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백색 전쟁 (3)
기운상과 함께 탄약고 초소로 향하는 백우호.
산을 타기 전에 그는 분리수거장 뒤쪽을 슬쩍 바라봤다.
저곳에 백우호의 MP3가 묻혀 있었다.
'그때 그냥 묻지 말고 가지고 있을 걸 그랬네.'
근무를 나갈 때마다 MP3 생각이 간절해졌다.
선임 근무자로 나가는 일이 부쩍 많아지다 보니 이제 백우호 는 초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전부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MP3 들어도 잔소리 할 선임들도 없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백우호였으나,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 번 결정한 걸 번복할 수는 없었다.
그저 고장만 안 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터벅터벅.
초소 근처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전번 근무자들이 이들을 반겼다.
"후딱 와 라, 우호야."
"추민복 병장님, 벌써 나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간부들 순찰도 안 돌잖아. 귀찮으니까 교대 대충 했다고 치자."
"하하, 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냐, 너희들도 수고하고."
내려가는 와중에 추민복은 근손실이 올까 봐 K-2 소총을 역 기 드는 것처럼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괜히 헬스에 미친 남자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탄약고 초소에 들어서자마자 백우호는 좋을 내려놓았다.
여름이었으면 방탄모도 벗었겠지만, 날씨가 너무 줍다 보니 차마 방탄모는 벗을 수 없었다.
머리가 무거워도 백우호는 추위보다 따스함을 택하고 싶었다.
야상 안쪽으로 손을 넣은 백우호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씨, 핫팩 안 가져왔네."
"저, 핫팩 두 개 있습니다. 하나 쓰시겠습니까?"
"정말? 고맙다, 운상아."
"아닙 니다, 새 것으로 가져왔으니까 따끈따끈할 겁니다."
기운상 덕분에 살았다.
겨울에 외곽 근무를 설 때 핫팩은 필수다.
탄약고 초소에 난방 설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이 휑 하다 보니 바람도 쓸데없이 잘 분다.
추운 곳에서 근무를 서려면 방한 대책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
내복에 깔깔이, 목 토시까지 했음에도 추위라는 이름의 창은 외부로 드러난 백우호의 피부를 쿡쿡 찔러 댔다.
"어휴, 추워라……."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절로 나왔다.
덥다고 난리를 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이 왔다.
"우리나라 사계절 맞나? 봄하고 가을을 겪어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줍거나 아니면 덥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군대 날씨는 이 기온차가 더 심했다.
기운상도 백우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사회에 있을 때보다 군대에 있을 때가 체감상 계절이 더 빨리 변하는 거 같습니다."
"이것이 군대 날씨인가……. 음? 잠깐."
순간 백우호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비췄다.
손전등 불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비했다.
심지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탄약고 초소 조명등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작은 무언가들.
그것들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씨발, 좆됐네. 눈 온다, 야."
일기예보대로 눈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싸리눈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 날수록 눈발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10분밖에 안 지 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탄약고 초소 앞 에 눈밭이 형성되었다.
초소 안에 설치되어 있는 키가 울렸다.
"제가 받겠습니다."
수화기를 들어 올린 기운상.
"통신보안, 탄약고 초소 근무자 일병 기운상입 니다."
-어, 운상이냐? 나, 민복인데.
"충성!"
15분 전에 근무 교대했던 추민복이 키를 넣은 것이다.
-지금 당직들이 다 정신이 없어서 내가 대신 키 넣은 거거든? 지금 대대에서 지침 사항 내려왔는데, 초소 근처에 눈 쌓이지 않 도록 탄약고 초소 한 명이 나와서 주기적으로 눈 쓸라고 하더 라.
"예, 알겠습니다."
키를 내려놓은 기운상.
백우호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래?"
"눈 쓸랍니다."
"하아!"
근무를 서기 위해 온 것인지, 아니 면 제설 작업하려고 올라온 것인지.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심심하진 않겠네."
* * *
눈을 뜬 이강진은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위에는 밤하늘이, 눈앞에는 한강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하나 야경보다 더 아름다운 이가 이강진의 옆에 앉아 있었다.
"강진 씨."
한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줄렁였다.
하늘에서 여신이 내려온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너무 눈부셨다.
"저, 강진 씨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사랑 고백?
그게 아니었다.
"사실 저, 걸그룹으로 데뷔할까 해서요."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그래도 한지윤이라면 아이돌도 잘 어 울릴 것이다.
한지윤이 원하는 거라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좋다는 말을 해 주려고 했다.
이번에도 한지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백할 게 두 개 더 있어요."
잠시 뜸을 들인 한지윤.
"저는 오이를 싫어해요."
잠으로 값싼 고백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두서없는 말을 하는 한지윤이 너무나도 이상 하게 보였다.
마지막 고백은 뭘까.
"강진 씨를 남자로 보고 있어요."
오이를 싫어한다는 싸구려 고백 다음에 핵폭탄급 고백이 터 졌다.
이강진은 당황했다.
한지윤이 먼저 고백을 했으니, 이젠 이강진이 답을 해 줘야 할 차례다.
이미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저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나요? 혹시 강진 씨…… 저를 싫어하세 요?"
그럴 리가 있겠나.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저으면서 필사적으로 부정해 보는 이강진이었으나, 점점 오해만 깊어질 뿐이었다.
"실망이에요, 강진 씨. 저는 용기 내어서 고백했는데, 대답도 안 해 주시고……. 너무해요. 앞으로 절 찾지 말아 주세요."
