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2) >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2)
부대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 위해 복귀한 안준렬과 라 인혁.
마침 오늘의 당직사관은 행보관이었다.
"충성 병장 안준렬 외 1 명, 휴가 복귀했습니다."
안준렬이 대표로 복귀 신고를 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행보관은 손을 휘저 었다.
"알았다, 가 봐라."
"예, 알겠습니다. 충성!"
거수경례도 대충 받았다.
라인혁은 행보관의 저런 반응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행보관님, 왜 저러신데? 저번 진지 공사 때처럼 작업을 마음 껏 못 하셔서 그런 건가?"
"아니, 나 때문에 그래."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안준렬은 말년임에도 불구하고 라인혁처럼 어디 가서 짱 박 히거나 그러지 않고, 오히려 행보관이 지시하는 작업에 적극적 으로 나서면서 일했다.
여태껏 말년 병장들이 보여 왔던 것과 다르게 굉장히 성실한 태도를 선보였던 안준렬.
그런데 왜 행보관이 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라인혁은 이해가 안 됐다.
하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년 휴가 나가기 전에 행보관님이 나한테 부사관 지원하라고 압박을 엄청 넣으셨거든."
"나한테도 그 말 했었는데?"
"너는 그냥 한번 떠보는 식이었고, 나한테는 본격적으로 제안 했던 거야. 기억나지? 말년 휴가 나가기 전에 나, 행보관실로 불 려가서 2시간 뒤에 왔던 거."
"아하, 설마 그것 때문이었냐?"
"어."
행보관은 안준렬을 진심으로 부사관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안준렬 같은 똘똘한 녀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준렬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군대가 싫다기보다는 부사관보다 더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꿈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보관도 그걸 잘 알기에 더 이상 그를 강요하진 못했다.
대신 행보관도 사람인지라 아쉬움이 남은 모양인지 안준렬과 마주할 때마다 저런 식으로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런 모습이 안준렬에겐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행보관님도 참 귀여운 면이 있지 않냐?"
"아니, 전혀."
라인혁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생활관에 들어서자마자 후임들의 거수경레가 콤보로 이어졌
"충성!"
"충성! 이제 복귀하셨습니까!"
"충성 너무 안 봐서 두 분 얼굴 까먹을 뻔했습니다."
후임들의 말에 라인혁은 키득키득 웃었다.
"얼굴 까먹어도 돼. 어차피 오늘 지나면 이제 못 볼 텐데."
고필중은 그런 라인혁을 보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에이, 전역하고 나서도 부대 몇 번 찾아오시기로 했지 않았 습니까? 양손에 치킨하고 피자 들고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은근슬쩍 치킨하고 피자 공약 집어넣지 마라. 그런 말 한 적 없으니까."
라인혁의 태클에 1분대원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종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분대원들과 거리감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안준 렬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없어도 1분대는 알아서 잘해 나갈 터.
'역시 부사관 지원 안 하길 잘했어.'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 * *
안준렬과 라인혁이 분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이강진이 뒤늦게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충성 오셨습니까."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은 라인혁이 이강진의 전신을 쭉 훑으 면서 물었다.
"뭐하느라 늦었어?"
"화학 장교님 좀 도와드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본부중대 아저씨들은 어디 가고?"
"검열 준비한다고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하고 몇몇 병사 들이 본부중대로 가서 좀 도와주고 왔습니다."
그게 이제 끝났다.
생각보다 작업이 오래 걸렸다.
자칫 잘못하면 저녁 시간을 놓칠 뻔했다.
사실 밥 한 끼 정도는 늦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라인혁, 안준렬과 같이 먹는 마지막 식사 시간 이다.
이강진은 이 식사 시간을 놓지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진행하면서 라인혁은 황지웅에게 물었다.
"지웅아, 내가 PX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있지?"
"슈)(치킨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 잘 아네. 역시 내 맞후임이야. 난 많은 거 안 바란다, 그것 만 있으면 돼."
"그것보다 더 맛있는 걸로 준비했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음?"
PX에서 파는 먹거리 중에서 슈X치킨은 병사들 사이에서 항상 선호도 1, 2위를 달리는 무적의 냉동식품이다.
그것을 뛰어넘는 먹거리라는 게 무엇일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채도 황지웅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황지웅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분대원들도 마찬가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라인혁은 눈을 흘겼다.
"이 녀석들. 그래, 알았다. 기대 잔뜩 하고 있으마."
황지웅의 성격상 웬만한 건수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강하게 자신감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 * *
전역 파티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백우호와 기운상은 두 예비 전역자를 데리고 휴게실로 향했그동안 1생활관 내에서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뒤.
곽분섭이 네 사람을 불렀다.
"전역 기념 파티 시작한다고 합니다."
"좋아, 어디 한번 보자!"
라인혁이 먼저 앞장섰다.
밥 먹을 때 그토록 호언장담을 했으니, 어디 한번 보자는 심 산이었다.
문을 염과 동시에 라인혁은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책상에 펼쳐져 있는 각종 먹거리들.
그러나 PX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치킨, 피자, 탕수육 등.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맛볼 수 있지만, 군대에선 돈 이 있어도 맛볼 수 없는 희귀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안준렬이 황지웅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외부 음식은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병사들의 능력만으로 이 많은 음식들을 반입시킬 수는 없었을 터.
해답은 간단했다.
