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164화 (164/347)

제50화. 악습 (1)

주말에 치룬 눈과의 전쟁.

그날 이후, 다행스럽게도 한동안 눈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강추위가 1075대대를 급습했다.

"어으, 추워라!"

당직사병을 맡게 된 박태중 병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행정반에 설치되어 있는 난로 앞으로 빠르게 향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왔을 뿐인데,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어 휴!"

"고생하셨습니다, 박태중병장님."

그와 함께 당직을 서게 된 남자, 이강진이 따스한 캔 커피 하나를 건넸다.

"이거, 행보관님이 주시고 가셨습니다."

"행보관님이?"

"예, 난로 앞에다가 뜨겁게 데워 뒀으니, 조심해서 마시기 바 랍니다."

"땡큐, 땡큐…… 앗, 뜨거!"

이강진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위쪽 입술을 살짝 데이고 말았다.

그래도 커피는 맛있었다.

꿀꺽, 꿀꺽!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원샷한 박태중은 이제야 살 거 같다는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몸 녹이는데 뜨거운 커피만 한 게 없지. 강진아, 잘 기 억해 둬라. 커피는 말이야. 당직 근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음료야. 이거 없으면 당직 못 선다.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오늘 처음 당직병으로 근무를 서게 되었다.

그래서 박태중은 이강진이 생애 첫 당직 근무를 맡게 된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 그건 착각이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강진은 지겹도록 당직을 섰었다. 박태 중보다도 더 풍부한 당직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굳이 아 는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알려 주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 물어오면 대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네.'

일부러 초보 티를 내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잘 해내고 있었다.

"행보관님 어디 가셨는데?"

"잠깐 따님 분하고 통화한다고 나가셨습니다."

"우리 행보관님,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무신경해 보이는 분 같아도 딸바보란 말이야."

"하하하, 그러게 말입 니다."

행보관 몰래 그의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갑자기 행정반 문이 열렸다.

행보관이 들어온 줄 알고 깜짝 놀란 두 남자.

그러나 행보관 대신에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곽분섭이 서 있었다.

"……충성. 이병 곽분섭,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다음 외곽 근무 투입자가 곽분섭이었다.

이강진은 곽분섭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물었다.

"너, 잠 깬 거 맞지?"

"이병 곽분섭. 예, 그렇습니다!"

"근데 야상은 왜 안 입고 왔냐?"

"…헉!"

전투복 상의에 깔깔이만 입은 채로 행정반에 온 것이다. 말년 들만 할 수 있다는 패션을 이병인 곽분섭이 당당하게 선보이고 말았다.

"조I, 죄송합니다! 금방 입고 오겠습니다!"

다른 선임이었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갈궜을 것이다.

그러나 이강진은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평소에 잘하다가 딱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크게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태중은 그런 이강진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강진이 착하네. 나 때는 말이야. 저 런 실수 한 번 하면, 그날 선임이 '내 밑으로, 네 위로 다 깨워서 집합시켜!'라고 했었지. 지 금 생각해 보면 지옥이 여기구나 싶은 생각도 들곤 했는데, 요 즘은 많이 바뀐 거 같아."

이강진은 '군대는 바뀌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남 자였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내무 부조리였다.

그것 때문에 예전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기억 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늘 생각했다.

이 런 악순환은 없어져야 한다고.

박태중도 그 부분에 대해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 다들 강제로 끌려와서 힘겹게 군 생활하고 있는데, 서 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살아야지. 나도 개인적으로 내무 부조리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하아…… 근데 우리 분대는 아 직 한참 먼 거 같다."

박태중은 2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기수 차이 때문에 박태중은 분대장을 찰 일이 없어졌다. 그의 맞후임이 바로 분대장을 인수인계받을 예정이었다.

이강진은 2분대 내부 사정에 대해서 잘 모른다.

생활관이 다르다 보니 2분대가 어떤 분위기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알 생각도 없었고.'

자기 분대에만 신경 쓰는 것도 빠듯한데, 오지랖 넓게 타 분 대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박태중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최칠완 병장이 또 개지랄을 떨었거든."

최칠완 병장. 박태중의 맞선임이기도 한 남자였다.

그가 후임들한테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이강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있지, 있고 말고. 엊그제였나, 그때 뭔 일이 있었냐면……."

이강진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려고 할 때였다.

다시 행정반 문이 열렸다.

곽분섭과 함께 외곽 근무에 투입될 선임 근무자, 오종한이었 다.

"충성!"

거수경례를 하는 두 남자, 오종한은 눈을 몇 차례 꿈뻑이 면서 이강진을 응시했다.

"아, 맞다. 오늘부터 당직 로테이션에 들어간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다."

말을 하면서 오종한은 후임 근무자가 해야 할 총기 현황판 수 정과 말판 옮기기 등을 미리 해 뒀다.

옷 갈아입느라 늦은 곽분섭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종한 에게 용서를 구했다.

"죄, 죄송합니다! 오종한 병장님!"

