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3화. 진지공사 (4) >
제33화. 진지공사 (4)
어머니와 통화를 마친 이강진은 이후에 일곱 번의 통화를 마 치고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예전에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친해진 형을 비롯해서 가 게 사장, 아는 동생 등등. 온갖 곳에서 연락이 다 왔다.
한지윤에게도 연락이 왔었다.
가장 마지막 통화가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통화를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저녁 점호가 시작 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준비를 하나도 못했네.'
어쩔 수 없이 당직사관에게 연등을 신청해야만 했다.
내일 참모총장을 만나러 간다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당직사관을 맡게 된 통신반장은 1생활관 점호 때, 이강진과 성태강에게 따로 물었다.
"준비는 다 끝냈어?"
"일병 이강진. 죄송합니다. 아직 못 끝냈습니다."
"그래? 시간 여유롭게 줄 테니까 끝내고 자. 오늘 네 외곽근무 는 짬처리 시켰으니까 푹 자두고. 그리고 중대장님이 강조하셨 는데, 내일 절대로 실수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무슨 뜻인지 알 지?"
"예, 알고 있습니다."
참모총장 앞에선 재채기도 해선 안 된다.
그 재채기 한 번이 나중에 엄청난 후폭풍이 되어 돌아올지 모 르기 때문이다.
남들 다 잘 때, 이강진은 전투화를 들고 밖으로 나와 열심히 광내기에 돌입했다.
'살다 살다 참모총장을 다 만나게 될 줄이야.'
그전에 자신의 모습이 티비에, 그것도 공중파에 비춰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은 당분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오늘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당장 이것이 걱정이다.
이른 아침부터 이강진과 성태강, 민채군은 아침 점호도 열외 된 채 병사 식당으로 향했다.
밥을 먹 고 올라온 다음에 A급 전투화와 전투복을 갖추고서 사열대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행보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행보관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왜 행보관 혼자서 저렇게 뚱해 있을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사 권주명!"
행보관의 부름에 깜짝 놀란 통신반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나 없는 동안, 병사들 시켜서 배수로 작업 어떻게든 끝내둬 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행보관은 표창장보다 진지공사가 우선이었다.
통신반장을 돌려보낸 행보관은 가시 돋친 어투로 혼잣말을 흘 렸다.
"4일 내내 날씨가 방해하더 니, 이제는 육군본부에서까지 방해 를 하네. 씨불."
행보관의 말을 바로 곁에서 들은 세 명의 병사는 온몸에 소름 이 돋았다.
이 와중에 작업 생각을 하고 있는 행보관이 너무 섬뜩하고 무 서웠기 대문이다.
그는 역시 뼛속까지 행보관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육군본부를 방문한 이강진.
중대장, 그리고 소대장과 합류한 이후부터는 정신없이 시간 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표창장 수여식 리허설을 세네 번 반복하고 하서야 본 방송이 시작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의 등장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별, 별, 별.
은빛별들 속에선 병사 계급 따윈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중에는 이미 한 번 봤던 사람도 있었다.
기운상의 아버지, 기정수 소장이었다.
기정수를 비롯해서 육군본부에서 일하는 간부들이 참모총장 의 뒤를 따랐다.
참모총장은 표창장 수여식이 시작되기 전에 1075 대대장, 그 리고 1중대 간부들과 짧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후에는 병사들의 차례다.
"추우웅!! 서어엉!!! 상병 민채군!!!"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군! 역시 국민적 영웅다운 패기야. o^하하!"
"감사합니돠아아아!!"
저 한 번의 대답에 목이 다 나갈 것만 같았다.
이다음은 이강진의 차례다.
'질 수 없지!'
패기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충서엉! 일벼어어엉! 이! 강! 진!"
참모총장은 이강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네가 아주 고생이 많았어. 일병인데도 그 정도 감량이 있 다는 게 놀랍더군."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그런가. 목소리도 우렁차고. 아주 마음에 들어. 앞으 로 자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두겠네."
"영광입니다!"
성태강도 최대한 목소리를 높이면서 대답했다.
큰 무대에 몇 번 서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경험자여서 그런지 이강진, 민채군에 비해서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를 취했다.
버스 구줄 사건의 주역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바로 표창장 수 여식이 시작되었다.
간부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병사들.
방송국에서 온 사람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강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부대에서 만능이라 불리는 이강진이라 하더라도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중대장조차 옆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데, 병사들이라고 별 수 있을까.
그 와중에 행보관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대장부터 시작해서 한 명씩 나와 참모총장으로부터 표창장 을수여받았다.
이강진의 차례까지 왔다.
사회자가 대신 표창 내용을 낭독했다.
"위 병사는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해냈 기에 이 표창장을 수여함. 2013년 9월 13일. 육군참모총장 대장 서위 현."
표창장을 건네줌과 동시에 참모총장이 이강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면서 이강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관등성명을 힘 있 게 외쳤다.
"일병 이강진! 감사합니다!"
젊은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 이강진의 첫 공식 무대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수여식이 끝난 직후에 1중대 인원들은 대대장과 함께 육군본 부 간부들과 점심 식사를 진행했다.
