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화. 하극상 (5) >
제42화. 하극상 (5)
이강진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오종한 병장을 찾았다.
"오종한 병장님."
"응? 나?"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같이 PX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쏘겠습니다."
백우호와 곽분섭은 이강진의 행동에 경악을 했다.
눈빛이 흔들리는 이들.
성태강도 내심 놀랐지만, 백우호와 곽분섭에 비하면 그래도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연예계에서 구른 경험이 있다 보니 남다른 포커페이스 유지 능력을 보여 줬다.
오종한은 이강진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괜찮아, 내 눈치 볼 것 없이 너희들끼리……."
안준렬이 오종한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같이 가 보너. 같은 분대원이 되었는데, 후임들이랑 같이 PX도 가 보고 그래야지. 다들 그렇게 해서 친해지는 거잖아?"
"……."
사회라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진솔한 이야기를 좀 나눠 보고, 분위기 좋다 싶으면 2차, 3차에 노래방 혹은 당구장까지 가서 밤 새도록 즐기다가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그 다음 날,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다.
하지만 군대는 애초에 음주가 허용이 안 된다.
술집도 없고, 당구장도 없다.
노래방은 있지만, 맨 정신으로 가면 재미가 없다.
텐션이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가야 재미있는 법.
그러면 결국 PX밖에 답이 없다.
오종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준렬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이상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 갔다 오겠습니다."
"천천히 다녀와도 되니까 충분히 즐기다가 와."
"즐길 수 있을 만한 분위기일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일단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안준렬이 도와준 덕분에 이강진의 계획은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총 S명이 PX로 향하게 되었다.
이강진 일행이 생활관을 비운 사이.
마인정과함께 사이버 지식 정보방에 들렀던 라인혁이 1생활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뭐야, 생활관이 텅텅 비었네? 우리 귀여운 일, 이병들, 다 어디 갔어?"
"뭐하게?"
"FIFA, 이제 부대에서 게임할 일도 없을 테니까 애들하고 같이 게임이나 하려고 했지. 근데 아무도 없네. PX라도 갔어?"
"어, 종한이하고 같이."
순간 라인혁은 한숨을 푹 내쉬 면서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그러면 못 건드리겠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PX에서 먹을 것들을 고르기 시작하는 1분대원들.
오종한은 냉동고에서 초코 파르페를 꺼 냈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이강진은 오종한에게 탁월 한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면 역시 초코 파르페 아니겠습니까."
"너도 이거 좋아해?"
"예, 좀 비싸긴 하지 만, 그래도 제 입맛에 맞아서 한 달에 2~3 번 정도는 사먹곤 합니다."
"아이스크림 먹을 줄 아네. 여기에 건빵 부스러기 넣어서 먹 으면 더 맛있는 거, 모르지?"
"엇!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까?"
"나도 상병 때 처음 알았어. 나중에 어떻게 먹는지 시범을 보여 줄게."
"예, 알겠습니다."
공통점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도 이어 갈 수 있다. 먹을 것들을 사들고 PX 옆에 있는 휴게실로 이동한 병사들. 그 와중에 백우호와 곽분섭은 오종한이 영 신경 쓰였다. 유일하게 이강진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대했다.
성태강도 점점 오종한에게 먼저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오종한 병장님, 이거 다 익었습니다."
"땡 큐."
전자레인지에서 막 돌린 냉동을 가져온 성태강은 오종한 앞 에 물만두를 펼쳤다.
이강진이 오종한에게 먼저 접근하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이유 가 있으리라.
성태강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강진도 성태강은 연예계 짬밥이 좀 되니 금세 눈치챌 줄 알 았다.
하지만 백우호와 곽분섭의 경계심은 여전했다.
특히 백우호는 왜 이강진이 오종한 병장한테 친하게 굴려고 하는지 영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강진은 아직 1분대원 누구에게도 한종덕에게 들었던 사연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오종한의 개인사를 멋대로 말해도 될까, 이런 생각이 이강진 의 입에 걸려 있는 지퍼를 계속 잠그려고 했다.
만약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꼈다면 오종한, 본인이 먼저 나서 서 1분대원들에게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출을 당했다고 이 야기를 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종한은 침묵했다.
이강진은 그가 '말하기 싫어서' 이런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1분대원들에게 말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이강진은 사연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한종덕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
안 들어줘도 상관없는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그 약 속을 이행하고 싶었다.
이런다고 포상 휴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
이강진은 슬슬 작전을 이행하기로 했다.
사실 한종덕과 만났을 때, 좋은 정보를 하나 접수했다.
"오종한 병장님, 혹시 FIFA 프로 게이머 줄신 아니십니까?"
"……!"
그 말을 들은 순간, 오종한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1분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오락거리, FIFA.
백우호, 성태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곽분섭도 FIFA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종한도 짐짓 놀란 눈치를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게임 채널에서 FIFA 리그 중계해 줄 때 얼핏 본 거 같아서 여쭤본 겁니다. 조한은행 배 FIFA 리그 아니었습니까?"
