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9화 백색 전쟁 (4) >
제49화. 백색 전쟁 (4)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 각종 촬영 장비들을 짊어진 자들이 눈밭을 헤치고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딱 봐도 방송국 사람들임을 이강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PD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변두리에서 눈을 치우고 있던 이강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BLT 아침 뉴스테이블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촬 영 협조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무슨 촬영입 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뉴스 보시면 리포트들이 나와서 현장 중계하는 거 보셨죠? 그거 촬영하려고요. 괜찮다면 여기 있는 군 관계자 분 몇몇 데리고 인터뷰도 좀 하고 싶은데, 괜찮 을까요?"
예시를 들어 준 덕분에 어떤 촬영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이강진은 결정권자가 아니다.
"잠시만요, 부소대장님!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강진은 간부를 찾기 시작했다.
경광봉을 들고 이강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3부소대장.
방송국 관계자는 3부소대장에게 다시 한번 이강진에게 했던 말을 반복해서 들려줬다.
3부소대장은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서 통신반장 에게 연락을 취했다.
통신반장은 그 상태 그대로 행보관과 중대장에게 보고를 했 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물어봤다.
토스, 토스, 토스, 결국 스파이크를 날린 건 대대장이었다.
15분이 넘는 기다림 끝에 3부소대장은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대대장의 말을 전했다.
"촬영해도 된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에 그…… 인터뷰는 대대장님께서 직접 하고 싶다고 하시 는데, 마침 관사에 계시거든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바로 나오 시긴 할 텐데……."
"아, 괜찮습니다. 송줄이 바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30 분 후에 카메라 돌아갈 거니까 그전까지 인터뷰 하실 분, 그리 고 뒤에서 눈 치우는 거 작업하는 모습 보여 줄 병사 간부 몇몇 분들만 세팅해 주세요. 너무 작위적인 모습 말고 최대한 자연스 럽게 부탁 좀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3부소대장이 할 일은 배경이 되어 줄 병력을 선출하는 것이 었다.
우선 방송 경험이 많은 이강진을 먼저 고르기로 했다.
"강진아, 너 괜찮지?"
"예, 상관없습니다."
"오케이, 그리고…… 어디 보자……."
1075대대가 동이 트기 전부터 열심히 눈을 치운다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군대가 가장 좋아하는 것.
바로 '보여 주기식 연출'이다.
인위적인 티가 안 나게, 그리고 오버를 잘하는 병사들이 필요 하다.
"필중이하고 태강이, 너희도 일로 와라."
고필중은 오버를 잘한다. 그리고 성태강은 대중들에게 가장 유명한 군인 중 한 명이다.
그래서 3부소대장은 둘을 골랐다.
이강진까지 총 세 명이 눈 치우는 장면을 뒤에서 연출하기로 했다.
3부소대장은 경광봉을 들고 병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을 예 정이다.
15분 뒤.
대대장과 1중대 중대장이 허겁지겁 현장으로 출동했다.
"충성!"
3부소대장이 거수경례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충성, 방송국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어디 있나?"
"저기 차 있는 쪽에서 방송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 겠습니다."
"좋아, 앞장서게."
"예!"
대대장이 방송국 관계자들과 즉석 미 팅을 가지는 동안, 고필 중과 이강진, 성태강은 어떻게 하면 열심히 눈 치우는 모습을 연 줄할 수 있을까 회의의 시간을 가졌다.
생방송이 시작되기 5분 전.
여성 아나운서가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서는 얇은 옷을 입고 대기해 야만 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방송이라는 게 잠 힘들지.'
방송도 군대와 마찬가지로 보여 주기식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카메라 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3분 뒤에 송줄 시작됩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대대장은 바짝 긴장한 모양인지 중대장과 부소대장에게 자신 의 옷차림 상태가 어떤지 계속 물었다.
"최고입니다, 대대장님!"
"오늘따라 상당히 멋져 보이십니다! 이 정도면 배우라고 해도 믿으시겠습니다, 하하하!"
중대장과 부소대장은 대대장에게 사탕발림을 쏟아 내느라 정 신이 없었다.
부쩍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대대장.
하나 이강진은 지금의 대대장의 모습이 뭔가 아쉬웠다.
아니면 말까.
고민에 빠졌다.
때마침 대대장이 엑스트라로 출연할 병사들을 소집했다.
"너희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거 같나?"
병사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고필중과 성태강은 중대장과 부소대장이 했던 것처럼 잘 어 울린다면서 거의 찬양에 가까운 듯한 발언을 이어 갔다.
이강진도 처음에는 이들과 비슷했다.
다만, 똑같은 사탕발림은 아니었다.
"대대장님, 연줄을 약간 섞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줄?"
"예, 그렇습니다. 지금 대대장님의 모습이 너무 깔끔하십니다. 그게 오히려 작위적인 느낌이 납니다."
이강진은 말을 하면서 반대쪽에서 눈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 는 간부, 병사 들을 가리켰다.
그들의 전투복에 하나같이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제야 대대장은 이강진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 았다.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고맙네."