"부소대장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별일이네, 우리 짠돌이 부소대장님이 이런 걸 다 사 주시고."
갑자기 뒤에서 부소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 짠돌이다. 짠돌인데 네가 뭐 보태 준 거 있냐?"
"헉, 부소대장님!"
라인혁은 곧바로 아부를 시작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절약정신이 참 투철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헤헤헤."
"하여튼 말은 잘해. 행보관님한테도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어서 먹자."
"예, 알겠습니다!"
1 생활관에서 벌어진 전역 기념 파티.
안준렬과 라인혁은 군 생활을 하면서 설마 생활관 내에서 치 킨과 피자를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지막 점호 시간이 찾아왔다.
1생활관으로 들어선 행보관 앞에 전투복을 차려 입은 안준렬 서 있었다.
"네가 생활관 책임자냐, 지웅이가 아니라?"
"병장 안준렬, 오늘이 행보관님께 보고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 이라서 이번만 생활관 책임자를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짜식. 그래, 어디 한번 맛깔나게 보고해 봐라."
"예, 알겠습니다."
분대장을 달았을 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했던 인원 보고.
그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1 생활관 저녁 점호 인원 보고. 총원 11 명, 열외 무. 현재 인원 11명. 번호!"
"하나!"
"둘!"
"셋!"
마지막 11명까지 모든 번호를 마친 뒤, 안준렬은 힘 있는 목 소리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상 저녁 점호 인원 보고 끝!"
"쉬어."
"쉬어!"
행보관은 안준렬을 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녀석, 한동안 생활관 책임자 안 했는데도 여전히 잘하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참으로 탐이 나는 인재다.
하지만 본인이 부사관이 되는 걸 거부했으니, 아쉽지만 오늘로서 안준렬과는 이 별을 고해야만 했다.
"저녁 점호는 짧게 해서 마치도록 하겠다. 외곽 근무자들은 근무 잘 서고. 그리고 내일 전역하는 병사들은 행정반으로 오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행정반에서 무엇을 할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안준렬과 라인혁이 행정반으로 향했을 때, 오종한이 이강진 에게 물었다.
"행보관님, 무엇 때문에 두 분만 따로 부른 거야?"
"행보관님은 전역 하루 전날에 전역자들을 따로 불러서 뭔가 를 사 주시곤 합니다. 치킨이 가장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치킨은 방금 먹었잖아?"
"계속 먹어도 맛있는 게 치킨 아니겠습니까."
순간 오종한은 이강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괜히 치느님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먹어도 또 먹어도 맛있는 치킨, 오종한은 납득하고 말았다.
* * *
행보관실에 들어선 안준렬과 라인혁은 병사들의 예상과 다른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되었다.
바로 족발이었다.
"어떠냐? 이 집 족발은 처음 시켜봤는데, 먹을 만하냐?"
"병장 라인혁. 예. 맛있습니다."
"양이 조금 부족한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을 거 같습니다."
"흠, 그래? 인정이 전역할 때도 여기서 족발 시켜야겠군."
마인정은 두 사람과 동기지만, 입대 일자가 1주 늦다.
그러다 보니 마인정은 오늘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맥주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세 사람.
라인혁은 전마등이 전역할 당시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마등이 형이 전역할 때 부러워 죽겠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희 차례가 오니까 기분 참 묘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여하튼 인혁이도 고생했고, 준렬이도 고생했고. 군대가 참 그지 같았을 텐데 용케도 잘 참고 버텼다.
사회에서도 군대에서 보여 줬던 것들처럼 열심히 하면 무엇을 하든 다 성공할 거다. 자, 한잔 더 하자."
"예, 알겠습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밤을 보내는 세 남자.
시간은 어느새 하루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
전역일이 찾아왔다.
* * *
이른 아침.
개인 짐을 꾸린 안준렬과 라인혁은 사열대 앞에 섰다.
이들이 지나갈 자리를 중심으로 길을 만들어 준 1중대 병사 들.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라 인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고필중이 늘리듯 외쳤다.
"라인혁 병장님! 우시는 겁니까?"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이 기쁜 날에 왜 울어, 형!"
여기저기서 격려가 쏟아졌다.
반면 안준렬은 끝까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열대 계단을 내려온 안준렬은 황지웅과 가볍게 악수를 주 고 받았다.
"힘내라, 분대장."
"힘낼게, 형도 나가서 힘내고. 우리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 락해."
"그래, 알았다."
고필중, 서일주와 인사한 다음에 마침내 이강진 앞에 선 안준 렬
"네 덕분에 군 생활 재미있게 했다, 강진아. 고마워. 그리고 너 도 몸 건강히, 아픈 곳 없이 무사히 전역하기를 기원하마."
"고마워요, 준렬이 형. 전역하고 나면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먹어요."
"알았어."
뒤이어 이강진은 라인혁과 뜨거운 포옹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준렬이랑 같이 바라 식당으로 찾아갈게! 꼭!"
"네, 대신에 저 전역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세요. 아마 없을지 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눈물의 이별식을 끝마친 1중대 병사들.
위병소를 통과한 순간, 라인혁의 눈물은 더욱 굵어졌다.
"잘 있어라! 애들아! 그리고 언젠간 꼭 다시 보자!"
"잘가요, 형!"
"준렬이 형도요!"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이는 안준렬.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은 한동안 저 들과 쌓아 올린 추억을 되새겼다.
이제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