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악습 (2)
행보관과 주식 이야기를 끝낸 후에 이강진은 바로 생활관으 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회귀 이전에 당직 근무를 수도 없이 섰던 이강진이라 하더라 도 20여 년 만에 당직을 서다 보니까 피곤함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강진은 다시 서서히 눈을 떴다.
몸을 뒤척이면서 생활관 내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슬슬 일어날 시간이군.'
더 자 봤자 간부들이 그만 자라고 억지로 깨운다.
부스스한 몰골로 간신히 침낭의 유혹에서 벗어난 이강진.
본인이 의도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절로 입에서 질적한 하 품이 흘러나왔다.
스트레칭으로 뻐근한 몸을 풀려고 할 때였다.
생활관의 문이 열렸다.
"일어났어?"
정글모를 쓴 오종한이 생활관으로 들어오면서 이강진에게 말을 걸었다.
"예, 방금 막 눈 떴습니다. 작업하다 오신 겁니까?"
"어, 오늘 작업, 장난 아니게 빡세더라. 오래간만에 톱질하니 까 팔이 빠질 거 같아."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흙먼지, 이것만 봐도 오종한이 얼마나 힘들게 굴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전역까지 20일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종한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안준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는 거 같았다.
"말년이신데 쉬엄쉬엄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떨어지는 낙엽 도 조심해야 하실 몸인데."
"괜찮아, 행보관님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말년이라고 뺑 끼치면 안 되잖아."
2중대에서 하극상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오종한은 원래 1075 대대가 아닌 타 부대로 전출을 당할 뻔했었다.
그런데 도중에 1 중대 행보관이 대대장에게 1중대가 오종한을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그 덕분에 오종한은 자신이 2년 가까이 군 생활을 보내 온 1075대대에시 전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종한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행보관이 아무 리 강도 높은 작업을 지시해도 군말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이었 다.
한편으로 이강진은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행보관님은 이걸 노리고 오종한 병장을 데려온 것일 지도…….'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병장급이 필요해서 그런 선의를 베풀었 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강진, 개인의 추측일 뿐.
정답을 아는 건 오로지 행보관밖에 없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행보관은 말 잘 듣고 문제 안 일으키는 말 년 병장을 얻게 되어서 좋고.
오종한은 자신이 바랐던 1075대대에서의 전역이라는 목표를 이루어서 좋고.
서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말년 병장인 오종한이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작업에 임하는 덕분에 그는 후임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본래 전출당한 사람이 중대원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란 쉽 지 않은 일이다.
하나 오종한은 이 고정관념을 깨 버렸다.
여기에는 이강진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오종한 병장님!"
밖에서 오종한을 부르는 후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잠깐만. 곧 나갈게."
오종한은 관물대에서 가죽 장갑을 챙긴 뒤에 이강진에게 작 별을 고했다.
"다른 간부님들, 지금 작업하느라 정신없으니까 늦장 부려도 돼. 더 잔다고 와서 깨울 사람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종한 병장님."
이강진은 오종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나가 봤자 할 일도 없고 말이다.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작업에 끌려가는 것보단 훨씬 낫다.
다시 자리에 누우려던 찰나에 또다시 생활관 문이 움직였다.
"엥? 일어났냐?"
이번에는 황지웅이 생활관을 찾았다.
"일어났다가 간부님들 지금 막사에 없다고 오종한 병장님한 테 들어서 다시 자려고 합니다."
"하하하, 오종한 병장님이 좋은 팁 알려 주셨네. 그래, 잘 수 있을 때 푹 자 둬야지."
1분대에서 현재 당직 근무를 서는 사람은 황지웅과 이강진뿐 이다.
그러다 보니 황지웅은 지금 이강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종한 병장님은?"
"작업 나가셨습니다."
"그래? 그분도 참 성실하단 말이야. 그나저나 큰일이네."
"또 무슨 일 있습니까?"
큰일이라는 말이 이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였다. 어떻게 된 게 군대는 조용할 날이 이리도 없을까. 그러나 이강진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큰일이었다.
"오종한 병장님, 남아 있는 휴가도 없잖아. 그래도 말년 휴가 정도는 보내 드리고 싶은데, 그럴 만한 건덕지가 없으니……. 에 휴."
분대장 입장에서 봤을 때, 오종한이 자꾸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후임들한테 잘 대해 주고, 오종한이 1분대에 있어 준 덕분에 다른 분대가 쉽게 1분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없었다.
중대의 왕고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누가 감히 1분대를 건드린단 말인가.
하나 1분대는 오종한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말년 휴가라도 챙겨 주고 싶은 게 황지웅의 뜻이었지 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명분이 필요하다.
하나 오종한에겐 그 명분이 없다.
이강진처럼 대대 체육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것도 아니고, ATT 훈련 때 대항군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중대원들과 열심히 제설 작업을 하긴 했지만, 제설 작업 잘했 다고 포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외박이라도 보내 드려야 하나, 외박은 건의해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아, 모르겠다. 작업이나 나가야지. 강진아, 나간다."
"예, 충성."
황지웅이 저 렇게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이강진은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종한 병장도 이제 1분대원이 다 되었군.'
조금은 안심이다.
