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화. 하극상 (3) >
제42화. 하극상 (3)
이강진은 두 사람의 계급을 먼저 확인했다.
'일병 한 명, 상병 한 명.'
굳이 군번을 따져보지 않아도 두 사람 다 오종한 병장의 후임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두 사람은 이강진이 입고 있는 쥐사복을 보고서 다가온 게 아니었다.
이강진의 얼굴을 보고 다가온 것이었다.
취사반에 볼일은 없을 터.
"그쪽에 오종한 병장님 가셨죠?"
"예, 이틀 전에 오셨어요."
"이런 부탁을 하기 미안한데……."
상병이 대표로 이강진에게 말했다.
"오종한 병장님, 아무쪼록 잘 좀 부탁드릴게요. 그분이 저희 들을 대신해서 희생한 건데…… 손을 쓸 틈도 없이 바로 영창에 갔다가 1중대로 가버리셔서 어찌할 방법이 없네요."
갑작스러운 이별에 안타까워하는 2중대 병사들이었다.
그보다 이강진의 귀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희생.
"오종한 병장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실은 말이죠……."
병사가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뒤에서 간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한종덕! 너, 이 녀석 지통실 안 가고 뭐 해! 내가 심부름 보낸 거, 잊었냐?"
"상병 한종덕! 금방 가겠습니다!"
한종덕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미안합니다. 아무튼 오종한 병장님 좀 잘 부탁드려요!"
자초지좋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버린 이강진.
'궁금증만 대폭 늘려 놓고 가네.'
하극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희생이라는 단어를 더하면, 어떤 에피소드가 완성되는 걸까?
이강진은 작가가 아니다.
그가 몰랐던 숨겨진 플롯이 분명 존재할 터.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의문은 점점 답답함으로 번져갔다.
* * *
오호만 상병은 혹시 내막을 알고 있을까?
이런 기대감을 가져 본 이강진이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실망 스러웠다.
"내가 알 리가 없지."
오호만은 1중대 중에서도 타 중대 사람들과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자주 얼굴을 보는 유일한 병사였다.
그래서 혹시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나였다.
"오종한 병장님이 자꾸 신경 쓰이나 보네. 하긴 너하고 같은 식구가 되었으니까, 신경이 안 쓰인다면 오히려 말이 안 되겠 지."
그것도 그거지만.
군대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군대는 같은 훈련, 같은 일상이 계속 반복된다.
새로운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호기심 가는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집 중된다.
별것도 아닌 일에도 풍부한 기쁨을 느낀다.
예를 들자면 야채 기르기라든지, 이런 것들 말이다.
밖에서 봤을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 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일'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 한지, 알 만한 사람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강진은 점점 오종한이라는 사람이 가진 스토리 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오호만 상병님."
"엉, 왜?"
"혹시 나중에라도 오종한 병장님에 대한 정보가 들어온다면, 저한테 따로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부탁을 드려서 정 말 죄송합니다."
만약 이강진이 취사병이었다면 굳이 오호만에게 이런 부탁까 진안 했을 것이다.
"아니, 괜찮아. 난 너한테 더 큰 부탁도 했는데, 뭘. 알았어, 까짓것 어렵지 않지. 일단 2중대 취사병들한테 한번 물어볼게."
"감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오호만은 이강진에게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베푼 게 많은 자는 이런 식으로 주변에서 알아서 도움을 준다.
이강진은 과거의 자신을 만나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취사병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강진.
1생활관에는 백우호와 오종한, 두 명만 있었다.
백우호는 눈치를 보더 니 오종한 병장에게 다가가 리모콘을 건 넸다.
"오종한 병장님, 보고 싶으신 채널 있으십니까?"
"응? 아니, 됐어. 너 보고 싶은 거 봐."
그렇게 말한 오종한은 들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백우호는 오종한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듯한 눈치였다.
그때, 행정반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병장 오종한, 병장 오종한은 행정반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이 부르시나 보네. 나, 행정반 가 있을게."
"예, 알겠습니다."
1생활관을 나서려던 오종한은 문앞에서 잠시 서 있던 이강진 과 딱 마주쳤다.
오종한은 이강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세 번 토닥여 줬다.
"수고했어."
"일병 이강진, 아닙니다."
기
그와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전역 때까지도 줄곧 이런 패턴일 것이다.
이강진이 1생활관에 모습을 드러내자, 백우호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잘 왔다, 강진아. 오종한 병장님하고 둘이서만 여기 있으려 니까 어찌나 숨이 막히든지……. 어휴!"
굳이 백우호가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왜 둘만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준렬 병장님하고 라인혁 병장님은 동기들끼리 마지막으로 PX 회식하고 싶다고 내려가셨고. 황지웅 상병님은 여자 친구랑 통화, 고필중 상병님하고 태강이는 FIFA. 그리고 나머지는 코인 노래방 갔어."
"그래?"
"너라도 있으면 같이 헬스장이나 가려고 했는데, 혼자 가려 니 까 심심하고 그래서 티비나 볼까 하고 왔는데…… 잘못된 선택이 었 더라."
백우호는 오종한을 아직 어려워하고 있었다.
이건 비단 백우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다.
아니, 딱 두 사람은 예외였다.