"상병 이강진, 아닙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중대장과 부소대장은 깨닫 지 못했다.
갑자기 대대장이 양팔을 수평으로 쭉 뻗었다.
그러더니 이들에게 명령했다.
"자, 내 몸에 눈을 뿌려 주게! 어서!"
이렇게 해야 대대장도 병사들과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제설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티가 난다.
혼자서 깔끔한 모습을 취하고 있으면 분명 시청자들에게 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저 대대장, 취재 온다니까 혼자만 따스한 곳에 있다가 막 카 메라 앞에 섰을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 대대장은 일부러 눈을 뒤집어쓰기 로 했다.
중대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대대장님!"
대대장을 향해 눈을 퍼붓는 중대장과 1중대원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강진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켰다.
'살다 살다 대대장한테 눈을 뿌릴 줄이야.'
재입대를 하니까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 * *
"3, 2, 1, 큐!"
카메라 돌자, 아나운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멘트를 치기 시작 했다.
"보시다시피 새벽부터 내린 눈이 상당히 많이 쌓인 상태입니다. 이곳은 도로의 제설 작업이 한창인데요.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태프가 대대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맞춰서 카메라 안으로 슬쩍 다가서는 대대장.
뒤에서 중대장이 3부소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설 작업, 스타트!
이강진과 병사들은 눈삽을 들고서 눈을 퍼 올리는 작업을 개 시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이들의 열정에 쌓여 있는 눈조차 녹아 버 릴 정도였다.
한편 아나운서는 이들을 배경으로 삼으며 대대장에게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사전에 전달한 질문을 건넸다.
"제설 작업은 언제쯤 끝날까요?"
"저희 병사들이 현재 잠을 설치면서 열심히 작업에 임하고 있 는 중입니다. 언제 끝날지 장담은 드릴 수 없으나,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마무리 지어 교통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카메라 앞이라 그런지 약간 어색한 티가 났으나, 그래도 실수 없이 무사히 인터뷰를 끝냈다.
짧은 인터뷰 방송을 마무리 지은 뒤에 방송국 사람들은 곧바 로 철수했다.
이제 다시 제설 작업에 매진해야 할 차례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슬슬 눈발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마침내…….
눈이 그쳤다.
"눈 멈췄을 때 후딱 작업하고 들어가자!"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쌓여 있는 눈이 너무 많았기에 좀처럼 작업에 진전이 없었다.
그때 였다.
민간 차량 한 대가 이들에게 다가왔다.
또 방송국 사람들일까?
그건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차량이었다.
3부소대장은 차종과 자량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충성!"
차에서 내린 남자가 3부소대장의 거수경례를 받아 줬다.
1075대대 주임원사였다.
"작업 아직도 안 끝났나?"
"예, 그렇습니다."
주임원사는 아직도 수북하게 쌓여 있는 도로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치운다고, 작업 중단하고 병력 잠시 쉬 게 해라."
"예, 알겠습니다. 전체 주목! 작업 중단하고 15분간 휴식한다!"
3부소대장이 병사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는 동안, 주임원사 는 스마트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여기 눈 장난 아니게 쌓였어. 이거, 우리 애들만으 론 다 못 치워. 와서 좀 도와줘. 내가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살 테니까. 허허,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렁 와."
아무리 군대라 하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 한 영역이 있다.
주임원사가 판단하기에 지금 펼치는 제설 작전은 후자에 속 했다.
이건 병사들만 죽어 나가는 꼴밖에 안 된다.
이런 때에는 필살기를 사용하면 된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도로 끝 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을 흔들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성태강이 선임들에게 외쳤다.
"저 기, 이상한 차 한 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차는 또 뭔데?"
소환된 선임들은 성태강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왔구나."
"이강진 상병님, 저게 대체 뭡니까?"
"저건 말이다……."
제설 작업의 다크호스.
제설의 신, 제설차!
하나 이강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설차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를 이 백색 지옥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다."
* * *
수백 명의 병사들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못 치운 눈을 제 설차가 와서 전부 해결해줬다.
주임원사가 제설차에서 내린 상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
"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눈이 왜 이렇게 많이 쌓여 있습니까?"
"몰라. 여하튼 이 길 따라서 쭉 눈 밀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 부탁 좀 할게."
"예,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인맥빨로 제설차를 소환한 주임원사
그 덕분에 병사들은 이 지긋지긋한 백색 지옥에서 마침내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뒷정리만 하고 다들 들어가서 쉬었다가 밥 먹으러 가라. 고 생 했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임원사님!"
그가 없었더라면 병사들은 아직도 눈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뒷정리를 하고 식당으로 가자, 아침 메뉴 대신 뜨끈한 라면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한 병사들을 위해 오호만 상병과 취사병들이 만든 특별 식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라면 면발과 함께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켜니 차가웠던 몸이 금세 녹아들었다.
고생하고 난 뒤에 먹는 라면이라 그런지 유독 맛있게 느껴졌다.
오로지 군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맛.
이강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다시 못 느낄 줄 알았던 이 라면 맛을 다시 접하게 될 줄은 몰랐네.'
재입대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 제49화 백색 전쟁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