* * *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이강진은 다시 눈을 떴다.
충분히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 낭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이강진은 양치 도구를 들고 화장 실로 향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입안이 굉장히 텁텁했기 때문이었다.
'양치하고, 세수 하고. 생활관에 좀 있다가 식사 집합하면 되 겠군.'
완벽한 계획이다.
타이밍이 안 좋으면 근무 휴식 끝나자마자 바로 작업에 불려 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은 운이 꽤 좋은 편이었 다.
화장실로 향하던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안에서 들려오는 격앙된 목소리.
"다음 달에 나, 휴가 나가는 거 다들 알고 있냐?"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알아서 휴가비 준비해야 할 거 아니야! 너희들은 만 원 도 없냐? 만 원씩만 딱 걷어서 주면 내가 기분이 얼마나 좋겠어. 그래도 나니까 만 원 이야기하는 거지, 내가 이등병 때에는 선 임들한테 이만 원씩 가져다 바쳤어, 이것들아."
처음엔 깡패가 삥 뜯는 현장인 줄 알았다.
대놓고 후임들에게 금전을 요구하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대체 누굴까,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이강진은 일부러 티 나게 화장실로 들어섰다.
"충성."
"아, 강진이나?"
거수경례를 받아 준 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최칠완 병장이었군.'
얼마 전에 같이 당직 근무를 섰던 박태중이 최칠완에 대해 언 급하려다가 만 적이 있었다.
'뭔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
한때 1중대에 안 좋은 악습이 있었다.
병장이 말년 휴가를 나갈 때,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후임들 이 돈을 걷어서 휴가비를 챙겨 주는 것이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실제로 있었던 악습이다.
그러나 이강진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 악습은 빠르게 자취 를 감줬다.
1분대에선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안 좋은 관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나 아직도 예전 관습을 논하면서 대놓고 금전을 요구하는 병장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최칠완이었다.
이강진은 일부러 모른 척 연기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우리 애들이 내무생활 하는 거 보니까 요즘 나사가 하나 빠진 거 같아서 쓴소리 좀 하고 있었 어."
"그렇습니까. 그럼 나중에 오겠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용무는 다 끝났으니까. 너 볼일 봐."
최칠완은 후임들을 놔두고 혼자서 밖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최칠완에게 쓴소리를 들었든 2분대 일, 이병 들 은 이강진에게 거수경례를 하고선 자리를 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군대는 참……."
정이 들래야 들 수가 없는 곳이었다.
* * *
불과 2일 전에 첫 당직을 섰던 이강진이었나, 오늘 또다시 노 란 완장을 차게 되었다.
원래는 오늘 당직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원래 당직을 서기로 했던 정경태 병장이 갑자기 타 부대로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이강진이 대신 투입되었다.
파견을 나가기 전에 정경태 병장이 이강진에게 연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강진아."
"아닙니다, 전 크게 신경 안 스스니 파견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나중에 내가 PX 거하게 쓸게, 먹고 싶은 거 미리 생각해 둬. 알았지?"
"하하. 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당직 근무 일정 한 번 바꿔 주고 무제한 PX 1회 이용권을 얻 었으니 이득이지 않을까.
같이 당직을 서게 된 파트너는 저번과 같았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태중 병장님."
"나야말로."
일 잘하는 후임하고 같이 근무를 서면 선임 근무자는 마음이 편하다.
박태중이 지금 딱 그런 경우였다.
첫 당직 근무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박태중이 알려 줄 것 도 없이 알아서 혼자 척척 잘 해냈다.
그 모습이 박태중에겐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았다.
만약 다른 선임 근무자들이 한 번이라도 이강진과 같이 당직 근무를 서 본다면, 다음부턴 무조건 이강진과 같은 조로 꾸려 달 라고 우겨 댈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막 출근을 한 행보관은 오자마자 당직을 찾았다.
"당주!!"
"상병 이강진!"
"병장 박태중!"
"작업 분배할 거니까 병력 9시까지 사열대 앞으로 집합시켜 라."
"예, 알겠습니다."
박태중이 움직이기 전에 이강진이 한 발 먼저 행동했다.
마이크를 들고 방송을 켠 이강진.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전 병력은 9시까지 사열대 앞으 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끝낸 뒤에 이강진은 인원 현황판을 챙겨 들었다.
"박태중 병장님, 저, 사열대에 가서 인원 파악하고 있겠습니다."
"오냐, 알았다."
이토록 빠릿빠릿한 후임이 또 어디 있을까.
박태중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 * *
오전 9시에 맞춰 병력이 사열대 앞에 나란히 집결했다.
인원 파악을 마친 이강진은 행정반으로 향했다.
"행보관님, 병력 다 집합했습니다."
"……그 레斗."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보관.
중대장과 심각한 이야기라도 주고받고 있었던 모양인지 표정 이 영 좋지 않았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강진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행보관이 말하기 전에 중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체 주목."
"주목!"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중대장이 예정에 없던 일을 공지했다.
"오후에 대대장님께서 우리 부대에 직접 방문하셔서 정신교 육 겸 마음의 편지를 받겠다고 하셨다."
무난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오늘의 당직 근무가 갑자기 파란 의 연속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제50화. 악습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