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1화. 다시 만나다 (3) >
제51화. 다시 만나다 (3)
이강진이 백우호와 함께 열심히 전투화를 닦는 동안, 기운상 과 죄영고가 마침 사열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충성!"
기운상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신병 전화시키고 왔습니다."
"그래? 면회는 어떻게 됐어?"
자대 전입을 왔으니, 언제 면회를 오실지 혹은 말지를 부모님에게 물어보라고 황지웅이 지시를 내렸다.
일단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좀 더 확실하게 날짜를 잡기 위해서 기운상이 최영고를 데리고 전화박스에 잠시 다녀왔던 것이다.
대답은 최영고의 몫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일이 생겨서 이번 주는 힘들고,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주면…… 12월 마지막 주말?"
"네, 그렇습니다. 31일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딱 12월 31일이다.
면회 오는 날짜는 사실 크게 중요지 않았다. 문제는 이다음이
"누구누구 오시 기로 했는데?"
사심이 가득 담긴 백우호의 물음.
최영고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답했다.
"부모님하고
"부모님하고?"
그다음 말이 필요하다.
부모님 만으론 부족하다.
더 많은 가족 구성원이 필요하다!
"누나들도 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아싸!"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르는 백우호였다.
한편 이강진은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백우호를 향해 입 좀 다물라며 쓴소리를 내뱉었다.
"영고 누나들이 온다는데 네가 왜 좋아하나? 아무튼…… 다섯분 다 오신다는 거야?"
"아닙니다. 첫째 누나하고 둘째 누나, 넷째 누나. 이렇게 셋만 온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까지 다 합하면 총 다섯 분 오시는 거군. 알았어, 내가 황지웅 병장님한테 그렇게 보고해 둘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이강진은 최영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누나 분들이 같이 온다는 말, 웬만하면 여기저기에 하고 다 니지 마. 운상이하고 우호, 너희도 마찬가지다. 괜히 다른 부대 사람들도 끼어들면 곤란하니까."
이강진이 회귀하기 이전에는 최영고의 미모의 누나들에 관련 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매번 가족들이 면회를 올 때마다 부대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이번에는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이강진이 그리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건만.
소문은 어느새 부대 전역으로 퍼지고 말았다.
같이 당직 근무를 나선 박태중조차 영고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누나들에 관련된 소식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야, 강진아. 너희 신병 누나들, 이번에 세 명이나 온다며?"
"그거,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제 운상이랑 외곽 근무 서면서 들었지."
"기운상, 그 녀석……."
그래도 아버지가 투스타다 보니 크게 뭐라 하질 못할 거 같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예, 12월 31 일에 같이 면회 온다고 했습니다."
"신병 누나들이 그렇게 예뻐?"
"저는 사진을 못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에는 대충 두루뭉술하게 답하는 게 좋다. 남의 가족을 가지고 멋대로 평가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1분대는 참 특이하단 말이야. 투스타의 아들이 들어 오질 앙나, 연예인이 들어오질 앙나, 분섭이는 뭐…… 별거 없고.
이제는 미모의 누나만 다섯 명 있는 신병이 들어올 줄이야. 진짜 1분대는 특이한 사람들만 모이는구나."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은 바로 이강진이다.
과거로 회귀해서 재입대를 한 사람은 전국을 통틀어 봐도…… 아니, 전 세계적으로 최초일 것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그저 머쓱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 * *
빼어난 미모를 지 닌 다섯 명의 누나를 데리고 있다는 점 때문 에 죄영고는 생각보다 많은 덕을 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선임들의 관대한 태도였다.
원래 1생활관에선 침상끼리 뛰어넘어 다니면 안 된다. 그러나 아직 그게 익숙하지 않은 죄영고는 무의식적으로 침상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것을 보자마자 이강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영고, 침상 넘어 다니지 말라는 말, 내가 아침에 하지 않았냐? 그걸 금세 까먹어?"
"이, 이병 최영고! 죄송합니다!"
좀 더 단단히 주의를 주려고 했으나.
고필중과 백우호가 최영고를 감싸 줬다.
"강진아, 너무 그러지 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이잖 아?"
"고필중 병장님 말이 맞아. 우리도 예전에 똑같은 일로 여러 차례 혼났던 적 있잖아.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봐주자고."
백우호의 말엔 오류가 있었다.
"우리가 아니라 너만 혼났잖아.은근슬쩍 나까지 끼워 넣지 마 라."
…….?어흠!"
헛기침으로 대충 무안함을 얼버무리는 백우호.
이강진은 처음부터 내무 생활 규칙을 다 알고 있었다. 받아 놓 은 온수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해서 생활관에서 전투 화를 닦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생활관 내에서 라면 취식 금 지 등 맞선임이 알려 주지 않아도 이강진은 이 모든 것들을 척 척 잘 지켰다.
반면 백우호는 달랐다.
밖에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생활관 안에서 전투화를 손질 했다가 30분 동안 갈굼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침상 넘어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이강진이 우려하던 일이 슬슬 벌어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선임들이 최영고에게만 관대하기 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최영고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이강진, 성태강 정 도뿐이었다.
황지웅은 분대장으로서 부대원들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 이었기 때문에 최영고에게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원래 신병 관리는 맞선임이 맨투맨으로 집중 마크하면서 해 야 한다. 그러나 누나 파워로 인해서 다들 너무 관대하게 최영 고의 실수를 용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이강진은 이번만큼은 직접 나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입 장을 고수해 보기로 했다.
