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161화 (161/347)

제49화. 백색 전쟁 (2)

백우호의 우려와 달리 더 이상의 눈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위기가 방문 예약을 걸어 뒀다.

월요일 오전 집합.

행보관 대신 통신반장이 병사들 앞에 섰다.

"너희들에게 좋은 소식 하나, 안 좋은 소식 하나. 이렇게 두 개 를 가지고 왔는데, 어느 것부터 듣고 싶냐?"

병사들은 고민했다.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이 없었다.

결국 통신반장이 직접 병사 한 명을 지목했다.

"백우호."

"상병 백우호!"

"어느 것부터 듣고 싶은지 말해 봐."

"으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좋은 소식부터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아까 행보관님께서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셨는데, 이번 주 '평일 동안'은 눈이 안 온다고 하더라."

좋은 소식은 맞다.

일단 눈이 안 온다고 하니까.

그러나 병사들은 통신반장이 한 말 중에 유독 '평일 동안'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 말은 즉…….

"대신 주말에 눈 은단다. 심지어 폭설 주의보 내렸어."

이게 통신반장이 가져온 안 좋은 소식의 정체였다.

평일에 눈 안 오고 주말에 눈 온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냥 안 좋은 소식이었다.

심지어 폭설 주의보라니, 주말에 아예 쉬지 말라고 선언한 것 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원래 우리나라 일기예보가항상 맞 는 법은 없었잖아, 틀린 경우도 많았고. 그렇지?"

병사들을 위로해 보는 통신반장이 었지 만, 불안감의 불씨는 사 그라들지 않았다.

"아무튼 이번 주 주말이 되었든, 아니면 다른 날이 되었든 간 에 언젠가 눈이 오긴 할 테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오늘은 제설 도구 수리 작업하고 벌목 작업 등을 진행할 거라고 행보관님께 서 말씀하셨다. 작업 분류는…… 음……."

어떻게 팀을 나눌까,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아직도 작업 분배 안 하고 있었냐?"

뒤에서 행보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충성! 이제 막 나누려고 했습니다!"

"빠릿빠릿하게 좀 움직여라. 그리고 강진이하고 우호."

"상병 이강진!"

"상병 백우호!"

"너희는 나하고 같이 시내로 간다. 제설 도구 사러 가야 하는 데 짐꾼이 필요하거든. 작업복 입을 필요 없고, 그냥 그대로 내 차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나도 곧 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만 따로 열외 되었다.

나머지는 통신반장이 예고한 대로 두 팀으로 갈라져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행보관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백우호는 설레는 기분을 드 러 냈다.

"오래간만이 바깥 공기 좀 마시겠구나, 후후."

"난 별로 감흥이 없네."

"짜식. 어제 목사님하고 같이 바깥에서 밥 먹고 왔다고 자랑 하는 거냐? 왜 난 안 불렀어."

"억울하면 너도 군종병 해."

"……쳇."

군인은 두 부류로 나뉜다.

운이 좋은 군인.

그리고 운이 나쁜 군인.

어제 이강진은 운이 좋은 군인이었다. 막판에 눈이 와서 제설 작업에 투입된 것만 빼면 완벽한 주말이었다.

'그리고 지윤 씨한테 선물도 받았고.'

달라진 손목시계를 살피면서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짙은 미 소를 띠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백우호가 이강진의 새로운 시계에 관심을 보였다.

"뭐냐, 그거. 못 보던건데?"

"아, 이거……."

"설마 지윤 씨 가 준 거 냐?"

감은 더럽게 좋다.

아니라고 부정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강진이었으나,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어."

"와! 세상에. 연예인한테 선물도 다 받고. 줄세했구나, 너."

"줄세는 무슨.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지윤 씨 한테 선물받았다고 또 질투 엄청 할 테니까."

"알고 있어.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으로 보이 냐? 나, 지킬 건 지키는 남자라고. 의리!"

백우호는 입이 가벼운 편이 아니다.

어디 가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닐 녀석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이강진은 가급적이면 백우호한테는 사실을 털어놓곤 했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행보관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 왔다.

"준비 다 끝났냐? 출발할 테니까 바로 차에 타라."

"예, 알겠습니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힘 쓸 각오.

그리고 바깥 공기를 마실 거라는 기대감. 이런 마음가짐 정도가 다였다.

시내에 도착한 이강진과 백우호는 행보관과 함께 시장 내로 진입했다.

매번 휴가나 외박, 외출을 나올 때마다 들르던 시내여서 그런 지 두 사람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몇몇은 이강진과 백우호를 알아보기도 했다.

"저번에 우리 가게에 왔었던 그 청년들 아닌감?"

"네, 맞아요.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장님, 하하!"

"다음에 휴가 나오면 또 들러! 서비스 확실하게 해 줄 테니까!"

"꼭 들를게요."

이강진과 백우호가 자신들을 알아보는 시장 상인과 잡담을 나 누는 동안, 행보관은 가게에 들어가서 부족한 제설 도구들을 구 입 했다.

주로 눈삽이 많았다.

"이거 가져가서 차에 실어라."

"예, 알겠습니다."

빗자루, 넉가래, 눈삽 중 눈삽이 가장 내구도가 낮다. 부서지 거나 고장 나는 비율을 따지면 눈삽이 가장 높았다.

게다가 이번 주말에 폭설 주의보가 내렸다. 눈이 보통 쌓이진 않을 터.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한다.