오종한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대단하네, 4년 전 일이라서 아무도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우리 중대에서도 나 처음에 봤을 때, 내가 프로 게이머 출신이 라는 걸 아는 애가 딱 한 명밖에 없었거든."
그 한 명이 한종덕이라는 사실을 이강진은 알고 있었다.
우승은 못 했지만, 그래도 3개 시즌에서 연달아 16강 이상의 성적을 꾸준히 거뒀던 선수였다.
기업이 정식으로 후원하는 프로 구단에도 입단했었다.
그러나 입대 때문에 오종한은 스스로 구단을 나와야만 했다.
"전역하시고 나면 프로 게이머 다시 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내가 특줄한 실력이 있던 것도 아니 고."
오랜만에 프로 게이머 시절 때의 자신을 떠올려서일까, 오종한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백우호와 후임들은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오종한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었다.
오종한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관심이 쏠려서일까, 오종한은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내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을 텐데."
"아닙니다!"
"프로들과 경기하면 어떤 기분입니까?"
"혹시 강서욱 선수하고도 친하십니까?"
갑자기 질문이 쏟아졌다.
과도한 관심에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이내 오종한은 후임 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 * *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백우호는 오종한을 재촉했다.
"오종한 병장님! 지금 게임기 자리 났습니다!"
"그래? 알았어, 가자."
후임들은 프로의 실력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잔뜩 들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라인혁과 안준렬은 혼자서 덩그러니 생활관에 남은 이강진을 응시했다.
"우리 강진이, 이번엔 또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이강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군인인 제가 마법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하하하."
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게 마법보다 더 뛰어난 능력일지도 모른다.
* * *
새벽 2시에 눈을 뜬 이강진은 곧장 행정반으로 향했다.
총기 현황판을 수정하고 말판을 옮겨 뒀다.
그러는 동안, 오늘 처음으로 외곽 근무에 나서는 선임 근무자 가 행정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강진의 새로운 선임, 오종한이었다.
2부소대장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이강진과 오종한을 바라봤다.
"오늘이 종한이가 첫 근무 서는 날인가?"
"병장 오종한. 예 그렇습니다."
"병장이니까 뭐, 굳이 근무자 수칙 교육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냥 2중대에서 했던 거 그대로 하면 된다. 당직사령님이 불시 에 순찰 돌지도 모르니까 그것만 주의하고."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투입!"
"투입!"
탄약고 초소로 향하는 이강진과 오종한.
초소로 들어온 오종한은 눈앞에 펼쳐진 낮선 경관에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전역하기 전까지 같은 풍경만 보다가 나갈 줄 알았는데, 설마 1중대 탄약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게 될 줄은 몰랐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예상 못한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하고."
가만히 말을 듣던 오종한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우리 아버지하고 비슷한 말을 하네."
"그렇습니까?"
세대가 비슷하다 보니 사상이나 어투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프로 게이머 생활할 때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거든. 그렇지, 삶이라는 게 좋은 일도 있고 좆같은 일도 있고 그런 거지."
전출당한 일은 적어도 후자에 속한다는 건 이강진도 아는 사 실이었다.
"년 내가 왜 전출당했는지 알고 있지?"
"그건……."
"갑자기 나 도와주려고 하는 거 보니까 어디서 뭔가 들은 게 있는 거 같던데, 솔직하게 말해 봐. 이런 걸로 화 안 낼 테니까."
결국 이강진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오종한.
"뭐, 어쩔 수 없지. 하긴 그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외부로 안 새어 나가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저 그랬는데, 내막을 듣고 나 니까 오종한 병장님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습니다."
"나 같은 위험한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내무 부조리에 대항해서 홀로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나 오종한에게는 당연한 거였다.
"내가 프로 게이머 생활할 때, 우리 구단에서도 그거랑 비슷 한 경우가 있었거든.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선배다운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그런 거 전혀 없이 자기 스트레스 풀려고 일방 적으로 갈구기만 하고. 후배들 출전 기회까지 다 빼앗아 버리고. 그것 때문에 프로의 꿈을 접고 나간 동생들도 있었어. 내가 그 것 때문에 좆같아서 한마디 했지. 근데 설마 군대까지 와서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지, 군대니까오히려 더 그런 건 가?"
달라진 경치를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가는 오종한.
"군인이든 워든 다 같은 사람이잖아? 군기를 잡는 것까진 좋 다 이 말이야. 그런데 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의 인격을 밟지 않 는 선에서 해야 하잖아, 후임들이 무슨 노비도 아니고. 다들 집 에선 귀한 자식으로 자랐는데, 단지 후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 놓고 때리고 인격 모독하고. 난 성격상 그런 거 못 봐."
오종한은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한 남자였다.
이제야 이강진은 왜 자신이 오종한을 도와주려고 했는지 깨 달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를 나누며 근무 시 간을 보내게 되었다.
< 제42화. 하극상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