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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군대에서 맞이하는 생일 (2)
한지윤이 준 디지털시계.
그것을 볼 때마다 이강진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녀가 건네준 초코파이 같은 거와 전혀 비교가 안 됐다.
어쩌면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군대에서 맞이한 생일 덕분일지도 몰랐다.
평범한…… 아니, 오히려 괴로운 군 생활이라 하더라도 한지윤 만 있다면 특별한 군 생활이 된다.
마치 지금처럼.
종교 행사가 한창 진행될 때.
이강진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한 지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피아노 치는 모습도 어쩜 저렇게 예쁠까.'
연예계에 데뷔하고 난 이후부터 한지윤의 아름다움은 배가 되 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메라 마사지라는 걸까.
나날이 예뻐지는 한지윤.
'분명 다른 남자들한테 대시도 많이 받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1075대대만 하더라도 한지윤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수두룩하다. 바깥에선 얼마나 많을지 종잡기도 힘들었다.
한지윤은 과연 이강진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심 궁금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걸로 봐선 적어도 날 싫어하는 거 같진 않 고.'
하나 여자 마음은 알기 참 힘든 분야다.
미래의 일들을 대부분 알고 있는 이강진조차 한지윤의 마음 은 어떨지 쉽게 예상할 수가 없었다.
찬송가가 끝나고 기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강진은 두 손을 모았다.
한동안 계속해서 눈을 감고 기도에 집중하는 이강진.
오늘따라 그의 기도 시간이 유독 길어졌다.
종교 행사가 끝난 후에 바로 뒷정리에 들어갔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목사가 이강진을 따로 불렀다.
"강진이, 자네. 오늘 생일이라고 하던데."
"오늘이 아니라 어제였습니다, 목사님."
"아, 그런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목사.
하루 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알아주는 게 어디인가.
"부모님이랑 연락은 했나?"
"예, 어제 통화했습니다. 부대에서 생일 파티도 간단하게 가 졌습니다."
"그거 말고는?"
"그게 끝입 니다만……."
군대에서 뭘 바라겠나. PX 파티 하고, 가족들이랑 통화하고, 이게 전부다.
그러나 목사는 생각이 좀 달랐다.
"생일인데 바깥 구경이라도 좀 해야지, 기다려 보게."
갑자기 어디론가 통화를 하기 시작하는 목사.
잠시 후, 스마트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행보관의 목소리였다.
"어제가 강진이 생일이었다고 들어서요. 강진이가 평소에 교회 종교 행사도 많이 도와주고 그래서 제가 보답을 할까 하는데 결론은 이거였다.
"외출 좀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서 갑자기 외출을?
이강진은 헛숨을 삼켰다. 설마 이런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 다.
하나 쉽게 허락은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외박, 외출을 나가려 면 며칠 전에는 보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사전 협의된 것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외출을 나가게 해 달라고 연락을 해 오면, 누가 허락을 해 줄까.
목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외출 준비해라, 강진아. 나가도 좋다고 하는구나."
행보관이 허락을 해줬다!
고민도 안 해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를 한 것이다.
'이것이 목사님의 힘인가.'
어쩌면 이강진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 다.
막사로 올라갈 것도 없이 이강진은 바로 목사의 차를 타고 밖 으로 향했다.
이미 행보관이 대대에 연락을 해 둔 모양인지 위병소 조장 근무자는 이강진을 보자마자 바로 통과시켰다.
대대에서 이강진은 유명 인사였다. 그러다 보니 일일이 신원 확인을 하지 않아도, 얼굴만 봐도 '아, 이 아저씨가 이강진이구 나.'라고 대부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된 이강진.
바로 옆에는 한지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뒷좌석에서 급하게 뭔가를 숨겼다.
손놀림이 너무 긴박했다.
"지윤 씨, 그것들은 다 뭔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호호호!"
말을 더듬는 한지윤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목사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딸 물건들이 뒤에 많이 있었거든, 허허."
"아빠! 조용히 좀 해요!"
결국 한지윤이 버럭 소리를 쳤다.
부녀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걸 방치할 수 없었기에 이강진은 한지윤이 숨긴 물건에 관심을 끊기로 했다.
작은 사건을 뒤로한 채 마침내 이들이 탄 차가 시내에 들어섰 다.
"일단 밥부터 먹지. 지윤이하고 자주 가는 중식 집이 있는데, 자네 중식 좋아하나?"
"예, 좋아합니다."
짬밥보다는 훨씬 맛있을 터.
목사가 차를 주차시키는 동안 한지윤은 가게를 가리키 면서 말 했다.
"여기, 맛집이에요. 나중에 강진 씨 외박이나 외출 나오면 꼭 한번 가 보세요."
"그래야겠네요."
한지윤이 추천한 맛집은 무조건 가야 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걸린 사진과 사인이 이강진의 시 선을 사로잡았다.