군인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눈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면, 튼튼한 제설 도구는 무조건 필수다.

"어 잇차!"

한쪽 어깨에 제설 도구 묶음을 짊어지는 두 남자.

묵직한 무게감이 벌써부터 이들의 몸을 짓눌렀다.

이걸 들고 시장 입구까지 가야 한다.

그래도 무거운 나무들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가야 하는 벌목 작업보단 훨씬 수월했다.

트렁크를 열어 준 행보관.

"안에 잘 넣어 둬라."

"예, 알겠습니다!"

쿵!

차가 크게 움찔했다.

제설 도구들을 전부 다 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목장갑 그리고 방한 대비용 물품들이 필요하다.

고작 시장 몇 번 왔다갔다 했을 뿐인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 쩍 다가왔다.

"밥 먹고 부대로 들어갈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내가 사 주마."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땡 잡았다.

행보관과 함께 시장을 돌아다닐 때에는 솔직히 많이 지루했 다. 힘들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 고생을 점심 한 끼로 제대 로 보상받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병사들의 눈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순대 국밥집이었다.

아까부터 국밥 특유의 냄새가 두 남자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 유혹이 제대로 통한 것이다.

얼큰한 순대 국밥과 함께 허기를 채우는 이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날씨 예보가 도중에 이들의 귀를 사로 잡았다.

-이번 주 주말, 폭설 대비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경기, 강원 도 쪽에는 이미 폭설 주의보가 내렸으며, 기온도 영하로 뚝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로 옆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두 노인이 뉴스를 보고선 말했다.

"주말에 눈이나 치우면서 시간 보내면 되겠구먼."

"집에만 있으면 괜히 마누라 눈치만 보이니까. 차라리 잘 됐 지, 허허허!"

"그러고 보니 군인 양반들도 이 번에 눈 오면 고생 좀 하겠수?"

행보관과 두 병사들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고생 수준이 아니다.

눈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 * *

일기예보대로 평일 내내 맑은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금요일 저녁이 되자마자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온다, 와 그 망할 악마의 똥가루들이 또 오려고 하고 있어."

"주말은 그냥 쉬는 거 포기하고 있는 게 더 마음 편할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러겠지."

하늘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일말의 희망이 있다.

기상청의 예상과 다르게 눈이 깔짝 오고 끝날 수도 있지 않은 가.

이강진은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 보기로 했다.

내일 폭설이 내릴지 말지.

이걸 떠올리면 된다.

'떠오를 리가 없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 좋은 기억은 가급적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잊어버렸건만…… 설마 회귀해서 재입대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냥 마음을 비우고 있자.'

내무생활에서 생기는 문제점은 그래도 이강진이 어느 정도 컨 트롤이 가능하지만,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

* * *

저녁 점호가 시작되었다.

당직사관을 맡게 된 통신반장은 1생활관 병사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마음 같으면 오늘 TV 연등이라도 시켜 주고 싶은데, 그냥 다들 일찍 자라. 주말에 폭설 주의보 뜬 거, 다들 기억하고 있지? 어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제설 작업에 투입될 수도 있 으니까 잘 수 있을 때 미리미리 푹 자두는 게 좋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잠들기 전에 '주말에 제발 눈 안 내리게 해 주세요'라고 한 번씩 빌고 자. 혹시 또 모르지 않냐. 너희들의 애원에 하늘도 감 동받아서 진짜로 눈 안 내리게 해 줄 수도 있으니까."

웃자고 한 농담이었으나, 병사들 그 누구도 입꼬리를 올리지 않았다.

"어흠!"

괜히 머쓱해진 모양인지 통신반장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무튼 다들 푹 자라. 특이 사항 있는 사람은 거수하도록. 없 으면 이상 점호 마치도록 하겠다."

모든 생활관의 점호가 끝났다.

초번초인 백우호는 기운상과 함께 외곽 근무에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그전에 고필중이 백우호를 불렀다.

"우호야, 밖에 눈 오냐?"

창문을 슬쩍 열어 본 백우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람만 쌩쌩 불고 있습니다."

"하, 망할 놈의 눈 때문에 잠도 안을 거 같은데."

고필중과 황지웅이 막 일병을 달았을 때 겪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저녁 점호를 마치 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새벽 4시쯤.

갑자기 생활관에 불이 켜지 더 니, 불침번들이 병사들을 깨우 기 시작했다.

실제 상황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당시 불침 번이 한 말이 아직도 고필중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눈 치우랍니다.

눈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잘 자던 병사들을 깨워야만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필중과 황지웅은 중대원들과 함께 제설 도구를 들고 동이 틀 때까지 눈을 지워야만 했다.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저번처럼 또 자다가 불려 나가는 건 아니겠지?"

황지웅은 걱정하지 말라며 고필중을 다독였다.

"설마 또 그러겠냐. 그때도 그날 딱 한 번만 그랬잖아. 그다음 부터는 새벽에 깨서 제설 작업에 투입된 적도 없었고."

"하긴 그랬었지."

정말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새벽에 병사들을 깨우는 일 은 잘 없다.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통신반장의 말마따나 잠이나 푹 자두 는 게 좋다.

고필중과 황지웅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접한 이강진은 생각 에 잠겼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군대와 눈에 관련된 기억 중에서 좋았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르겠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올려 버린 이강진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 제49화. 백색 전쟁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