이즈보다 한 치수 더 크게 받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A급 전투복은 예외지. 이거 봐. 엄청 꺼벙해 보이잖아."
핏이 다 죽었다. 어린 애한테 어른 옷을 입혀 놓은 꼴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잠깐만 기다려 봐라."
행정분과 분대원들이 모여 있는 생활관으로 빠르게 향한 이강진.
"철아, 종한이 형 거 피복, 아직 처분 안 했지?"
"어? 어. 다음 달 초에 다른 전역자들 것하고 같이 처분하려고 했지."
"잘 됐다. 종한이 형 전투복 좀 가져가게."
"응? 왜?"
"신병 A급 전투복이 너무 커서."
오종한이 말년 휴가를 나가기 전의 일이었다.
A급 전투복 세트를 하나 더 가지고 있던 오종한은 이것마저 짬 처리를 하려고 했었으나, 사이즈가 맞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 도 그 전투복을 받지 않았다.
그게 문득 떠오른 것이다.
'종한이 형하고 영고하고 서로 사이즈가 거의 같으니까.'
아마 남겨 두고 간 A급 전투복도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철은 이강진을 창고로 데려갔다.
마대 안에 담겨져 있는 수많은 전투복들.
김철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종한이 형 거를 찾아야 하는데…… 괜찮겠어?"
"어, 금방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오종한의 전투복에 특징 아닌 특징이 있었다.
다른 전투복에 비해 색감이 미묘하게 선명했다. 그리고 왼쪽 건빵 주머니 아래에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상의는 어차피 오종한이 라는 주기표가 있을 테 니 하의처럼 굳 이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금세 발견해 낼 수 있을 터.
"찾았다!"
창고에 온지 5분 만에 오종한이 남겨 둔 유물…… 아니, A급 전투복 세트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걸 또 어떻게 찾아냈냐. 하여튼 너란 녀석은 참 대단해."
"별거 없어. 아무튼 고맙다, 철아."
"천만에, 용무 끝났으면 후딱 내려가자. 곧 플라워걸 컴백 무 대 시작한다고 했거든."
"그래, 알았어."
걸그룹 무대는 빼먹을 수 없는 중대 사항이다.
어느새 군인 아저씨가 다 되어 버린 김철과 함께 빠르게 막사 아래로 내려온 이강진은 그것들을 들고 곧장 1 생활관을 찾았다.
"영고야, 이거 입어 봐라."
"예, 알겠습니다."
기존의 A급 전투복을 벗어 버리고 오종한의 A급 전투복을 입어 보는 최영고.
1분대원들의 입에서 차례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완전 딱 맞잖아?"
"와, 누가 보면 주문 제작한 줄 알겠네."
"오종한 마크 2냐?"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핏이 나왔다.
옷 사이즈가 맞는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 분 주하게 움직일 차례다.
"분섭아, 저 전투복 빨리 세탁기 돌려라. 차례 없으면 손빨래 라도 해. 그리고 태강이, 너는 도영이한테 가서 신병 주기표 오 바르크 좀 쳐 달라고 말하고."
"예, 알겠습니다."
"자자! 면회가 바로 코앞이 니까 다들 후딱 움직이자!"
"예!"
신병 멋스럽게 꾸미기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 * *
12월 31 일 마지 막 아침 해가 밝았다.
점호와 식사를 마치자마자 최영고는 어제 선임들이 하루 동 안 갈고 닦은 전투복과 전투화를 신었다.
황지웅도 전투복으로 갈아 입었다.
"영고야, 가족 분들 몇 시쯤 오신다고 했지?"
"이병 최영고! 10시쯤에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10시라……."
20분 정도 남았다.
"부모님 오시고, 누나 세 분 오시고. 총 5명 맞지?"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
면회 오는 다른 가족들보다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황지웅 혼자선 감당이 안 될 거 같았다.
"강진아, 네가 나랑 같이 영고 데리고 면회실로 내려가자."
"상병 이강진. 예, 알겠습니다."
고필중과 백우호, 서일주 그리고 기운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혹여나 자신을 데려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 봤지 만, 그런 건 일절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포기하기엔 일렀다.
가끔 부모님들이 면회를 오시 면서 분대원들한테 맛있는 거 먹이고 싶다고 많은 음식들을 싸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는 분대원들 전체가 면회실로 내려가곤 한다.
이들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잠시 후.
당직이 1생활관을 찾았다.
"신병 가족 분들 면회 왔답니다."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강진아, 영고야. 준비해라."
"예!"
최영고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볼 생각 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이강진과 황지웅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죄영고의 누나들 때문이었다.
1중대엔 최영고의 미모의 누나들을 보고 싶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병사들이 태반이다.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와 민폐를 끼 칠지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일을 미리 막는 것. 이것이 황지웅과 이강진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 * *
선임들과 함께 위병소를 찾은 최영고.
저 멀리서 그의 가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최영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엄마……!"
"아이고, 우리 아들!"
어머니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최영고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최영고의 어머니와 누나들도 눈물을 훔쳤다.
막둥이로 가족들의 사랑만 받고 자라오다가 군대라는 험한 곳 에 강제로 끌려오게 되었으니, 가족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 했다.
가족들끼리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봉기를 찍는 동안, 죄 영고의 아버지가 황지웅과 이강진에게 다가왔다.
"영고 선임 분들이죠? 영고 아버지 되는 사람입 니다."
"충성 1중대 1분대장, 황지웅입 니다."
"상병 이강진입니다."
이강진의 자기소개를 들은 최영고의 아버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혹시 티비에 나왔던 그 이강진 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우리 아들이 국민 영웅과 같은 부대라니. 영광입니다, 허허!"
기성세대들은 웬만하면 이강진이 누군지 알아보곤 했다.
황지웅이 최영고의 가족들을 직접 면회실로 안내했다.
"날도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는 게 좋겠군요. 여보! 그만 울고 면회실로 들어가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죄영고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 면서 답 했다.
"알았어요. 가자, 영고야."
면회실로 가는 동안 최영고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꼬옥 잡 아 줬다.
그 모습을 보니 이강진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강진도 죄영고처럼 어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사랑만큼은 그 어떤 가정 보다 풍족하게 받아 온 이강진.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면회 끝나면, 가서 전화라도 드려야겠네.'
연락을 자주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도하는 일이다.
이강진은 오늘만큼은 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 제54화 한 해를 보내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