떠나려는 한지윤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덥썩!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아야야! 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
한지윤의 입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강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이강진을 먼저 반겼다.
'꿈이었나.'
어쩐지, 이상하다 싶긴 했었다.
그때 백우호가 이강진의 손을 강제로 뿌리쳤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남의 허벅지를 잡고 막 꼬집냐."
이강진이 붙잡은 건 한지윤의 손이 아닌 백우호의 왼쪽 허벅 지였다.
손에 힘을 너무 준 모양인지 백우호는 아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아침이냐?"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밖이 너무 어두웠다.
한지윤이 준 손목시계를 꺼낸 이강진.
현재 시각은…… 새벽 4시 30분이었다.
기상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생활관 불은 전부 켜져 있었 다.
아직 잠이 덜 깬 병사들은 대체 무슨 일이냐면서 해명을 요구했다.
가장 먼저 일어났다가 괜히 이강진에게 봉변(?)을 당한 백우 호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려줬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제설 작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꼭두새벽에?"
"예."
고필중은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지난날의 악몽이 반복되고 말았다.
* * *
사열대로 나온 순간, 병사들은 눈을 의심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눈밭을 향해 발을 내민 순간.
푹!
순식간에 왼쪽 발이 사라졌다.
무릎까지 파묻힌 것이다.
"와, 씨……."
할 말을 잃은 병사들.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눈앞에 펼쳐 져 있는 건 지독한 현실이었다.
"일단 사열대 앞부터 치우자."
"예!"
제설 도구를 미리 챙겨 온 병사들이 먼저 선두에 섰다.
"넉가래 부대, 앞으로!"
척
10명의 병사들이 나란히 일렬로 섰다.
"돌격!"
넉가래를 힘 있게 쥔 병사들이 눈을 앞으로 쭉 밀어 내기 시 작했다. 너무 많다 싶을 때에는 옆으로 궤도를 틀었다.
그렇게 넉가래 부대가 먼저 길을 터주면, 다음은 눈삽 부대의 차례다.
아직 남아 있는 눈덩이들을 눈삽으로 퍼서 던져둔다.
그리고 빗자루 부대가 마무리를 담당한다.
대자연과 맞서 싸우려면 이렇게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협동심을 발휘해야 한다. 개개인의 힘은 약할지 모르지만, 집단 의힘은 강하다.
사열대 앞에 쌓인 눈들을 어느 정도 치우고 난 다음에야 정상 적인 집합이 이루어졌다.
통신반장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주목."
"주목!"
"잠자다가 불려 나와서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는 거, 나도 아 주 잘 안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렇거든. 그래도 어쩌겠냐. 위에 서 시키면 해야지. 그게 군인이잖아, 안 그래?"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저번처럼 분대별로 어디어디 제설 작업해야 할지 알려 줄 테니까 분대장들이 통제해서 작업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리고……."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에 갑자기 당직병이 뛰어나왔다.
"통신반장님! 행보관님한테 전화 왔습니다."
"이 시간에? 일단 줘 봐."
행보관과 빠르게 통화를 주고받은 통신 반장은 이 내 자신이 했 던 말을 번복했다.
"행보관님께서 그러시는데, 지금 부대 앞 도로가 난리도 아니 란다. 아예 차가 못 다닐 정도라고 하니까 일단 도로부터 먼저 제설 작업 실시하도록 하겠다. 한 10명 정도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위병소로 출발해라. 3부소대장이 인솔해."
"예, 알겠습니다."
오대기 때문에 관사가 아닌 막사에 올라와 병사들과 같이 생 활하던 3부소대장은 통신반장 말대로 병사들을 인솔했다.
도로 제설 작업조에 1분대도 전원 포함되었다.
이동 중에 오종한은 한탄을 금치 못했다.
"말년에 제설이라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전역까지 3주도 안 남았다. 보통은 그중 반은 말년 휴가로 짬 처리시킬 수 있지만, 오종한은 2중대에서 저지른 하극상 때문에 가지고 있던 휴가가 전부 잘린 상태였다.
전역할 때까지 계속 부대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눈이 내리면 오종한도 예외 없이 제설 작업에 동원될 거라는 말과 같은 뜻이 었다.
위병소를 통과해 도로로 나온 1중대원들.
본부중대를 포함해 타 중대원들도 도로로 나와 백색 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다.
참전하게 된 1중대원들도 곧장 제설 도구를 들어 올렸다.
3부소대장이 분대장급들을 불렀다.
"제설 시작하기 전에 분대장들은 이거 입어라."
형광으로 빛나는 작업복 조끼를 몇 벌 건넸다.
"혹시 차가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작업하고. 무 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보고하는 거,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병력한테 동상 조심하라고 해라. 분대장들이 그런 거주기적으로 체크해, 특히 일, 이병 들 위주로. 알겠지?"
"네. 확인하겠습니다."
제설 작업도 좋지만,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동상이 심하게 걸릴 경우, 발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발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제설 작업을 진행하던 와중이었다.
저 멀리서 차량 불빛이 보였다.
눈 때문인지 차를 구석 쪽에 주차시킨 뒤에 장비 같은 것을 주섬주섬 챙긴 뒤,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강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봤다.
군인은 아니었다.
그들이 짊어진 물건들은 이강진에게 낯이 익은 것들이었다.
"저거…… 촬영 장비 아닌가?"
< 제49화. 백색 전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