"괜찮아, 이런 거 반드시 후임만 하라는 법도 없잖아? 행정반 에 먼저 온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오종한 같은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1분대는 어찌 보면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었 다.

처음에는 오종한이 왔을 때 다들 피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오종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후임 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임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박태중은 복잡한 눈빛으로 오종한을 바라봤다.

그런 박태중을 보면서 이강진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 * *

당직을 선 다음에 하루 동안 근무 휴식이 주어진다.

수요일 오전 9시에 근무 교대를 마친 이강진은 온수로 샤워 를 마친 후에 1생활관으로 돌아왔다.

일과 시간이기 때문에 생활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들이 일할 때 이강진은 생활관에서 편하게 잠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했다.

"이 런 기분도 오랜만에 느껴 보네."

20여 년 만에 서 본 당직이어서 그런지 신선한 느낌이었다.

매트리스에 눕는 순간, 벌써부터 잠이 사르르 몰려오는 것 같 았다.

"꿀잠 잘 수 있겠군."

저번처럼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한지윤과 한강 둔치에서 데이 트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꿈의 내용을 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천천히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상병 이강진, 상병 이강진은 지 금 즉시 행정반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께서 찾고 있습니다.

감았던 눈을 억지로 다시 떴다.

그냥 잠들었다는 셈치고 못들은 척할까 생각했던 이강진이었 으나, 이내 상반신을 다시 일으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법.

이강진한테 볼 일이 있다면, 일찌감치 해결해 두고 편한 마음 으로 잠을 자는 게 좋아 보였다.

행정반으로 향하자, 행보관이 이강진에게 손짓했다.

"행보관실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행보관실 문을 닫은 뒤, 행보관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내 처남도 주식을 하고 있거 드 "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 처남이 나한테 괜찮은 찌라시가 들어왔다면서 종목을 하나 추천해 주더구나. 근데 솔직히 말해서 믿을 수가 있어 야지. 처남이 너처럼 주식으로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진다면 주명이 같은 타입이거든."

권주명, 통신반장의 이름이다.

한마디로 행보관의 처남도 주식계의 마이 너스의 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그냥 무시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처남이 너무 강력하게 추천을 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한 번 물어볼까 해서 이렇게 부른 거다. 근무 휴식 중이었다면 미안하구나. 대신에 나를 도와준다면, 그 만한 보답은 하마."

행보관은 받기만 하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받은 만큼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것 때 문에 이강진은 줄곧 행보관을 도왔다.

이 도움이 언제 포상 휴가로 변환될지 모르는 일이다.

보험을 들어놔도 나쁘지 않을 터, 이강진은 적극 협조하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종목이 뭡니까?"

"신적산업, 혹시 몰라서 관련 자료들을 줄력해 왔다."

현재 주가를 비롯해서 신적산업의 시가종액까지 다 적혀 있었다.

한 달 이내에 나온 신적산업 관련 기사들도 보였다.

행보관이 신적산업에 대해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나 이런 자료들은 이강진에겐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이었다.

이강진이 주식에서 계속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그것은 바로 이강진만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이다.

'신적 산업이라……."

군 생활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식에 관한 데이터는 이강진의 머릿속에 확실히 저장되어 있었다.

신적산업, 들어 본 적이 있다.

'주석이 형이 거기 투자했다가돈 좀 만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다.

올해를 기점으로 2년 뒤, 신적산업은 그때부터 날개를 단 듯 날아오를 것이다.

이강진도 눈여겨보고 있던 종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수익성이 큰 종목들을 알고 있었기에 굳 이 신적산업 쪽에 돈을 넣어 두진 않았다.

"처남께서 주식감이 별로 안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이번만큼은 믿어 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응?"

행보관은 본인이 묻고 본인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처 남이 물어 온 찌라시가 맞는다고?"

"예, 단 그 종목으로 가시 려 면 오래 묵혀 두실 각오로 들어가 서야 합니다."

"얼마나?"

"최소 3년 정도로 잡고 계시면 될 거 같습니다."

"흐음……."

수익성은 나쁘지 않다. 금리가 높은 예금 통장 하나 만들어 둔 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행보관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도 괜찮다, 이거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 니다. 결정은 행보관님이 하시면 됩니다."

이강진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위험부담은 행보관이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결정도 행보관 의 몫이다.

행보관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처남 한 번 믿어 봐야지. 내가 주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일부러 나한테 시간 투자하면서 주식 많이 알려 주고 그랬으니 까."

이강진의 정보 덕분에 지금은 청줄어람이 되어 버렸지만, 그 래도 처남이 도와준 건 잊지 않고 싶었다.

받은 게 있으면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행보관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맙다, 강진아. 이제 가서 푹 자라. 나중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충성!"

"충성."

유용할 때 써먹을 수 있는 행보관 1회 이용권이 생겼다.

언제, 어느 때에 사용할지, 이건 이강진의 마음에 따라 달렸< 제50화. 약습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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