식사를 하는 모습도 기자들에겐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찰칵, 찰칵!
이강진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자들 앞에 노줄되었다.
'마치 연예인이 된 기분이군.'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나중에 가니 많이 익숙해졌다.
딱딱했던 표정도 어느 새 자연스러워졌다.
밥을 먹으면서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건빵 주머니 쪽으로 슬쩍 손을 뻗었다.
툭툭.
이 안에 포상휴가증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5박 6일짜리다. 웬만해선 받을 수 없는 거물급 녀석이다.
'이 녀석을 어떻게 사용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도가 수직 상승했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
이후의 일정은 없을 줄 알았다. 얌전히 행보관의 차를 타고 부대로 돌아가면 끝. 이렇게 생각을 했으나.
갑자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강진 씨! 처음 현장에 출동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구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 요?"
아직 인터뷰가 남아 있었다.
중대장은 이강진에게 눈빛을 보냈다.
잠깐만 어울려 달라고.
한숨을 삼킨 이강진은 기자들의 질문에 빠르게 답하기 시작 했다.
"버스를 보자마자 안에 승객들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성태강 이병의 도움을 받고 바로 시민분들의 안전부터 확인했습니다. 그 다음……."
추가 질문이 안 나오게끔 최대한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줬다. 이쯤이면 됐겠지.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남아 있었다.
"왜 그때 속옷 차림이었습니까?"
이것도 복잡한 의미로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왜 팬티 차림으로 나타났나?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행보관의 무리한 진지공사 일정 때문에 그런 복장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분명 행보관에게 타격이 발생할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대답.
그런 대답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 결심했어!'
드디어 이강진이 입을 열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전투복을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옷 차림으로 출동했습니다."
이게 과연 현답이 될지 말지.
그건 대중들이 알아서 판단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강진은 부디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했다.
'난 최선을 다했어.'
이건 진심이다.
* * *
버스 구출 사건으로 한동안 부대가 시끌시끌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싶을 때, 대대장은 1중대 중대장 과 행보관을 대대장실로 따로 불렀다.
"중대장, 고생 많았어. 특히 행보관님이 정말 많이 애써주셨 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중대장이 없던 사이에 행보관이 병사들을 잘 통제해줬다. 최 전선에서 활약한 건 이강진과 버스로 뛰어 올라갔던 병사들이 었지만, 행보관이 전체적으로 병사들에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하라고 빠르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2차 사고가 발생했을지 도 몰랐다.
행보관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부사관 시절 때부터 야 전부대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군생활을 보내왔다.
그러다 보니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사건이 벌어져도 능동적으 로 대처가 가능했다.
이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원사의 짬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런데 행보관님."
대대장은 육군본부에 방문했을 당시에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수여식 내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라 도 있습니까."
1075 대대 입장에선 경사가 났었다. 참모총장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으니까.
그럼에도 행보관의 심기는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대대장은 알고 싶었다.
"진지공사 때문입니다."
"진지공사…… 말입니까?"
"예."
대대장이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는 필히 행보관의 개인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내 가 아프다든지. 아니면 딸이 속을 썩였다든지. 이런 것들 말이 그런데 뜬금없이 진지공사라니.
"대대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저희 1중대가 저번 주에 진지공 사 주간이 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목진지, 배수로 보수를 이번 기회에 다 마무리 지으려고 했 는데…… 틀렸습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행보관이 육군본부로 떠나던 날은 진지공사 마지막 날이었다. 통신반장에게 어떻게든 배수로 작업만이라도 마무리를 지으라 고했건만.
결과는 실패였다.
사실 행보관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통신반장의 능력으로는 무리일 거라고.
모두가 해피엔 딩일 때, 행보관만 혼자서 배드엔 딩이다.
하지만 아직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대대장님께 간곡히 청하겠습니다."
행보관의 마지막 수단이 발동되었다.
* * *
일요일 오후 2시.
예상치 못한 집합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지금 전 병력은 즉시 행정반 옆으로 집합해주시기 바 랍니다.
갑작스런 집합에 병사들은 동요했다.
"또 뭐래."
"오늘 당직사관님 누구야?"
"2 부소대 장님."
"그래? 그러면 일광건조 같은 거 시키려고 집합시키는 건 아니겠네."
"그럼 대체 뭐지?"
2부소대장은 주말에 집합을 거의 안 거는 간부다. 그래서 집 합의 의도가 더욱 궁금했다.
가보면 알 것이다.
하나둘씩 집합하는 병사들. 이들 앞에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2부소대장은 어디 가고, 행보관이 대신 등장했다.
"행보관님이시잖아?"
"주말에 안 쉬고 출근하신 건가?"
"느낌이 싸한데……."
병사들의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전체 주목."
"주목!"
바짝 긴장한 병사들을 바라보던 행보관이 갑자기…….
웃었다.
"너희들에게 중대한 사항을 전달하겠다."
진지공사 내내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행보관이 처음으로 미 소를 지었다.
머지않아 병사들은 이 미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진지공사를 다음 주까지 연장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도록."
그건 작업에 미친 악마의 것이었다.
< 제33화. 진지공사 (4) > 끝