* * *
최영고가 자대로 전입해온지 3일째가 되는 날.
그에게 쓴소리를 하는 선임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유독 최영 고만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오전 식사 집합을 했을 때에도 또 실수가 벌어졌다.
"영고야."
성태강이 최영고를 찾았다.
"이 병 죄영고!"
"집합할 일 있을 때면 나오기 전에 항상 뒷정리 하고 나오라 고 그랬잖아."
"죄송합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이런 일들 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고필중과 백우호는 그의 실수를 관대하게 넘어가려 고했다.
"괜찮아, 괜찮아. 처음엔 다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안 그러 냐, 우호야?"
"맞습니다. 태강아, 평소의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편하게 지내자고, 편하게. 하하하!"
성태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성태강은 이강진에게 작게 속삭였
"이강진 상병님, 이건 좀 심각하지 않습니까?"
"영고한테만 관대하게 구는 거?"
"예,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긴 군대지 않습니까? 영고만 특별 취급받는 건 좀… …."
성태강이 어떤 심정인지 이강진은 잘 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번 주 내로 알아서 해결될 테니까."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
이강진과 성태강이 할 일은 그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뿐.
아주 편한 해결 방법이다.
* * *
큰일을 보러 화장실을 찾은 고필중은 1분대가 담당하고 있는 1사로 화장실 칸을 찾았다.
"끄응……!"
변비여서 그런지 내용물(?)이 아주 거하게 나왔다.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휴! 이제야 살 거 같네."
화장지를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들어 있는 건 비어 있는 휴지심뿐이었다
"……어?"
1사로 칸에 휴지를 채워 넣는 건 1분대원들이 해야 한다.
"이 녀석들이……!"
휴지는 없으면서 쓰레기통 휴지는 꽉 차 있었다. 거의 흘러 넘 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결국 휴지심을 아주 얇게 찢어서 대충 급한 것만 마무리를 지 은 고필증.
그는 씩씩거리며 생활관을 찾았다.
생활관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야! 1사로 관리를 저따구로 하냐? 군기가 빠졌구먼!"
그러나 생활관에 있던 이는 황지웅과 신병인 최영고뿐이었다.
최영고는 흠칫 놀랐다. 근무 휴식에 들어가려던 황지웅이 고 필증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물었다.
"뭔데, 왜 그러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좋을 설명한 고필중.
황지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들 지금 분리수거 차량 왔다고 다른 분대원들이랑 같이 거 기 일 도우러 갔어. 네가 대신 똥휴지 좀 비워 줘."
"뭐? 지금 비워야 해?"
"그래야지, 간부님들이 보면 분명 경고 카드 줄걸? 우리, 이번 달에 경고 카드 너무 많이 받아서 아슬아슬해. 잘못하다가 꼴찌 라도 하면 말년에 분리수거장 청소하러 불려갈 수도 있어."
고필중은 슬쩍 최영고를 쳐다봤다.
최영고는 눈치가 전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제가 비우겠습니다!"
"아, 아니야. 내가 비울게. 이, 이런 거에 익숙한 내가 해야지. 하, 하하하."
미래의 처남을 위해 직접 똥휴지까지 비우게 된 고필증.
하지만 왜 이리도 화가 나는지…….
* * *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곽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백우호는 관물대에 붙어 있던 사 진 하나를 찾았다.
"이상하네. 왜 없지?"
"뭔데 그래?"
바로 옆자리인 이강진이 백우호에게 뭘 찾는지 물었다.
"키앤씨하고 나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아, 관물대에 맨날 붙어 있던 그거?"
키앤씨라는 여성 래퍼와 백우호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찾고 있었다.
백우호는 그것을 보물 다루듯 하고 있었다. 프로 래퍼와 나란 히 사진을 찍은 게 그것이 최초이자 유일했다. 그래서 더더욱 소 중하게 간직해 왔다.
그런 중요한 물건이 없어졌으니. 얼마나 안달이 날까.
그때였다.
최영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여성분하고 같이 찍으신 사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어디 있는지 알아?"
"그게……."
대답하기를 망설이던 최영고가 눈을 질끈 감고 실토했다.
"조I, 죄송합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꾸겨지고 낡은 사 진이어서 버리시는 건 줄 알고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습니다……!"
"뭐!"
순간 백우호는 눈이 뒤집혔다.
1생활관 쓰레기통을 미친 듯이 뒤지는 백우호.
중간에 들어온 탓에 영문을 모르는 황지웅은 '이 녀석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라는 눈빛으로 백우호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겨우 사진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 백우호는 한숨을 크게 돌 렸다.
반면 최영고는 죽을 맛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모르고 그랬으니까 뭐…… 괘, 괜찮아.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잔뜩 화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예상보다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겠군.'
목요일 아침 집합이 시작되었다.
가장 늦게 나온 고필중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죄영고! 네가 무슨 말년이냐? 언제까지 뒷정리 안 하고 다닐 거냐! 어?"
백우호도 거기에 한마디를 보탰다.
"또 안 하고 나왔냐? 이 녀석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 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이강진이 그들을 만류했다.
"제가 나중에 잘 교육시킬 테니 일단 집합부터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필중 병장님."
고필중과 백우호는 최영고를 매섭게 노려봤다.
훈훈함은 그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군대로 되돌아 왔다.
그들의 모습에 이강진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 제51화. 다시 만나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