안준렬 그리고 라인혁.
오종한이 하극상으로 부대 전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은 오히려 역으로 오종한에게 말을 자주 붙였다.
'같은 병장이라서 그런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시간도 없었을 텐데, 희한한 일이었다.
다음 날 저녁.
이강진은 개인 정비 시간을 이용해 오호만을 직접 찾아갔다.
때마침 오호만은 샤워를 마치고 생활관에 앉아 쉬려고 하던 찰나였다.
"오호만 상병님."
"어, 강진아. 잠깐만 기다려 봐 이것만 바르고."
수분 크림을 바른 뒤에 오호만은 이강진과 함께 흡연실로 향했다.
담배에 불을 붙인 오호만은 밤하늘을 향해 길게 연기를 뿜어 냈다.
"어제 말했던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지?"
"예, 그렇습니다."
"일단 2중대 애들한테 물어보긴 했는데, 그게 말이지……."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오호만.
이때부터 이강진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쪽 애들도 잘 모른다고 하더라. 부대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중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런 거에 신경 쓸 틈 이 없었대. 뒤늦게 병사들 붙잡고 물어보려고 해도 쉬쉬하는 분 위기이기도 하고. 보니까 오종한 병장님에 대해선 거의 금기시 하고 있다더라."
"그렇습니까."
왜 안 좋은 예감은 늘 이리도 적중률이 높게 나오는 걸까.
가끔은 Miss가 떠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미안하다, 강진아."
"오호만 상병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호만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원하는 결과물은 얻지 못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지.'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이강진은 끝을 보기로 했다.
20여 년 동안 쌓여 있던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어낼지 이강진 은 고민을 거듭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거다.
'한종덕이라는 사람과 다시 만나면 돼.'
하지만 무슨 수로?
이게 문제다.
아무런 용무 없이 타 중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다.
간부라면 가능하겠지만, 이강진은 불행하게도 병사다.
행보관에게 부탁할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런 사소한 일 에 행보관이라는 카드를 사용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행보관이 무슨 이강진의 후임도 아니고 말이다.
'방법을 떠올려 보자.'
생각하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다.
'잠깐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나, 군종병이잖아!'
1중대만 기독교 군종병이 있는 게 아니다.
본부중대, 2중대 그리고 3중대까지, 각 중대별로 한 명씩 기독교 군종병을 두게 되어 있었다.
2중대 기독교 군종병을 맡고 있는 사람은 서강우 상병.
'그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일요일이 오기까지는 아직 4일이나 남았다.
그때까진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시야가 너무 좁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을.
서강우 상병은 취사병처럼 거의 하루 종일 취사반에 내려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무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나한테 말을 해 줄지가 문제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아닌 데다가 2중대 내에서도 오종한 이 저지른 사건을 거의 함구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과연 이강진 에게 속 시원하게 말해 줄까?
이것이 약간 불안했다.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얌전히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슬슬 작업에 들어갈 시간이다.
정글모와 목장갑을 챙겨 들고 산언저리로 향하는 이강진.
오전 집합 때 이강진은 탄약고 초소 근무를 서다가 내려왔다.
그래서 이강진만 뒤늦게 목진지 보수 작업팀에 합류하게 되 었다.
'농땡이 피우고 싶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니까 농땡이 피우기 딱 좋은 때였다.
어디 가서 한 20분 정도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올라가면 될 거 같았다.
왜 늦었냐는 말을 하면 배가 아파서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왔다고 하면 된다.
'좋았어.'
여태껏 근면성실하게 굴었으니, 한 번의 외도는 괜찮지 않을 까.
이강진은 산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짱 박히기 좋은 장소가…….'
기억을 되새겼다.
공병과 친한 사이라면 공병 창고가 베스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관계는 아니 었기에 이강진은 다른 장 소를 물색하기로 했다.
이강진만의 비밀의 장소가 있었다.
'분리수거장 뒤쪽이 좋겠어.'
짬타이거 한 마리의 보금자리이기도 한 그곳으로 가기로 결 정했다.
걸음을 옮기 려 던 찰나에 뒤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훈련 물자가 담긴 큰 박스를 혼자서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오이향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가 버릴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은 이강진.
'저번에 휴가 나갈 때 시내까지 차 태워다 줬는데, 무시할 순 없겠지.'
오이향을 도와주고 난 다음에 농땡이를 피우다가 올라가도 괜 잖아 보였다.
오이향을 도와주느라 늦었다고 핑계를 대면되니까.
"충성!"
이강진이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오이향은 이강진의 거수경례를 곧장 받아 줬다.
"충성, 작업 가는 길이야?"
"화학 장교님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혼자 옮기기 무겁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한데……."
"둘이서 들면 옮기기 쉬울 겁니다. 제가 오른쪽에서 들겠습니다. 화학 장교님은 왼쪽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오이향은 이강진의 친절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무게와 크기였다.
괜히 고집 부리기보다는 빨리 업무를 진행하는 게 더 효율적 이다.
"근데 어디로 가져가면 됩니까?"
"아, 이거?"
오이향은 대대 안쪽 방향을 가리켰다.
"2중대로 갈 거야."
예상치 못한 기회에 이강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제42화. 하극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