가게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한지윤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하나. 그리고 그 밑에 한지윤의 사인이 걸려 있었다.
이것을 보니 이강진은 저번에 자신이 휴가를 나가서 황민수 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딜 가든 가게 사장님들은 다 비슷한 마인드군.'
그렇다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가게 홍보 수단 중 하나일 테니까.
이강진 일행은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3번 룸으로 들어선 세 사람.
빙글빙글 돌아가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세 사람이 각자 의자 를 하나씩 차지했다.
목사가 이강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자네한테 이 런 식으로라도 보답을 꼭 하고 싶었네. 다른 군종병보다 항상 먼저 나와서 우리 일 도와주고, 종교 행사 끝나면 누구보다도 늦게까지 남아서 도와주고. 언제나 고맙네."
"아닙니다, 목사님."
이강진은 그저 한지윤과 좀 더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정말로 기독교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장인어른이 될지도모르는 목사한테 점 수도 미리 따 두면 좋지 않겠나.
그래서 이강진은 어떤 일이 다가오든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 없이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이들의 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이강진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다.
머지않아 음식들이 하나둘씩 세팅되기 시작했다.
목사는 이강진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 것을 권유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먹게."
"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으로 깐풍기 한 조작을 집어 들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높은 만족 도를 드러냈다.
"진짜 맛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여태껏 먹었던 깐풍기 중에 서 가장 맛있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나도 그렇고, 우리 딸 아이도 그렇 고. 단 걸 좋아하다 보니 여기를 자주 오거든. 그렇지, 지윤아?"
한지윤은 대답 대신 머리를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이미 그 녀의 입안에 깐풍기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 명이 오순도순 앉아 맛있는 음식과 함께 대화를 이 어 갔다.
그러면서 이강진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윤 씨, 외동딸이 아니었군요?"
"네, 밑으로 두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어요. 말을 어찌나 안 듣는지……. 언니 입장에서 고민이에요."
모든 형제자매가 항상 친하게 지낸다는 보장은 없다.
"나중에 여동생 분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조금씩 먹기 시작 하면, 언니의 마음을 서서히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연륜이 느껴지는 이강진의 조언이었다.
목사는 그런 이강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자네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어른스러 운 면이 있군."
"그런가요?"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거 같군. 그 래도 상당히 올바르게 자라 준 거 같아서 참 대견해, 허허."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와 한지윤은 이강진의 가정사가 어떤지 대략 알고 있었 다.
그런 와중에 일찍 철이 든 이강진의 모습을 보니, 목사는 대단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약간 안쓰러운 느낌도 받았다.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고 지내도 될 나이인데, 그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거 같아서 안타까웠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상담해도 되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 테니까."
"예, 목사님."
회귀 이전에는 인간관계로 괴로운 기억들밖에 없었지만, 지 금은 달랐다.
주변에 이강진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강진은 이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기로 결심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헤어지는 것도 좀 그런지 근처에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기로 했다.
도중에 목사가 스마트폰을 꺼내 면서 말했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올 테니 둘이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게 나. 통화가 아-주 길어질 테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들 이 야기해."
이강진과 한지윤,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일부러 자 리를 비켜 주려는 것이다.
이강진은 그걸 바로 눈치챘다.
한지윤도 마찬가지였다.
목사가 자리를 비우자, 한지윤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강진 씨. 아빠가 저하고 강진 씨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오해한 상태가 더 좋았다.
"요즘 드라마는 어떤가요? 다음 출연 작품은 정해졌나요?"
"영화 쪽에 욕심이 생겨서 그쪽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대본은 세 개 정도 받았고, 두 곳은 오디션을 보고 난 다음에 배역이 정 해질 거 같아요."
"한동안 또 바빠지시겠군요."
"크랭크인 전까지는 한가할 거예요. 그러니까 강진 씨, 나중 에 휴가 나올 때 저번처럼 같이 날짜하고 시간 맞춰 봐요. 우리, 데이트 안 한 지 오래 됐잖아요. 그렇죠?"
저번 휴가 때 이강진도 한지윤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언제가 괜찮을지, 서로 상의를 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목사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슬슬 부대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바래다 줄 테니 차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한지윤도 부대까지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목사의 배려 덕분에 이번 이강진의 생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 * *
위병소 앞에 내린 이강진은 한지윤 부녀와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조심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자네도 들어가게."
"다음 주에 또 봐요, 강진 씨!"
한지윤 부녀를 먼저 보낸 다음, 이강진은 부푼 기분과 함께 위 병소로 향했다.
'부대 들어가면 휴가 일정부터 짜야겠군.'
다음 휴가는 한지윤과의 데이트가 미리 예정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풍경이 벌써부터 핑크빛으로 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핑크빛 세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왼쪽 볼에 차가운 감촉을 느낀 이강진.
"음?"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이강진은 절망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백색 덩어리.
"이 런 쌍!"
눈이 내린다.
< 제48화 군대에서 맞이하는 생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